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아바타> 포토와 시네마의 미래를 묻다
2009-12-29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디지털 미학으로서의 <아바타>

아바타. ‘자아의 형태’를 뜻하는 이 산스크리트어 낱말은 수육(受肉), 말하자면 신이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내려오는 힌두교의 용어다. 크리슈나는 비슈나 신의 여덟 번째 아바타, 예수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야훼의 아바타라 할 수도 있다. 이 신학적 용어에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부여한 것은 닐 스티븐슨의 1992년작 사이버펑크 소설 <스노우 크래쉬>(대교북스캔 펴냄)다. 오늘날 이 용어는 컴퓨터게임이나 세컨드라이프와 같은 사이버공간에서 사용자를 대리하는 가상의 신체를 가리킨다.

인간과 나비를 혼합한 하이브리드 생명체

하지만 영화 <아바타> 속의 아바타는 그저 가상공간을 부유하는 유령이 아니다. 그것은 육체를 가지고 현실공간에서 활동한다. 판도라 행성의 물리적 세계 속에서 제이크 설리를 대리하는 생명체는 이른바 ‘현실세계 아바타’(real world avatar)다. 가령 3차원 홀로그램으로 다른 장소에 나타나는 <스타워즈>의 공주를 생각해보라. 물론 홀로그램은 실체가 없어 현실세계 속에 존재하는 다른 사물들과 물리적 인터랙션을 하지 못한다. 그게 아쉽다면 아예 로봇을 사용할 수도 있다.

유독가스로 가득 찬 방, 폭발물이 설치된 장소, 혹은 인간이 들어갈 수 없는 심해에서 인간을 대리하는 로봇들. 이른바 ‘원격현전’(tele-presence) 기술의 대리자들 역시 ‘물리적 행동의 능력을 갖춘’ 현실세계 아바타라 할 수 있다. 영화 속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가령 영화에 등장하는 판도라 행성은 대기의 화학적 구성이 지구와 전혀 다르다. 하지만 아바타를 입은 제이크는 산소마스크 없이도 인간에게 유독가스나 다름없는 그곳의 공기를 마시며 자유로이 뛰어다닌다.

영화 속의 아바타는 무기체가 아니라 유기체, 즉 ‘인간’이라는 종(種)과 ‘나비’라는 종(種)의 DNA를 혼합한 하이브리드 생명체다. 이것이 이른바 포스트생물학(post-biological) 시대의 아바타라 할 수 있다. <매트릭스>의 주인공들은 수면과 각성을 통해 현실과 가상의 사이를 오가나, <아바타>의 제이크는 수면과 각성을 통해 현실과 현실 사이를 오간다. 그것을 통해 같은 현실공간에 존재하는 인간과 나비 종족 사이에 믿을 만한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구축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하이퍼코텍스의 후기생물학적 버전 ‘에이와’

판도라 행성의 중력은 지구보다 조금 더 가벼운 것으로 상정된다. 거기에 서식하는 플로라(식물계)와 파우나(동물계)의 판타지는 시각적으로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 모두가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 하나, 아마도 인공생명(AL)을 이용한 가상 생명체(virtual creature) 실험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카메론이 이 작품의 구상을 시작했던 90년대 중반, 칼 심스는 컴퓨터에 진화 알고리즘을 적용해 외계의 행성에 자라는 가상의 동식물들을 시뮬레이션해낸 바 있다.

판도라의 씨앗들은 해파리처럼 촉수를 움직여 허공을 헤엄쳐다닌다. 이 역시 전례가 없는 게 아니다. 가령 프랑스의 미디어 아티스트 루이 벡은 디지털 사진조작으로 가상의 해저생물들을 만들어냈다. 판도라의 풀들은 설치예술처럼 발로 밟으면 형광색을 낸다. 이 또한 기술적으로 가능해졌다. 가령 에두아르도 카츠라는 토끼의 수정란에 열대해파리의 유전자를 집어넣어 ‘녹색 형광 토끼(‘GFP 버니’)를 만들었다. 그전에 그는 꽃에 자신의 DNA를 집어넣어 인간-식물의 하이브리드를 만들기도 했다.

판도라의 생명체는 그저 분리된 개별자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의 집합적 생명체 ‘에이와’는 우리에게 ‘가이아 가설’을 연상시킨다. 개별적 인간들의 두뇌를 연결하는 인터넷은 지구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뇌로 바꾸어놓았다. 가이아 가설의 IT 버전인 셈이다. 에이와는 이 하이퍼코텍스(hyper-cotex)의 후기생물학적 버전이다. 판도라의 모든 동식물이 서로 교감하는 것은 그저 미신이나 마술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그들은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메커니즘에 따라 전기화학적으로 교신한다.

<아바타>의 내러티브에는 슬쩍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복사가 중첩된다. 무자비한 인종차별과 무차별한 자연정복. 여기에 대한 알량한 반성으로 감독은 시각적 과잉으로 가득 찬 블록버스터에 매혹되는 (어떤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자신을 수준 높다고 생각하는) 관객의 미학적 죄책감을 조금 덜어준다. 그 반성은 서구의 과학주의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판도라의 모든 생명이 서로 교감한다는 박사의 말을 비웃으나, 실은 원주민의 미신이야말로 더 고차원적인 과학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미신과 과학은 새로운 종합에 도달한다.

피사체가 없는 사진도 사진일까

감독은 이 작품의 실현을 위해 무려 15년이나 기다렸다고 한다. 그가 기다린 것은 아마도 자신의 판타지에 포토리얼한(寫實的) 외양을 줄 정도로 발달한 CG 기술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때는 무르익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언캐니 밸리’다. 아날로그 현실은 연속적이나, 디지털 가상은 불연속적이다. 실물의 ‘고밀도’와 샘플링의 ‘저밀도’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실물의 배우는 존재론적으로 충만하나, 그의 모션을 캡처하는 센서는 듬성듬성 설치된다. 디지털 이미지의 섬뜩함은 이 간극에서 나온다.

하지만 <아바타>에서 배우는 온몸을 감싸는 슈트를 입고 연기를 한다. 이로써 그것은 ‘모션 캡처’를 넘어 ‘퍼포먼스 캡처’가 된다. 헬멧에는 배우의 표정을 촬영하는 카메라가 장착돼 있어 컴퓨터에 글자 그대로 충만한 정보를 보내준다. 이로써 ‘이모션 캡처’가 가능해진다. 과거의 디지털 배우가 텅 빈 공간에서 연기를 했다면 <아바타>의 배우는 실시간으로 저해상의 이미지를 제공하는 가상현실 장치 안에서 연기를 한다. 연기의 상황이 게임의 상황이 된 것이다. 이로써 배우와 배경의 분리도 극복된다.

<아바타>의 3D 묘사는 몰입기술의 정점을 보여준다. 영화의 이미지가 아직 ‘존재하는 것의 복제 이미지’였을 때, 어떤 감독들은 피사체를 강조하기 위해 ‘딥 포커스’를 사용하곤 했다. 이는 물론 2차원 평면 위에서 원근법적 깊이를 강조하는 기법이다. 하지만 영화가 ‘존재하지 않는 것의 생성 이미지’가 되자, 공간의 깊이를 만들어내는 과제가 3D 기술로 넘어간 것일까? 관객의 멀미를 일으키며 한때 영화의 변방으로 조용히 물러났던 스테레오스코프의 3D영화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기술적으로 거의 완벽에 도달한 몰입의 장치. <아바타>의 놀라운 포토리얼리즘은 보수적(?) 세대에게 포토와 시네마의 미래에 관해 심란한 물음을 제기한다. 피사체가 없는 사진도 여전히 사진일까? 현실의 실사가 사라진 영화도 아직 영화일까? 하긴 영화는 애초부터 뤼미에르 형제(실사)와 멜리에스(만화)라는 두개의 근원을 갖고 있지 않았던가. <아바타>에서 실사는 25%에 불과하단다. 레프 마노비치의 말대로 “디지털영화란 가끔 실사도 재료로 사용하는 애니메이션의 일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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