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백야행>을 보는 네 가지 시선 [1] 김봉석
2009-12-03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도대체 왜?’가 도대체 없다

설득력 없는 미스터리, 팬시 상품같은 이미지만 연출

좋아하는 일본 미스터리를 꼽을 때, 나는 언제나 <백야행>을 첫머리에 놓는다. 그 냉랭한 감성이 좋고, 그 치열한 시대감각이 좋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히가시노 게이고를 거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할리우드에 견준다면 토니 스콧 정도 될까. 하나의 소재나 제재를 놓고,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풀어내는 방법을 고안하고 직선으로 달려간다. <용의자 X의 헌신>의 주인공 이시가미처럼, 문제를 풀어내는 가장 효율적이고 완전한 방법만을 생각한다. 그것은 엔지니어라는 전직에서 연유하는 합리적인 사고방식일 수도 있고, 애초에 그 이상은 능력 바깥이기 때문에 과감하게 장점만을 취하는 것일 수도 있다. 빠르고 정확한 스토리와 구성에만 전력투구. 그 덕에 비난도 종종 받는다. 동세대의 여성작가 미야베 미유키에 비하면 인물의 깊이와 심리묘사가 턱없이 떨어진다는 비판이다. 동의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인물의 심리를 파고드는 힘이 약하다. 노인문제를 다루는, 인물의 골이 무척이나 깊은 <붉은 손가락>에서도 히가시노는 주어진 문제풀이에만 주력한다. <백야행>의 후속작이라 할 <환야>에서는 그녀의 내면을 다루려는 야심은 증발하고 되레 평면적인 캐릭터로 후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히가시노의 단점이 <백야행>에서는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한다. 사실 <백야행>의 주인공은 유키호와 료지가 아니라 시대, 시대의 흐름 그 자체다. <백야행>은 시대배경인 1973년부터 19년의 세월은, 고도성장기를 거쳐 거품경기까지 오로지 위로만 달려가던 시절의 일본이다. 누구나 정상이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거품에 빠져 한없이 즐거워했던 시절. <백야행>은 그 들뜬 시대의 풍경 속에서, ‘하얀 어둠’을 걸어가는 남녀의 모습을 묘사할 뿐이다. <불야성>의 작가 하세 세이슈는 “이 소설은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의 ‘내면’을 전혀 묘사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동기도 그리지 않는다.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시점을 통해서만 묘사된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의 시점을 통해 묘사되는 것은, 따라서 두 사람의 행동뿐”이라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백야행>은 각색을 갈망하는 원작이 된다. 풍경만이 존재하는 원작에, 마음을 그려넣고 싶은 욕망이 이는 것은 당연한 발로다. 무엇이 그들을 범죄로 끌어들이는 것일까? 그들은 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짐작은 가지만 아직 아무것도 ‘규정’되지 않은 그들에게 영혼을 부여하고 싶기 때문에 <백야행>을 선택한다. 일본 드라마 <백야행>은 그들에게 ‘사랑’을 부여한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서로를 지켜야 했지만, 상황이 그들을 점점 더 백야로 이끌어갔다는 것이다. 가장 대중적인 설정이긴 하지만 드라마 <백야행>은 결국 막장 신파로 흘러간다. 그런 선례 덕에 영화 <백야행>도 면죄부를 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드라마는 그들이 공범자가 되고, 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한다. 원작의 완벽한 팜므파탈 유키호와 달리, 드라마의 유키호는 사랑하는 남자를 두고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다가 몰락한 여인이다. 영화의 미호는, 둘 다다. 어느 순간에는 사랑이 인생의 모든 목표인 것처럼 행동하다가, 돌아서면 모든 것을 이용하는 차가운 악녀가 된다. 두개의 얼굴 사이에는 어떤 스위치도 없다. 그냥 편리할 때마다 캐릭터가 돌변하는 것이다. 대체 그녀는 무엇일까? 사랑하지만 욕망이 더 앞서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요한을 이용하려는 것일까? 그것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 하얀 어둠을 걸어왔다는 그녀의 진술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다.

영화 <백야행>은 러닝타임 때문에 14년 전과 현재만을 오가는 구성으로 이루어진다. 즉 원작의 ‘시대의 흐름’ 같은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택하고, 욕망의 화신인 여성과 그녀를 헌신적으로 지키는 남자만이 존재한다. 거기에서 빠진 것은, ‘도대체 왜?’다. 아무리 뚫어져라 스크린을 쳐다봐도 그들이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 행동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나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캐릭터와 과거를 만들어놓고 뭔가 멋있는 장면들을 대충 얼기설기 붙여놓는 것이 요즘 한국영화의 유행인 것일까? 이미지로 충분히 설명된다고 믿는 것일 수도 있지만, 논리나 통찰이 없는 이미지는 그냥 팬시 상품에 불과하다. 원작의 여운을 바란 것은 전혀 아니지만, 영화 <백야행>은 미스터리로서는 아무런 설득력이 없고 인물들은 종이접기로 만들어낸 인형 같다. 장점을 굳이 찾는다면, 고수의 새로운 얼굴 정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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