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는 조감독에게 잘 보여야 한다!
2001년 6월19일에서 그로부터 일주일. (온 나라를 황폐하게 만든 가뭄이 이어지던) 날씨 내내 맑음.
이날 집에서 왕가위의 <화양연화>를 보면서 장면을 그려보고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씨네21>의 허문영 기자가 무언가 망설이면서 말을 꺼냈다.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에 가서 일종의 현장일기를 써볼 생각은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냥 하루이틀 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함께 먹고 자면서 “임 감독 영화의 현장에서 그 창작자로서의 고뇌와 솜씨를 담아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촬영이 시작되면 현장에 가기 위한 온갖 핑곗거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건 고마운 제안이었다.
드디어 명분이 생겼다! 그로부터 닷새 뒤에 허문영 기자와 함께 <취화선>을 제작하는 태흥영화사를 찾아갔다. 그동안 임권택 감독의 새 영화는 화가 장승업을 다룬다고만 알려져 있었으며, 제목이 결정된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다(그리고 이미 지난 봄부터 촬영이 시작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층에는 이미 촬영계획표와 연기자들의 얼굴이 배역별로 도표처럼 붙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 방에서는 영화에 사용될 장승업의 그림을 옮겨 그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장승업의 그림들의 사본이 펼쳐져 있었다. <취화선>을 위해서 장승업 그림에 대한 고증으로 일랑 이종상 선생(서울대 박물관장)을 위로 하여 그 제자들이 즐비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그림 그리는 장승업의 대역으로는 김선두 선생(중앙대 한국화과 교수)이 카메라 앞에서 붓을 잡을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이 영화를 만든다는 것을 신문을 보고 알았어요. 참 멋진 작업이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중간에 중매가 있었습니다. (웃음) 이종상 관장님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참 묘한 게 기사를 읽으면서 속으로 내가 이런 배역을 해보면 참 재미있겠다, 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진짜 제의가 들어오니까 무척 당황스럽더라고요.”(김선두 선생과의 인터뷰)
임권택 감독은 언제나처럼 조용하고 겸손한 태도로 나와 허문영 기자를 맞았다(사실 난 감독님의 겸손함이 항상 부담스럽다. 올해로 처음 인사드린 지 이미 16년째이고 게다가 내 결혼식 주례이기도 하셨는데, 감독님은 아직도 내게 존댓말을 쓰신다). 이야기를 드리자 감독님은 “그렇다면 세트장에 들어간 다음에 오면 좋을 거요. 이 영화는 그 오픈 세트장에서 승부가 날 거 같은데. 그리고 아무래도 나도 처음에는 감을 잡아야 하니까 시행착오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웃음)”라고 대답하셨다. 이건 예상치 않은 선물이다! 벽에는 조선말 종로거리를 재현한 오픈 세트장의 구조와 배치가 70mm 사이즈로 마치 대동여지도처럼 붙어 있었다. 각도마다 구체적으로 가옥의 구조를 따로 발췌해서 그려놓았고, 가옥의 각도에서 보는 사방의 풍경이 다시 원근법에 맞추어 그려져 있었다. 세트는 영화적인 장소의 개념이다.
그러나 한국영화에서 오픈 세트는 사라져가는 전통이다. 점점 한국영화의 전통이 일상성과 리얼리즘에 매달리면서 영화들은 그 장소에 가서 만들어지는 중이다. 그러면서 영화들은 장소의 의미가 만드는 환경에 사로잡혀서 관계에 집중하는 동안 점점 공간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다. 에이젠슈테인은 장소에 가면 영화를 찍는 것이며, 세트에서는 영화를 만든다고 말했다. 파브리스 르볼 달론은 장소에서는 빛에 맞추어 카메라를 세워야 하고, 세트에서는 조명을 설치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빛은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고, 세트에서 조명은 사유한다고 거기에 덧붙인다. 감독님은 조감독을 불러서 시나리오를 건네주셨다. 거기에 이 시나리오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밑그림 같은 것이라고 덧붙이셨다. 그 시나리오를 들고 온 사람은 조감독 정경진씨였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임권택 감독의 연출부 문하생들을 알고 지내는 편인데(우선 감독으로 데뷔한 사람들의 이름만 열거하자면 곽지균, 최성식, 황규덕, 김영빈, 김의석, 김홍준, 임상수, 김대승) 여자조감독은 처음이다. 현장에서는 조감독에게 잘 보여야 한다!
취화선(醉畵仙), “술 마시며 그림 그리는 신선”
1883년 어느 초여름, 날씨 맑음. 그러니까 <취화선>은 장승업이 41살 되던 해 더운 여름날 오후에 시작한다. 또는 갑신정변이 벌어지기 일년 전에 이 영화의 첫 장면이 시작된다. 장승업은 종로 거리를 걷던 중 떡을 훔쳐 달아나는 한 거지 아이를 본다. 장승업은 이 거지아이를 보면서 회상에 잠긴다. 어린 시절 다리 밑 거지패였던 장승업은 매를 맞던 중 우연히 길거리를 지나가는 개화파였던 김병문에게 도움을 받고 그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초야에 묻혀 살던 은암 선생에게 그림 기초를 배우지만 은암 선생이 오래 살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하자 다시 장승업은 떠돌이 신세가 된다. 다시 만난 김병문은 그림에 재주를 보인 장승업을 어여삐 여겨 그를 당시 유명한 그림 소장가의 한 사람이자 역관이었던 이응헌에게 맡긴다. 장승업은 이응헌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그만 우연히 규수 소운을 보고 한눈에 빠진다.
그러나 소운은 시집을 가고 상심한 장승업은 그의 집을 떠나 주막에서 매일 술을 마시며 춘화를 베끼거나 중국 대가들의 그림을 방작하면서 돈을 벌며 세월을 보낸다. 그 주막에 이응헌이 찾아와 장승업을 당시 대가의 한 사람인 유숙 선생의 문하생으로 추천한다. 거기서 장승업은 일취월장하는 그림 솜씨를 보여준다. 그림에 대한 장승업의 욕심은 한이 없고, 그의 그림에 대한 화우들의 질투는 그의 그림을 깊이없는 재주로 그린 그림이라고 폄하한다. 장승업은 그들을 떠나 곳곳을 방랑하며 그림을 그린다. 때로 저잣거리 기생 진홍을 만나 살붙이고 살기도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는다. 우연히 만난 기생 매향이 그를 사로잡지만 그러나 인연이 닿지 않는다. 그렇게 방랑 끝에 돌아온 장승업은 우연히 유숙 선생을 비롯한 화가들을 초대한 사또의 잔치에 초대받는다. 그러나 사또의 청에 스승보다 먼저 붓을 든 장승업은 결국 다시 그곳을 떠나야 한다. 이제 다시 방랑길에 올랐지만 궁중에까지 퍼진 그의 소문은 임금님이 그를 데리고 오라는 명을 내리는 자리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어느 한 군데 붙들려 살아본 적 없는 장승업은 사흘 만에 도망치고 만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아간다. 세상은 급히 바뀌고 있었고, 그의 곁을 동학혁명이 스치고 지나가고 한편에서는 일본 군대와 청나라 군대가 이 땅을 밟고, 양인들이 거리에서 서양 옷을 입고 활보한다. 장승업은 이 세상의 변화를 보아야만 했다. 그는 1897년 55살의 나이로 홀연히 사라진다(시나리오는 그렇게 끝난다. 장승업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에도 그는 실종으로 되어 있다. 죽었다는 추측도 있고, 실종도 있다. 일본 기자의 말을 빌리면 “장승업은 그가 생전 그리지 않은 금강산에 들어가서 술 마시며 그림 그리는 신선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醉畵仙.). 장면은 모두 170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장면 곁에는 장승업의 나이와 계절이 표기되어 있었다. 장승업에는 최민식씨가 결정되었으며, 때로는 그를 이끌고 때로는 그와 그림에 대한 서로의 견해를 주고받는 김병문 역에는(이 인물은 영화를 위해서 만들어낸 허구적 인물이다) 안성기 선배, 평생을 서로 번번이 스쳐지나가면서 장승업에게 그림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기생 매향에 유호정, 그리고 유일하게 살붙이고 산 기생 진홍에 김여진(<처녀들의 저녁식사>의 임신하는 처녀, <박하사탕>에서 결혼했다가 바람 피운 뒤 따로 사는 아내), 소운 역에는 손예진이 캐스팅되었다는 사실을 안 건 시나리오를 받아본 다음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