Director 감독, 안느 퐁텐
<코코 샤넬>의 감독 안느 퐁텐은 1980년대 배우로 영화계에 첫발을 들여놓은 인물이다. 그녀는 1993년 <사랑 이야기는 나쁘게 끝난다… 일반적으로>(Les histoires d’amour finissent mal… en general)로 감독 데뷔했고 이후 97년작 <드라이클리닝>(Nettoyage a sec)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나는 패션보다는 독특한 샤넬의 캐릭터에 흥미가 있었다. 그녀가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는 점에 감동을 받았다. 프랑스 시골 출신의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했지만 특별한 개성을 지닌 이 소녀는 여성들이 죄수처럼 행동과 복장에 제약을 받고 살아가던 시대와 사회를 앞서가는 존재가 되었다. 침실 벽에 젊은 샤넬의 사진을 붙여놓은 적도 있지만 그녀에 대한 영화를 만들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Enterprise 사업
오늘날 샤넬(정식 명칭으로는 ‘샤넬 S.A’)은 기성복, 핸드백, 향수, 화장품 등을 포함한 거대 라이프 스타일 기업으로 성장했다. 현재 샤넬의 소유주는 1924년 코코 샤넬의 동업자였던 피에르 베르트하이머의 손자들이다. 한국에서도 인기있는 루이비통, 구치, 펜디를 소유한 거대 명품기업 LVMH와는 달리 개인 기업 형식으로 운영되는 샤넬은 경영 실적을 절대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자본주의적인 사업의 확대나 이윤의 추구만이 샤넬이라는 기업의 모토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Faces 얼굴들
샤넬은 이 시대의 가장 우아한 여배우들을 자사의 얼굴로 채용해왔다. 향수 ‘샤넬 No.5’의 모델은 마릴린 먼로(1950년대), 카트린 드뇌브(1970년대), 니콜 키드먼(2000년대)를 거쳐 현재는 영화 <코코 샤넬>의 주인공인 오드리 토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역시 가장 유명한 샤넬의 얼굴은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사진)임에 틀림없다. 그녀는 샤넬의 트위드(‘J’ 참조) 정장을 즐겨입었고 이는 ‘재키 룩’이라 불릴 정도로 일반 여성들의 패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샤넬의 옷 역시 케네디 암살 현장에서 재클린 케네디가 입었던 분홍색 트위드 재킷이 아닐까. 케네디의 피가 묻은 분홍색 샤넬 재킷은 미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아이콘이다.
Gabrielle 가브리엘
코코 샤넬의 본명은 가브리엘 보네르 샤넬(Gabrielle Bonheur Chanel)이다. ‘코코’는 카바레 가수 시절 샤넬이 불렀던 노래 <누가 코코를 보았니?>(Qui qu'a vu Coco?)에서 유래한 별칭이다. 그 노래에서 코코는 강아지 이름이다.
Handbag 핸드백
한국 여성들뿐만 아니라 전세계 여성들이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핸드백은 샤넬의 ‘2.55 퀼팅백’일 것이다. 사실 이 백은 코코 샤넬이 일구어낸 혁명 중 하나다. 그녀는 1955년 퀼팅(누빔) 처리한 가죽백에 금색 체인을 달아 여성들이 어깨에 메고 다닐 수 있는 핸드백을 고안했다. 샤넬이 이 백을 시판하기 이전까지 모든 여성들은 거추장스럽게도 핸드백을 손에 들고 다녀야만 했다. 여성의 양손을 샤넬의 ‘2.55 퀼팅백’이 해방시켰다. 영화 <코코 샤넬>에는 젊은 샤넬이 처음으로 끈 달린 핸드백을 고안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물론 전적인 픽션이다.
Immitation 짝퉁
샤넬은 국내에서 짝퉁이 가장 많이 범람하는 브랜드다. 국회 산업자원위원회가 특허청으로부터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샤넬은 2004년부터 3년간 국내에서 적발된 7636건의 짝퉁 가운데 16.5%를 차지하고 있다. 2위는 11%의 루이비통, 3위와 4위는 8.1%와 7.1%를 차지한 카르티에와 구치다. 미국 패션지 <하퍼스 바자>와의 인터뷰에서 커트니 러브는 말했다. “짝퉁 샤넬을 입느니 차라리 벌거벗고 다니겠다.” 그렇다면 커트니 러브의 유명한 노출증은 마약 때문이 아니라 샤넬 진품을 살 돈이 없어서?
Jacket 트위드 재킷
샤넬의 가장 유명한 의상은 트위드 재킷이다. 트위드(Tweed)는 서로 색이 다른 모(毛)사를 섞거나, 모사와 다른 종류의 실을 섞어서 얼룩덜룩한 색감과 거친 질감을 가지도록 직조된 섬유를 의미한다. 거칠고 무거운 트위드 소재는 일반인의 겨울용 의상을 만드는 데 주로 사용되었으나 코코 샤넬에 의해 실용적이면서도 패셔너블한 아이템으로 거듭났다. 사진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앤 해서웨이가 입고 나온 샤넬의 트위드 재킷.
Karl Lagerfeld 칼 라거펠트
현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1952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나서 파리로 이주, 1964년 클로에(Chloe)의 수석 디자이너 등을 거쳐 1982년 샤넬의 군주로 군림하게 됐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이전 코코 샤넬 디자인의 철학을 지키면서도 진부함을 떨쳐낸 디자인으로 샤넬의 역사를 새롭게 되살린 공로를 치하받고 있다. 사실 라거펠트는 <코코 샤넬>의 캐스팅에 불만이 좀 있었다(그는 오드리 토투가 아니라 페넬로페 크루즈가 샤넬 역을 맡길 원했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패션쇼 장면을 위해 라거펠트는 직접 샤넬 개인 박물관의 빈티지 의상들을 선별했다. 사진은 에마 왓슨과 함께한 칼 라거펠트.
Little Black Dress 리틀 블랙 드레스
외국 패션 리얼리티 쇼를 보면 언제나 나오는 문장. “여자라면 LBD를 옷장에 한벌은 꼭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LBD는 리틀 블랙 드레스의 축약어로 별다른 장식없이 정갈하게 만들어진 검은색 이브닝드레스나 칵테일 드레스를 의미한다(대개 길이는 무릎 위에 살짝 걸칠 정도다). 패션 전문가들이 ‘시대를 타지 않는 여성의 필수품’이라고 말하는 LBD는, 물론 코코 샤넬의 수많은 혁명적 창조물 중 하나다. 1920년대 사람들은 검은색이 장례식에 갈 때나 입을 법한 죽음의 색이라고 여기며 기피했다( 페이지 ‘P’참조). 그러나 1926년 코코 샤넬이 죽음의 색을 이용해 코르셋도 없고 땅에도 질질 끌리지 않는 짧은 드레스를 만들자 상류층 여성들 역시 LBD를 입고 호사스런 파티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Marriage 결혼
코코 샤넬은 피카소, 장 콕토,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 수많은 당대의 예술가들과 염문설을 남겼지만 결코 결혼하지 않았다. 샤넬 전기들에 따르면 그녀도 딱 두번 결혼을 꿈꾼 적이 있다. 첫 번째 남자는 영화 <코코 샤넬>의 주인공이기도 한 영국인 사업가 보이 카펠이다. 샤넬이 파리에 모자가게를 열며 디자이너의 꿈을 꾸도록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카펠은 샤넬에게 청혼을 하러가던 길에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카펠과 샤넬의 로맨스는 영화 <코코 샤넬>의 핵심이기도 하다). 카펠이 죽은 지 일년이 지난 1912년 샤넬은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후손 드미트리 파블 로비치 대공과 사랑에 빠졌다. 샤넬은 이후 자서전에서 “드미트리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두 남자 중 하나”라고 밝혔으나 두 사람의 관계는 결코 결혼에 이르지 못했다. 다만 드미트리는 샤넬을 향수의 세계로 끌어들여 결국 ‘샤넬 No.5’를 낳았으니 결혼보다 값진 결과를 낳은 관계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사진은 <코코 사넬>에서 보이 카펠 역을 맡은 알레산드르 니볼라.
No.5 샤넬 넘버.5
샤넬의 첫 번째 조향사였던 그리스 항수 전문가 에르네스트 보가 코코 샤넬을 위해 만든 역사적인 향수. 첫 향수인데 왜 이름에 5번이 붙어 있는가.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샤넬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가 5였다. 둘째. 에르네스트 보가 만든 여러 향수 중에서 샤넬이 선택한 게 다섯 번째 향수였다. 물론 샤넬 No.5가 이토록 유명해지는 데는 마릴린 먼로의 공이 컸다. 밤에 뭘 입고 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게다. “샤넬 No.5요.”
Objection 반감
몇몇 프랑스 언론은 <코코 샤넬>이 나치 지지자였던 샤넬의 어두운 면모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고 불평했다. 사실이긴 하다. 코코 샤넬은 나치와 동조한 프랑스 비시 정부의 지지자였다. 그녀는 심지어 나치 장교 한스 쿤터 본 딩클라게와 동거하며 ‘모델의 모자’라는 암호명으로 나치 스파이 활동을 돕기도 했다. 혹자는 그녀가 반유대주의자에 동성애 혐오주의자라고 증언한다. 그냥 ‘사랑한 게 죄’라고 변호하고 싶다.
Paul Poiret 폴 푸아레
지금까지 ‘샤넬이 여성들을 코르셋에서 해방시켰다’고 썼다. 전적으로 사실은 아니다. 여성들을 가장 먼저 코르셋에서 해방시켰던 것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했던 디자이너 폴 푸아레(사진 오른쪽에 있는 과체중의 남자)였다. 그는 19세기의 과도한 장식이나 인공적인 실루엣을 제거하고 여성 육체의 자연스러운 선을 살리는 옷들을 만들어 패션을 진정한 현대로 들어서게 만든 장본인이다. 푸아레는 회화를 패션에 도입한 첫 번째 디자이너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야수파의 색채를 적극적으로 의상에 반영해 어둡고 침침한 색깔 대신 노랑색이나 초록색, 오렌지색 같은 다양한 색채의 옷들을 만들었고, 자신의 옷들을 예술작품으로 간주한 최초의 오트-쿠티에르(명장 디자이너)로 역사에 기록된다. 그러나 푸아레는 코코 샤넬의 혁신적인 의상들이 파리에서 커다란 인기를 얻자 예술적으로나 사업적으로 점점 빛을 잃어갔다. 푸아레는 검은색 의상을 유행시킨 샤넬을 ‘불행의 발명자’라고 불렀다.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푸아레는 (그가 끔찍하게 싫어하던) 검은색 옷을 입고 가는 샤넬을 길거리에서 마주치자 비꼬듯이 말했다. “장례식에 가나 보죠? 누구 장례식인가요?” 샤넬의 대답이 걸작이다. “누구긴요. 당신 장례식이죠.”
Quackery 사기꾼
<코코 샤넬>에 캐스팅된 오드리 토투는 “샤넬은 거짓말쟁이”라고 말해 가십 잡지들의 표지를 장식한 적이 있다. “샤넬은 거짓말쟁이였다. 그녀가 성공 전에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아무도 제대로 알 수 없다. 샤넬은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길 극도로 싫어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는 게 부끄러워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을 테고….” 토투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실제로 코코 샤넬은 습관적으로 과거에 대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자서전과 평전에 나온 이야기들도 모두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긴 힘들다. 영화 <코코 샤넬>도 마찬가지다.
Revolutionary 혁명가
샤넬의 혁명적인 발명품은 리틀 블랙 드레스(LBD)와 트위드 재킷, 퀼팅 핸드백뿐만이 아니다. 샤넬은 승마복을 개조해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입을 수 있는 바지를 처음으로 선보였다(사진은 영화 <코코 샤넬>에서 승마복을 개조해 입은 샤넬의 모습). 샤넬은 여성복에 저지(Jersey: 가볍고 신축성이 있는 두꺼운 메리야스 직물)라는 소재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 시절 저지는 남자들 속옷 만드는 데 사용하는 천이었다. 샤넬은 모두가 값비싼 진짜 보석을 장신구로 사용하던 시절에 처음으로 인조 보석을 사용하기 시작한 디자이너였다. 돈 많은 귀족이 아니라도 자신을 꾸밀 권리는 샤넬이 선사한 선물이다.
Simplicity 간소함
1923년 코코 샤넬은 말했다. “간소함은 모든 진정한 우아함의 기본이다(Simplicity is the keynote of all true elegance). 나는 여자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장식과 레이스와 코르셋과 고쟁이와 패드 때문에 땀에 절어 있던 여자들의 몸을 진정한 자신들의 몸으로 되돌려주었다.”
Tautou 오드리 토투
나는 그 누구와도 같지 않아
소문에 따르면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칼 라거펠트는 토투가 샤넬을 연기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꼭 내가 착하게 굴어야 할 필요없으니 말하는 건데, 오드리 토투 말고 페넬로페 크루즈가 샤넬을 연기하는 게 훨씬 나았을 거다.” 칼 라거펠트의 말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다. 페넬로페 크루즈라니. 그녀 역시 훌륭한 배우다. 하지만 머리를 은발로 염색하고 이탈리아 디자이너 도나텔라 베르사체를 연기하는 게 더 어울릴 게 틀림없다. <코코 샤넬>의 감독 안느 퐁텐은 칼 라거펠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오드리 토투였다. 샤넬과 토투의 아름다움은 닮은 데가 있기 때문이다. 두 여성의 아름다움은 흔해빠진 아름다움이 아니다. 독창적인 아름다움이다.”
토투는 망설였다. 코코 샤넬의 일대기는 여러 번 영화화된 적이 있으나 한번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리 프랑스 피지에르가 샤넬을 연기하고 티모시 달튼과 룻거 하우어가 샤넬의 남자들로 분한 81년작 <샤넬>(Chanel Solitaire)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도록 하자. 올해 칸영화제 폐막작으로 공개된 얀 쿠넹 감독의 <코코 샤넬과 이고르 스트라빈스키>(Coco Chanel & Igor Stravinsky) 역시 현지 언론의 조롱을 받으며 망신살을 샀다. 샤넬은 영화화하기 쉬운 인물이 아니다. 그녀의 젊은 시절은 베일에 싸여 있고 성공적인 디자이너 시절은 너무나도 길다(샤넬이 사귄 남자만 다 등장시켜도 대하 미니시리즈 한편 나올 거다). 오드리 토투는 말했다. “오래전부터 샤넬을 연기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녀의 삶을 출생부터 죽음까지 자세하게 다루는 전형적인 대하소설 같은 전기에는 출연하기 싫었다. 샤넬은 87살까지 살았잖아! 그걸 다 다룬다면 샤넬의 삶을 제대로 조명할 수 없었을 거다.”
다행히도 토투는 샤넬의 젊은 날에 집중하려는 안느 퐁텐 감독의 의지가 마음에 들었다. 모두에게 잘 알려진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 아닌, 비밀에 둘러싸인 샤넬의 젊은 날을 연기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실존 인물을 흉내내는 서커스가 아니라 배우로서의 상상력이다. 그리고 토투는 (<아멜리에>에서도 입증했듯이) 상상력이 풍부한 배우다. 토투는 “신화적인 샤넬의 이미지를 관객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캐릭터에 대한 나만의 해석을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도저히 확신이 없는 샤넬을 마주하게 된다. 독특한 개성을 가졌지만 여전히 연약하다. 나 역시 처음엔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샤넬의 캐릭터를 억지로 만들어내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그러자 모든 게 선명해졌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완전히 그녀가 됐다.”
토투의 출세작이었던 <아멜리에>의 첫 시사가 열린 날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은 토투에게 말했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다른 여배우들에게 불쾌한 소리들을 듣게 될 거야. 네가 연기를 못한 건 아니지만 자기라면 다른 방식으로 했을 거라는 둥 뭐라는 둥. 신경 꺼버려.” <코코 샤넬>이 개봉하면 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매력적인 시대의 아이콘을 연기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던 수많은 여배우들이 토투의 연기에 불만을 늘어놓을 게 틀림없다. 토투는 개의치 않는다. “무섭지 않다. 책임감을 느낄 따름이다.” 샤넬을 연기할 배우라면 모름지기 이 정도 배포는 가져야 마땅하다. 무슨 의미냐면 소녀 아멜리에는 이제 과거 속의 인물이라는 거다.
Ugly tongue 독설
지난해 미국 패션지 <하퍼스 바자>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생각했다. 현재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칼 라거펠트에게 ‘자신을 코코 샤넬로 가정하라’고 요청한 뒤 인터뷰를 한 것이다. 칼 라거펠트는 “코코 샤넬. 당신은 1920년에 여성들을 해방시켰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페미니스트인가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함으로써 <하퍼스 바자>의 기막힌 아이디어에 화답했다. “저는 페미니스트였던 적이 없습니다. 페미니스트가 될 만큼 못생기지 않았거든요.” 어지간한 독설가였던 코코 샤넬도 기가 막혔을 거다.
Valediction 유언
코코 샤넬이 죽기 직전 남긴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결국 죽는구나.”
Vehemence 격렬한 열정
코코 샤넬은 “내 성공의 비결은 맹렬하게 일하는 데 있다”며 미친 듯이 일하는 워커홀릭이었다. 그녀는 1954년 다시 패션계에 복귀할 때 “왜 다시 일을 시작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심심하게 죽고 싶지는 않다.” 코코 샤넬의 일요일에 대한 혐오는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크리스마스와 신년 휴일도 싫어했다. 휴일에는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은, 외로웠기 때문일지도.
Woman 여성
코코 샤넬은 여성을 위한 옷만을 디자인했다. 샤넬 사후 거대 기업으로 변모한 샤넬도 여성복 라인만을 전개했다. 2008년 12월 샤넬은 처음으로 남성복 라인(사진)을 런웨이에서 공개했다. 아직 샤넬 남성복의 본격적인 상업적 시판 소식은 들리지 않지만 확실한 사실은 세 가지 있다. 첫째. 트위드 재킷은 분명히 있을 거다. 둘째. 검은색이 많을 거다. 셋째. 무시무시하게 비쌀 건 당연하다.
Xtra 조연들
<코코 샤넬>은 오드리 토투의 영화지만 훌륭한 조연들의 영화이기도 하다. 샤넬의 첫사랑인 아서 ‘보이’ 카펠은 <준벅>과 <쥬라기 공원3>의 알레산드로 니볼라가 연기하고 샤넬에게 상류사회의 맛을 보여주는 백만장자 에띠엔느 발장 역은 <그의 손 안에>와 <포디움>의 브누아 포엘 부르드가 맡았다. 샤넬의 친언니인 아드리엔느 샤넬은 <아버지는 나의 영웅>과 <랑페르>로 한국 관객에게도 익숙한 마리 질랭이 연기한다. 샤넬의 의상에 빠져드는 여배우를 연기하는 에마뉘엘 드보(사진 왼쪽)는 언제나처럼 많은 장면에서 주인공의 몫을 앗아간다. <킹스 앤 퀸>을 비롯한 아르노 데스플레생의 작품들과 자크 오디아르의 <내 심장이 뛰는 박동>으로 유명한 에마뉘엘 드보는 요즘 프랑스에서 가장 활동적인 중견배우 중 한명이다.
Yearbook 간략한 연보
1883년 8월19일 소뮈르에서 장돌뱅이 알버트 샤넬의 둘째딸로 출생.
1895년 모친 사망. 샤넬과 형제들은 가톨릭 계열 고아원에 맡겨짐. 12살이던 샤넬은 7년 동안 여기서 성장. 이후 카바레에서 만난 백만장자 에티엔느 발장의 집에서 살기 시작.
1910년 파리 캉봉가 21번지에 모자가게 ‘샤넬 모드’를 개업.
1913년 에티엔느 발장의 집을 떠나 그의 파리 아파트에서 살기 시작함. 도빌에 첫 번째 샤넬 부티크를 개업. 프랑스 여배우들에게 인기를 얻으면서 디자이너로서 명성을 쌓아나감.
1920년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가족을 집에 머무르게 함. 스트라빈스키와의 염문설이 나돔(얀 쿠넹의 <코코 샤넬과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사진)의 소재가 되었다).
1921년 전설적인 향수 샤넬 No.5 출시.
1926년 LBD(리틀 블랙 드레스)를 선보이며 패션계에 검은색 열풍을 일으킴.
1930년 할리우드의 거물 제작자 새뮤얼 골드윈과 계약을 맺어 할리우드 배우들의 영화의상을 디자인하기 시작.
1939년 2차대전의 발발로 “패션을 위한 시간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모든 부티크의 문을 닫음. 비시 정권하에서 나치 장교 한스 쿤터 본 딩클라게와 동거하며 스캔들을 일으킴(1995년 나치를 위한 스파이 혐의가 사실로 밝혀짐)
1945년 전범 혐의로 구속되지만 영국 왕가의 중재로 법정행을 피하게 됨. 스위스로 이주함.
1954년 파리로 귀환. 패션계로 컴백하지만 스파이 혐의로 인한 프랑스인들의 분노로 첫 번째 컬렉션이 실패로 돌아감. 그러나 영국과 미국 패션계의 환호를 받음.
1955년 C자가 서로 교차한 모양의 샤넬 라벨을 고안함.
1959년 샤넬 No.5 향수병이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됨.
1971년 1월10일 코코 샤넬 작고. 유작 컬렉션이 커다란 성공을 거둠.
Zeigeist 시대정신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서 찾은 문구. “샤넬은 언제나 ‘시대정신의 노른자위’(yolk of the zeitgeist)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