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 인터뷰2-2001년 10월13일 안개.
새벽 안개가 쏟아지는 날 아침 일찍. <취화선>에는 이 영화의 과정을 일일이 캠코더에 담아서 영화와 함께 완성될 <메이킹 오브 ‘醉畵仙’>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내 생각에 메이킹영화의 최고걸작은 크리스 마르케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난>의 작업과정 일체를 담은 <A.K.>이다). 이 작업은 조선종 PD가 담고 있었다. 그는 매우 섬세한 사람인데 내가 하는 인터뷰도 메이킹 작업에 포함시켜 볼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하였다. 아마 여기서 진행된 감독님과의 인터뷰의 일부는 다시 메이킹 필름에서 직접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어느 정도 진행되었습니까.
=40% 정도 나간 거 아닐까 싶은데. 느낌은 늘 그런 것처럼 시작할 때는 좀 막막하고 무엇을 하려니 막연한 것이 있어요. 그러나 지금쯤 윤곽이 드러나고, 이제는 모두들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시간인 것 같아요.
-<춘향뎐>이 영화에서 소리를 보이게 만들려는 시도였다면, 이번 <취화선>은 멈춰 있는 그림을 움직이게 만들려는 점에서 두편 모두 불가능의 프로젝트라는 느낌입니다. 마치 대가의 실험영화를 접하는 느낌입니다.
=실험영화라고까지 말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림이란 정(靜)이 아니겠습니까? 그림을 보여준다는 목적 아래 영화가 찍혀서는 백번 실패한다고 생각합니다. 靜의 그림을 찍되 왜 그 그림이 보여져야 하는가, 라는 당위성을 강하게 부각시킴으로써 靜의 그림을 살아나게 해볼 수 없는가에 모든 신경을 모으고 있습니다.
-장승업의 그림 중에서 좋아하는 작품이 있습니까.
=노경에 들어와서 그림이 담담해지고, 기교에 치우치지 않고, 어찌 보면 편안한 것 같기도 하고, 간단한 몇필로 풍경이 갖는 그림 안에 많은 것이 담겨져 있는 것들이 초기 그림들보다 더 이끌리는군요.
-영화는 무엇보다도 아주 구체적으로 1895년 유럽에서 발명된 기계장치잖습니까? 그리고 그 기계장치는 서구의 회화적 전통 안에서 3 대 4의 비율로 황금분할비례에 맞게 만들어진 활동사진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의 한국화 전통 안에 들여오는 것은 소리를 끌어들이는 것과는 다른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영화는 가로잖습니까? 동양화 화폭을 담기에는 화면이 아주 불편하지요. 어차피 작품의 전모를 한컷 안에 담을 수 없는 조건 안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세부를 일일이 컷으로 나누어서 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작품이 갖고 있는 맛을 담아야 합니다. 그걸 서양화처럼 가로로 그려서는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렇다고 부분부분을 나누자니 여기에도 한계가 있는 겁니다. 동양화야말로 멀리서 이렇게 보면 그 느낌이 그렇게도 좋다가 그 어떤 부분을 딱 들어가서 보면 덧칠이 없는 한획이 지나가는 그런 세계이기 때문에 부분이 조악해 보이기도 하고, 그리다 만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여러 번에 걸쳐서 그런 그림들을 소개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지엽적인 것을 어떻게 대담하게 전체 그림의 조화 속에서 찾아가는가를 놓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중간에 놓여 있는 거지요. (웃음)
-시나리오는 전체적으로 드라마를 피하고 에피소드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부분적으로 고칠 수 있게 느슨하다는 인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동시에 이 영화의 하나의 미학인 것 같기도 합니다.
=결정적인 것은 장승업이라는 화가가 살다간 일화가 몇개 없다는 게 문제요. 여자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천재였고, 이런 몇 가지뿐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어찌 됐건 살아 있는 인물로 거듭나서 영화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고민이 생긴 거지요. 그런데 거기다가 무언가 드라마틱한 생을 넣으면, 어차피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것도 허구인데, 그렇게 되면 이건 꾸며진 이야기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래서 나는 화가로 살면 도리없이 마주칠 수밖에 없는 일상의 이야기에서 장승업을 찾았어요. 굵은 드라마가 있으면, 거기에 편승해서 감독도 편하지요. (웃음) 그러나 반대로 잔잔한 일상을 찍는다면 무슨 힘으로 이 영화를 끌고 갈 것인가 생각하니 큰일난 거요. (웃음) 그런 일상을 힘있게 다루어볼 수는 없는가, 나 자신도 조금은 장승업처럼 그런 것을 이루기 위해 거듭 몸부림치는 인간으로서 그런 것이 된다면 조금은 변신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일상에 힘있게 관객이 빨려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내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힘있는 영화로 만들고자 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해보는 것입니다. (웃음)
-장승업에 대해서는 서로 상반된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근대 한국의 입구에서 마지막 조선화의 대가였다는 관점과 다른 하나는 조선 말기 최초의 근대화를 그린 화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 드리겠습니다. 장승업은 조선 말기의 근대인이었습니까, 아니면 근대 한국의 마지막 조선인이었습니까.
=나는 우선 현대까지도 영향을 끼친 화가가 장승업 선생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제자들에 의해서, 아직도 그의 그림은 명맥을 지켜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승업은 한 작가로서 어떤 사명을 갖고, 무엇이 한 예술가로서 그 사람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만들었는가? 이 사람은 조선시대에 나타난 프로라는 겁니다. 한 환쟁이로서 세상을 개혁하려든지, 아니면 후대에 어떤 영향을 끼치려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그런 영화를 찍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천년 전에도 엄청난 수준으로 이루어낸 중국화를 어떻게 해서든지 뛰어넘어 보고자 한 데에 최고의 관심을 둔 화가입니다. 그는 한 환쟁이로서, 한명의 프로작가로서, 중국화 같아보이는 그림 안에서도, 그 안의 기량을 보고 있으면, 많은 것을 뛰어넘고 그 안에 있으면서도 달라진 화가입니다. 어쩌면 그걸 보고 겨우 그거야,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화를 보고 있으면 그 엄청난 테크닉도 그렇고, 그것을 흉내내서 같은 수준으로 간다는 것조차 힘에 겨운 엄청난 산입니다. 그것을 뛰어넘으려 했고, 사실상 그것을 이루어낸 사람. 나는 한국인이라는 토양,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다루어 보고 싶습니다.
-감독님이 그려온 세계는 화가들로 따진다면 풍속화요, 또한 풍경화의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장승업은 풍속화를 그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감독님 영화에서 유난히 인물이 살아 있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장승업은 반대로 초상화를 그리지 않은 화가입니다. 장승업의 작품은 특히 화조영모화나 기명절지화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데, 이 영화에서 화조나 기명절지가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될까요.
=특별하다기보다 그런 것들이 장승업 주변에 스며들 것입니다. 그래서 그쪽이 자기가 능숙하게 잘해낼 수 있는 것들이 되겠지요. 산수화 부분은 따로 특별하게 관심을 갖고 있어요. 아마도 이 영화에는 장승업이 그쪽을 향해서 거듭나기 위해 애쓰는 대목이 있게 될 겁니다.
-감독님의 영화 풍경은 <만다라> 이후 한국영화에서 하나의 획을 그은 것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의 풍경에 대해서 새로운 발견을 해낸 셈인데, 말하자면 영화로 근대화 이후 한국의 부서져가는 풍경 속에서 진경산수라 불릴 만한 광경을 잡아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겸재 정선의 그림이 오히려 감독님 영화에 어울릴 만한 인물이었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사실 장승업은 중국 산수화의 방작을 통해 오히려 선계의 풍경이라고 할 만한 세상을 그려내고 있지 않습니까. <취화선>에는 풍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시작이 열리는 겁니까.
=여기서 나의 관심은 우리의 실경을 청년 시절과 중년과 노경 때 그 풍경이 어디로 옮겨가는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실경 속에서 장승업은 어떻게 자기화시켜서 그려내는 화가인가 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진경산수도 하나의 관념입니다. 이런 산을 보았는데, 이런 느낌이 옮겨와서 그런 실경이 이렇게 변해서 들어온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경이 옮겨와서 자기 안에서 작가로서 관념화시킨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우리 작품을 위해 장승업 그림을 방작하는 김선두 선생이 그려내는 그림들을 뒤에서 지켜보다가 장승업의 산수화가 단지 중국화의 모작이 아니라 그 안에서 우리의 실경이 갖는 좋은 점을 극대화시키려는 노력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승업은 기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왕의 청탁도 거절하고, 내키는 대로 살다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항상 후대의 사람들이 지어낸 부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감독님이 장승업의 자료를 읽으면서 가장 납득하기 힘든 대목은 어느 부분이었습니까.
=장승업이 궁궐에 불려갔던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대령화원 같은 족자도 남겨져 있고 그런 것을 보면. 하지만 내가 제일 받아들일 수 없는 대목은 장승업이 갑자기 천재가 되어서 술 마시고 만취가 되어야 그림을 그렸다는 대목이오. 그건 기량이 아무리 체화해 있어도 있기 어려운 일이지요. (웃음) 아마 그 부분에서 서로 전해져오는 이야기와 우리가 서로 접점을 찾아야 할 거요.
-장승업의 그림은 그의 선대 화가들이 흑백수묵으로 그린 것과 달리 청색안료점법의 화필도 구사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청색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될까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김선두 선생이랑 그 부분은 이야기중이에요. 아마 장승업에 대한 생각도 더 담아가야 할 것이고. 사실 처음에 김선두 선생도 장승업 그림에 별로 호감을 지니지 못했던 것 같아요. (웃음) 그러나 그이도 장승업 그림을 모사해보면서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나는 지금 영화가 더 열리기를 기다리는 중이오.
-(나는 이쯤에 이르자 정말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던 질문을 던졌다. 처음에는 분명치 않았지만, 현장에서 작업하는 과정에서 나는 자꾸만 내 의문에 이상한 확신 같은 것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질문이 무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그러니까 장승업을 우회한 감독님의 자서전은 아닙니까.
=(잠시 생각하다가) 자서전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웃음) 이번에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는 모르겠군요. 장승업 선생이 부모를 떠나서 여러 군데를 전전하며, 화가라는 세계에 들어와서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영화라는 세계로 들어와서 작품을 해나가는 나 같은 인생과 조금씩 맞물리는 부분도 있겠지요. 아마 그런 부분 때문에 영화로 해보자는 용기를 갖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군요.
내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조감독은 번번이 찾아왔다가 물끄러미 지켜보기를 몇 차례 하더니 참 눈치도 없다고 눈총을 주면서 감독님 곁에 서서 오늘 촬영분에 관해 질문을 했다. 사실 너무 오랫동안 감독님을 잡고 있었던 셈이다. 벌써 세트장 위로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기 시작했다. 감독님은 짧게 “이따가 시간 나면 다시 합시다”라고 말하고는 예의 뒷짐을 지고 조감독의 설명을 들으면서 스탭들 안으로 걸어들어가셨다. 나는 그 뒷모습에서 이제까지 들려주었던 장승업의 이야기가 감독님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끊임없이 거듭나고자 하는 그 치열한 정신, 그 안에서 자기의 것을 만들어내고자 하면서 프로의 감독으로서 그 수많은 세월을 살아남은 이 사람의 삶은 이상하게 나의 심금을 울린다. 언젠가 감독님이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나는 영화광으로 살아온 기억이 없는 사람이오. 영화를 한다는 건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오. 그 안에서 영화를 새롭게 만들어낸다면, 그건 내가 내 삶을 새롭게 만들어냈다는 뜻인 게요.”
14개 숏으로 나눈 까닭 2001년 10월14일. 날씨 맑음.
이날은 김여진씨의 마지막 촬영이 있는 날이다. 장면은 이제 평산과 바람피우다 들통난 기생 진홍의 집을 떠나기 전에 진홍의 청으로 열폭 매화병풍을 그리는 대목이다.
장면 # 94 A 진홍의 셋집
술에 취한 승업이 술병을 들고 마루에 올라온다
승업 “야, 이년아 나와, 이년아(진홍에게 술잔을 주며) 야, 마셔, 누구였어?”
진홍 “평산이…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사람 기다릴 것 없이 옛날로 돌아가제. 니미럴, 팽팽한 젊은 년이 언제까지 독수공방하라고… 지놈은 돌아다니면서 별별 년들하고 놀아나면서….”
승업 (따귀 때리며) “그래 이년아, 하필이면 평산이냐…. 끝났어 이년아.”
진홍 “그래 고양이도 낯짝이 있다고 내가 너 살라고 애걸복걸할 줄 알았어?” (나가는 승업을 붙잡으며) “이대론 못 가.”
승업 “다 끝난 마당에 뭐 어쩌라고.”
진홍 “그림 한장 그리고 가.”
승업 “그래 못 그려줄 것도 없지.”
진홍 “뭐 그려주려고?”
승업 “니년한텐 화조면 감지덕지지.”
진홍 “화조? 웃기네. 기왕에 갈라서는 마당에 나도 돈 되는 그림 하나 가져야겠어.”
승업 “돈 되는 그림이 뭔데?”
진홍 “열두폭 매화병풍.”
(시간경과)
승업, 마당에서 매화병풍을 그린다. 동네사람들 구경한다. 진홍, 그림 그리는 승업에게 꽃도 따서 던져보고, 빌어도 본다. 그러나 승업 그림에 열중한다. 그림을 다 그린 승업, 짐을 들고 떠난다. 혼자 남은 진홍, 눈물을 닦는다.
시나리오는 평이하지만 이 장면은 다소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우선 드러난 어려움은 장승업을 두 사람이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최민식-장승업과 김선두-장승업이 혼연일체가 되어 한 사람처럼 매화병풍을 그려야 하는 것이다(그러나 최민식씨가 단순히 흉내만 내는 수준은 아니다. 실제로 붓을 잡고 이러저리 붓놀림을 하는 것을 보면 그가 그림에 전혀 문외한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선두 선생도 최민식씨가 아마추어이긴 하지만 붓을 잡는 놀림새는 아주 정확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진짜 어려움은 다른 데 있었다.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정말 중요한 장면인 거요. 이 시나리오를 읽어본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무리 기생이라지만 바람피운 여자한테 그림을 그려주고 갈 수 있느냐는 거요. 그런데 그게 장승업인 거요. 게다가 영화에서 기생 진홍의 집을 떠나면서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길을 떠나는 거지요. 그러니까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게 중요하죠.”(임권택 감독과의 인터뷰) 여기서 장승업이 그려주는 그림은 <홍백매십곡병>(<紅白梅十曲屛> 종이/담채(淡彩), 90.0cmx433.5cm)이다(만일 이 그림의 원화 도판을 보고 싶으신 분은 호암미술관에서 발간한 <사군자>(2001)의 8∼9쪽에 걸쳐 있는 그림을 찾아보면 된다. 이 페이지에는 장승업의 스승인 유숙 선생이 그린 사군자도 함께 실려 있다).
이 그림은 이 영화의 카메라를 잡은 정일성 촬영감독이 장승업 그림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나는 이 그림을 이번 장승업 회고전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압도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나는 여기서 열폭 매화병풍을 보면서 마치 그림을 타고 올라가는 것 같았다. 놀라웠다. 그런데 그 옆에는 장승업을 가르쳤던 유숙 선생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 그림도 매화병풍이었습니다. 그 그림은 그렇게 여성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유숙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 그림 안에 다 담겨져 있었습니다. 암울했던 시대를 같이 살아가면서 한 사람은 낙천적이었습니다. 시대가 암울하건 말건 아름다우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또 한 사람, 장승업은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그 힘을, 그 원초적인 힘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거기에는 뿌리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그것을 찾아 힘을 갖고 찍을 생각입니다.”(정일성 촬영감독과의 인터뷰)
우선 진홍과 장승업의 대화장면을 찍고 난 다음 마당에 화선지가 펼쳐졌다. 매화병풍을 그리는 대목이다. 김선두 선생도 최민식씨와 똑같은 복장을 하고 옆에서 대기하였다. “사실 그림이란 내내 펼쳐놓고 보아야 하는데 영화는 불과 몇초 만에 보여주어야 하잖아요. 그림 그리는 사람 입장에서 불만이 있죠. 어떤 그림은 일년 내내 보아야 아는 그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그게 영화의 힘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걸 내내 보여주는 대신 앞뒤를 맞춰 그 그림을 딱 보는 순간 이해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 부분에서는 임 감독님을 믿는 편입니다.”(김선두 선생과의 인터뷰) 이 장면을 임권택 감독은 우선 열다섯 숏으로 나누었다. 그리고는 전체를 연출부의 설명을 들으면서 다시 복기하였다. 그런데 햇빛이 자꾸만 들쭉날쭉하였다(사실 양수리는 최악의 조건을 모두 갖춘 세트장이다. 산 속이어서 해는 늦게 떠서 일찍 저물고, 상수도 보호구역이라서 필름 현상을 할 수가 없고, 게다가 비행기 항로가 통과하는 지역이어서 수시로 지나가는 비행기 소리에 동시녹음을 하던 이충환 녹음기사는 “이거 누가 땅 팔아먹었는지 그때 도장찍은 인간들 몽땅 영화인 이름으로 청문횟감이야!”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에는 전적으로 동감이다. 그때 영화진흥공사 사장 도대체 누구야?). 또다른 문제는 화선지의 흰색이 조명에 심하게 반사되어서 버터플라이 조명으로 교체되었다. 이 장면은 술상을 놓는 진홍으로 시작한다. 어느 위치에서 그림을 쫓아가야 할지를 그려보면서 화선지 끝에서 반대편 끝까지(그 너비가 4m50cm이다) 다시 줄자로 거리를 재어본 다음 김선두 선생을 불렀다. 그리고는 붓 뒤끝으로 그림을 그려보라고 부탁했다. 김선두 선생은 처음부터 마지막 대목까지 그려나가는 순서를 화선지 위에서 반복하였고, 정일성 촬영감독은 그걸 카메라 뷰파인더로 일일이 따라가면서 확인하였다. 숏 2는 진홍이 마루에 앉자 장승업이 붓에 물감을 묻히는 투숏이다. 숏 3은 마스터숏을 찍었다. 이 신은 매우 흥미진진하게 보였다. 왜냐하면 상상선을 긋기 위해서는 그림과의 상대숏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병풍으로 배접하지 않은 화선지가 상대숏이 될 때 캔버스와는 달리 화선지는 땅바닥에 놓여 있기 때문에 진홍과의 상대숏은 각도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화선지의 반대방향으로 넘어갈 때 상상선의 상대숏과의 연결을 만드는 더블액션을 무엇으로 기준을 잡을지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숏 4의 최민식-장승업에서 숏 5의 김선두-장승업으로 넘어가는 순간 카메라의 위치를 뒤집었는데(나중에 이 영화에서 최민식씨가 연기하는 장승업과 김선두 선생이 그림 그리는 장승업을 찾는 숨은 그림 찾기도 재미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매화 그림은 위아래가 없는 일종의 추상화 구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카메라가 뒤집혀도 그림이 뒤집히지 않는 것이다. 영화의 기초. 상상선을 그을 때 자기가 나눈 대상의 성격을 따르라. 이 장면에서 임권택 감독은 숏의 논리가 실제의 논리와 어떻게 다른지를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그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김선두 선생에게 일단 그림이 시작되자 개의치 말고 계속 그림을 그리도록 하였다. 그림을 그리는 김선두 선생의 이마에서 땀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림 대신 김선두 선생을 지켜보던 임권택 감독은 정일성 촬영감독에게 무언의 사인을 보냈다. 이미 자리를 찾은 카메라는 소란없이 그림에 몰두한 김선두-장승업을 찍었다. 그리고 숏 7에서 마당을 들여다보는 아이들의 등을 걸어서 찍은 다음(충무로에서 ‘나메’라고 불리는 오버숄더숏) 더블액션으로 진홍의 거동을 잡았다. 진홍이 장승업의 품을 파고들지만 장승업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림을 그려나간다. 이 장면의 앞 장면이 점프컷으로 연결된 것에 이어서 연결되는 장면은 더블액션을 걸어서 연결하였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시간의 생략과 중첩이 한 신 안에서 숏을 서로 다른 논리로 연결하고 있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서는 신 내에서 숏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숏 중에 신의 기능을 하는 숏들과 브리지 역할을 하는 숏이 동시에 이어져서 관계를 만들어낸다. 거의 엔지를 내지 않는 김여진씨가 이 장면에서 계속 엔지를 냈다. 잠시 영화의 호흡이 지체되는 것 같았다.
다소 연기가 흐트러지자 정일성 촬영감독이 용기를 북돋워주듯이 한마디 던졌다. “영화는 원래 앞부가 힘든 거야.”(앞부는 클로즈업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현장에서 보면 정말 클로즈업이 힘들다. 엔지도 클로즈업에서 많이 난다. 이 숏은 참 재미있다. 아주 간단하게 보이지만 아주 미세한 디테일로서 연기의 위치가 안 맞으니까 시선과 동작이 동시에 들어맞지 않았다. 그걸 맞추는 건 김여진에게도 쉬워 보이지 않았다(오히려 김여진은 일분 이상 난리를 치고 마당에서 요란을 떠는 롱테이크는 단숨에 오케이를 냈다). 숏 9는 다시 아이들의 어깨를 걸어서 집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이 반복에는 시간경과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숏 10은 이제까지 없던 위치에 카메라를 세웠다. 진홍이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장승업에게 국화를 던지고 손으로 빌지만 장승업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좀더 여기서 분명해진 것은 카메라의 위치는 인물을 따라가면서 집 전체를 빙빙 돌고 있었다. 그러나 집 주변을 돌고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인물을 놓쳐버릴 위험이 항상 있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계속 두 인물에 대해서 마스터숏을 기능하는 위치에서 투숏을 찍어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이 신은 그 대신 장승업과 진홍의 시점숏을 찍지 않았다(의외로 이 영화에는 시점숏이 많지 않다. 그 점은 <춘향뎐>과 반대이다). 어깨를 걸어서라도 화면 안에 POV-인물을 프레임 안에 포함시켜 넣었다. 이것은 이 영화의 하나의 미학처럼 보였다. 회화를 다루는 영화로서 이 안에서 두개의 시선 이외에 또다른 인칭 시점이 그 안에 개입하는 것을 피하려는 것처럼 보였다(에드워드 브레니건은 시점숏이 항상 상대숏과 고정점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전체를 모두 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나의 추리이다. 그림 자체를 포함하는 인서트숏을 제외하고 마지막 장면은 열두 번째로 찍은 숏 14로 떠나간 장승업이 남겨놓은 매화병풍 그림 앞에서 눈물을 떨어뜨리는 진홍을 찍었다. 이 장면이 사실 가장 이상했다. 왜냐하면 불현듯 이 장면에서는 장승업이 머물던 방 안에 들어가 방문을 걸어서 화면 사이즈를 방문화프레임으로 찍었기 때문이다. 전체 신에서 갑자기 원칙을 벗어나버린 듯한 카메라의 위치였다. 내가 마지막 숏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러시 시사까지 기다려야 했다. 한 가지 사족. 이 장면에서 눈길을 끈 것은 임권택 감독은 단 한 숏도 비디오 모니터로 구도를 확인하지 않고 오직 연기의 동선과 표정만을 따라가면서 연출했다.
진홍 역 김여진 인터뷰 2001년 10월14일 오후
같은 날 오후. 나는 김여진씨에게 관심이 많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갖고 있는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쪽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촬영을 마친 그녀를 붙들고 인터뷰를 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취화선>에서 당신은 주연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가 있을 텐데요.
=솔직히 말하면 시나리오를 보고 선택한 건 아니었어요. 장승업을 잘 알지도 못하고. 임권택 감독님을 만나 뵙고, 그 인물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어요. 그 인물을 들으니 눈물이 나더라구요. 진홍에게 제일 끌린 대목은 그녀가 기생이라는 거였어요. 살림도 무지 잘한다는 말에 끌렸어요. 돈 많은 사람 밑에서 사는 기생이 아니라, 자기가 소매걷어붙이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먹여살린다는 거. 그게 취미인 여자. (웃음) 전에도 그랬고, 그 다음에도 그렇게 한 세상 산 여자. 사실 진홍이가 화조 싫고 매화병풍 그려내라 하는 건 속된 마음도 있겠지만, 사랑하는 사람 조금이라도 더 있기를 바라는 거죠. 진홍이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삶이 응축되어 있는 거 같아요.
-최민식씨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김여진씨는 연기를 패스하면 그걸 어떤 각도에서 던져도 받아줄 수 있는 연기자라고 하더군요.
=너무 고마운 말이죠(정말 이 말을 듣고 활짝 웃었다). 최민식씨는 내가 이 영화를 결정한 절반의 이유이죠. <파이란>을 다섯번이나 보았어요. 그러면서 그런 느낌을 저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저분밖에 없다, 는 생각을 했어요. 남자 연기자이지만 그 영화 연기를 많이 연구했어요. 특히 그냥 주고받는 연기가 아니라 엇박도 잘 맞으니까, 호흡이 잘 맞아요.
-진홍의 액션을 크게 잡아서 연기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진홍은 집착도 강하고, 소유욕도 강하고, 울기도 잘하고, 우는 것도 엉엉 울고, 흥분하니까 손도 막 나가고, 그런 여자니까 그게 맞는 거 같아요. 카메라 앞에서 의상 리허설할 때였어요. 매향이가 매화 같은 아름다운 식물 같은 여자라면, 진홍은 고양이 같기도 하고, 뱀 같기도 하고, 너구리 같기도 한 동물 같은 여자라고 생각했어요.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아주 사납고 처량하고, 가련하고, 불쌍한 여자라고 생각했어요.
-해석을 하면서 임권택 감독님과 다른 부분이 있었나요.
=사실 연기 해석을 크게 정하지는 않았어요. 느낌만 잡아놓았지요. 나머지는 감독님 말씀대로 갔어요. 원래 나는 연기를 할 때 내 해석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에요. 무엇보다도 감독님이 짜준 콘티가 재미있었어요. 감독님의 인물 연기해석은 납득할 수 있는 편이었어요.
-오늘의 촬영은 영화에서도 분기점입니다. 그야말로 온 종일을 여기에 바쳤는데, 그러고 난 다음에는 진홍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진홍이가 장승업과 살면서 백년해로하고, 애도 낳고, 그런 꿈을 꾸었겠죠. 여자로서. 하지만 알고 있었을 거예요. 내 치마 폭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걸. 최악으로 헤어진 거죠. 진홍이는 헤어지고 난 다음에 매화병풍도 간직 안 하고 바로 팔아버린대요. 그러고나면 장승업은 돌아올 데가 없는 거죠. 하지만 그래야 정상에 올라가지 않을까요? 베이스 캠프가 없어야 계속 올라가는 거죠. 장승업이 떠나간 다음에 아마 평범한 남자랑 살았겠죠. 두세명 정도 더? 그러나 그러면서도 내 남자는 장승업 그 사람뿐이다, 하고 살았을 거예요.
-영화는 당신에게 무엇입니까.
=글쎄요, 영화는 이제 덜 하고 싶어요. 사실 그동안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왔어요. 그러나 다 사양했어요. 아마 주말 드라마를 할 거 같아요. 영화는 나한테 애인 같은 거예요. 한편 한편이 오래 가요. 일년에 한편만 하고 싶어요. 양다리 걸치는 것도 싫고. 그것만 몰입하고 싶으니까, 더 신중해지죠. 그 대신 방송은 친구 같아요. 다다익선이죠. 이 사람 만나고, 저 사람 만나고, 호기심나는 대로, 훈련도 되고, 영화와는 다른 거 같아요.
내 생각에 김여진과 함께 작업을 할 수 있는 감독은 운이 좋은 편이다. 영화를 애인처럼 신중하게 빠져들고 싶다고 진심으로 말하는 연기자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침내 풀리는 비밀 2001년 10월15일
저녁 식사가 끝난 다음. 러시 필름을 보기 위해 양수리 시사실에 모였다. 그동안 촬영한 필름을 현상하여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이 자리는 영화를 연출한 감독과 촬영감독에게는 사활이 걸려 있는 매우 심각한 자리이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대다수 스탭들에게는 즐거운 막간의 휴식과 같은 것이었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분장을 하고 시침 뚝 떼고 나와서 연기를 하고(임권택 감독은 특별히 연기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주변 스탭 중 누군가를 지목하여 분장을 하고 카메라 앞에 세운다. 맨 처음에는 좀 의아하게 여겨졌는데, 오히려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낯선 사람이 나타나 어색하게 화면 앞에서 묻어나지 않는 것보다는 충분하게 영화에 들어와 있는 스탭들이야말로 이 영화 안에서 가장 훌륭한 엑스트라들인 셈이다), 그걸 어떻게 찍었는지 세세히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영화보다는 오히려 그 장면에 묻어나는 현장의 상황이 고스란히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몇 차례 시사가 있긴 했지만, 나는 이 러시 프린트를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정말 흥분된 순간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지구에서 최초의 <취화선> 관객인 것이다. 러시 프린트는 소리는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순서 편집을 마쳐놓은 상태였다.
불이 꺼지고 시사가 시작되자 스탭들의 웃음소리가 간간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문제의 장면 94의 숏 14와 마주하는 순간, 나는 비로소 이 장면의 비밀을 알 수 있었다. 그 장면의 비밀은 현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편집에 온전하게 담겨져 있었다. 장승업은 매화병풍 열폭을 그려주었다. 그리고 임권택 감독은 열한 번째 병풍을 진홍을 위해서 그려놓은 것이다. 장승업의 방 안으로 들어가, 이제 거기 없는 정인의 시선으로, 그 방 안에서 방문 틀-프레임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그 화면 사이즈는 영화의 프레임을 거절하고 온존하게 세로가 긴 한국 병풍화의 사이즈가 되어서 그 안에 눈물 흘리는 진홍의 그림이 되어주었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롱테이크를 버리고, 대부분의 장면이 씬을 여러 개의 숏으로 쪼개나가면서도 결코 인물의 이야기를 따라 가지 않고 때로는 물러서고 때로는 비켜서면서 가옥을 걸고, 돌담길을 따라가고, 주막의 기둥을 따라 펼쳐지는 것은 이 영화의 미학이었던 셈이다. 영화 프레임 안에 그림의 프레임이 걸리고, 영화 이동숏 안에 병풍의 그림이 펼쳐지면서, 기둥과 벽이 와이프처럼 화면을 수평으로 지워나갔다.
이 영화는 임권택 감독이 (형식적으로만 설명하자면) 롱테이크의 시대를 마무리하는 영화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그동안 많이 했지 않나요? (웃음) 이번은 일상을 힘있게 표현하기 위해 클로즈업이 필요한 영화입니다. 그 대신 빠진 뒤 다시 롱테이크가 됩니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지요. 롱숏(그러니까 정확히 표현하면 긴-길이의-숏(long length shot))가 되는 겁니다. 장승업을 어떻게 하면 이야기 안에서 아주 절묘하게 밀착되게 보이게 할까라는 고민을 담는 길이의 숏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롱테이크 대신 숏을 통해 화면을 다루면서 숏이 가는 힘을 한껏 끌어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숏 안에 신이 있는 거지요.”(임권택 감독과의 인터뷰) 이것은 온전하게 임권택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통해서 얻어낸 한국화의 깊은 맛과의 접신의 경지가 그윽한 향기였다. 나는 그날 너무 즐거워서 밤잠을 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