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백야행>을 보는 네 가지 시선 [2] 김용언
2009-12-03
글 : 김용언
특이한 멜로영화라고 생각하면…

소설 속 사회적 배경을 전부 삭제했다는 걸 감안해서 봐야

소설의 영화화는 대체로 욕을 먹게 되어 있다. 그 사실을 ‘디폴트’라 치고 넘어간다 하더라도, 영화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에 대한 혹평은 좀 놀라울 정도로 가혹해 보인다. 몇몇 리뷰를 읽어본 결과, 반대 의견은 대체로 두 가지로 수렴된다. 20여년에 걸친 시간을 오가며 일본사회의 변화상을 캐릭터와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방대한 원작의 힘을 살리지 못했다는 것, 주인공의 처연한 삶에서 치밀한 미스터리와 하드보일적 감각을 삭제한 채 ‘신파’ 멜로드라마로 바꿔버렸다는 것. 역설적으로 나는 영화 <백야행>의 그런 선택이 오히려 장점이라고 보는 쪽이다. 아마도 똑같은 사실을 두고 이렇게 상반된 의견이 나오는 건 결국 원작자 히가시노 게이고의 전체적인 작품 세계와 감수성에 대한 호불호 때문이 아닐까라는 추측을 해본다.

한국에서 인기를 누리는 수많은 일본 작가 중 히가시노 게이고에게는 단연 ‘남성팬’이 다수다. 여성 독자들은 자주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서 불편함과 짜증을 느낀다고 토로한다. 다른 게 아니다. ‘아저씨 감성’ 때문이다. 흔히 ‘일본적’이라고 통용되는 깔끔하고 건조한 감정 처리 방식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아저씨 감성이란 ‘첫사랑의 신화’에 가깝다. 그러니까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연약하고 아름다운 여인에 대해 남자는 무조건적으로 헌신한다. 그는 대가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육체를 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녀의 약점과 그녀의 실수와 그녀의 실패는 얼마든지 ‘여자’라는 이름으로 용서받을 수 있고, 노스탤지어와 판타지의 필터를 거친 그녀의 초상은 언제나 완벽하고 순진무구하다. <백야행…>과 더불어 히가시노의 또 다른 대표작 <용의자 X의 헌신>을 떠올려보라. 그 트릭의 기발한 착상에 대한 감탄과 별개로, 남자주인공의 ‘헌신’은 여성 독자에게는 몸 떨릴 정도로 두려운 집착이다.

물론 영화 <백야행…>에서 단점들을 지적하기란 쉽다. 미호와 요한이 각각 다른 상대와 벌이는 기나긴 섹스신, 자식을 잃은 한동수 형사의 트라우마 등은 사실상 불필요한 부연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영화 <백야행…>은 일본적인 것을 무조건 ‘직역’함으로써 더 어색한 풍경을 만들어내는 쪽보다 차라리 익숙한 한국적 신파(한동수 형사, 그리고 요한의 엄마)를 선택함으로써 익숙한 감성에 호소하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적어도 이 영화에는, 수많은 일본 소설 ‘한국’ 독자가 일상에서나 혹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일본드라마와 영화와 소설과 만화의 말투들을 옮겨적으며 스스로가 쿨하다고 착각하는 순간이 빚어내는 기이한 생경함이 없다.

아마도 가장 큰 호불호가 갈리는 순간은 팜므파탈 주인공(소설에선 유키호, 영화에선 미호)의 묘사일 것이다. 소설에선 유키호가 성장하면서 아름답고 천사 같은 얼굴 뒤로 깔끔하게 저지르는 악행을 자세하게 묘사하지만, 영화에선 그 악행의 다수가 삭제된 채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소녀의 슬픔으로 치환시킨다. 그럼으로써 유키호에겐 일종의 안타까운 분노가, 미호에겐 동정심이 유발된다. 이를테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유키호가 아무런 표정없이 “모르는 사람이에요”를 내뱉는 순간과 미호의 입술이 떨리고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내디딜 뻔하는 순간까지 잡아낸 다음 “모르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할 때의 영화 속 감정은 천양지차다. 그 선택을 통해 제목이 뜻하는 ‘하얀 어둠’의 감수성이 많이 희석되긴 했지만.

그러나 영화 <백야행>은 소설 속 사회적 배경을 전부 삭제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주인공은 ‘버블경제 자본주의의 괴물’이 아니라 철저하게 ‘가정 비극의 희생자’로 그려진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할 여지까지 없다면 이 영화는 그야말로 어느 카테고리에도 속하지 못한 실패한 번역물일 수밖에 없다. 영화 <백야행>은 철저한 멜로드라마의 길을 택했고, 그 선택에 따르는 필연적인 성격 변화는 옳았다고 본다. 적당하게 눌러진 판타지와 적당하게 과장된 감정을 통해 재가공된 멜로드라마로서 영화 <백야행>은 괜찮은 선택이다. 중요한 건, 소설 <백야행>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여타 다른 소설들과 달리 치밀한 미스터리 소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독자들의 열광 지점은 어디까지나 ‘특이한 주인공 커플의 닿을 수 없는 사랑’이라는 환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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