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어떻게 알아보셨어요?” 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예정된 시간보다 몇 십분 일찍 만났고, 주변엔 사람들이 많은 터였다. 인터뷰를 앞두고 <밤과낮>을 머릿속에서 복기해보긴 했지만, 성남(김영호)의 꿈속에 난데없이 침입한 여자의 얼굴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베를린영화제 때의 사진 한장을 발견했는데, 멀리서 똑딱이로 찍은 것이라 별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카페 느와르>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니 신기할 수밖에.
대단한 우연이라고 말하긴 좀 뭣하다. 미술학교 보자르에 입학하기 위해 파리에서 어학원을 다니던 정지혜가 홍상수 감독을 만난 인연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선배가 <밤과낮> 스탭으로 결합하면서 주어진 오디션 기회. “그냥 재밌을 것 같아” 응했고, 친한 친구가 자신의 남자친구와 사귄다는 사실을 알고 난 여자의 반응을 “무덤덤하게 연기해서” 합격했다. “대본이 아침에 나오잖아요. 불안한 상황에서 대본을 외우고, 슛 전에 떨면서도 그게 흥미롭던데요.” 사실 <밤과낮>의 꿈장면에까지 출연할 줄은 몰랐다. 홍상수 감독은 나중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고, 얼마 뒤 정지혜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도자기 깨트린 뒤 소리 지르는 장면이 있었는데 김영호 선배랑 운동장에 가서 따로 연습을 시켜주셨어요. 그래도 잘 못하니까 나중엔 그러셨어요. ‘영화 찍으면서는 악을 쓰고 물건을 깨부숴도 누가 신고하거나 잡아가지 않는다’고. (웃음)”
우연은 계속됐다. 한국에서 사진을 전공하다 “지루해서 설치미술이나 영상을 공부하고” 싶었던 정지혜는 <밤과낮> 이후 프랑스 유학생활을 정리했다. “배우로서 재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해야 할 것 같아서….” 정지혜는 “정말 재밌는” 것을 찾고 있는 중이었고, 우연은 기회였다. 그리고 우연한 만남을 기쁘게 받아들인 이는 홍상수 감독만이 아니었다. “<카페 느와르>는 좀더 맛스럽게 대사를 쳤으면 좋았을 텐데….” 배우가 되겠다고 맘먹으니 아쉬움도 늘었다. “홍상수 감독의 <사친>(가제)에 출연했는데, 우는 장면이 있어요. 최선을 다해서 울면 울 수 있다고 하셨죠. 긴장을 좀 풀려고 소주 1병을 마시고 찍었죠. 근데 뒤의 테이크는 너무 취한 티가 나서 못 쓰셨대요. 최선을 다해서 울긴 했는데, 기억이 안 나요. (웃음)” <사친>에서도 이선균의 공상장면에 나온다는 정지혜, 그녀가 지금까지 맡은 역할들은 대개 비현실적인 캐릭터다. “또래 눈엔 이상하게 보이는 점을 윗분들은 귀엽게 봐주시는지도 모르죠. 그런데요. 관상 좀 보시나요. 저 새해엔 일 좀 할까요?”
추천사 ★ 정성일 <카페 느와르> 감독, 영화평론가
처음 봤을 때 수수께끼 같은 느낌이었다. 수수께끼 같은 낯선 존재가 <밤과낮>의 꿈 시퀀스 전체를 미로처럼 만들었다. 홍상수 감독의 사람을 캐치하는 능력이 놀라웠고, 언젠가 나도 영화를 만들면 꼭 초대해야겠구나 맘먹었다. <카페 느와르>에서는 영수(신하균)에게 카페에서 말을 걸어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하는 인물로 나온다. 원래 초고에는 없었다. 그러다 나중에 정지혜씨를 염두에 두며 새로 만들었다. 안 하겠다고 했으면 그 장면을 버렸을 것이다. 희귀한 존재이고, 희귀한 배우이고, 그래서 계속 응원하고, 또 초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