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3]
2001-12-14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제 2장 크랭크인

장승업, 고흐와 동시대 화가

2001년 7월16일 날씨 맑음

이 영화의 공식적인 크랭크인은 내가 이 시나리오를 읽은 지 보름 뒤인 7월16일 월요일이었다. 날씨 맑음. 이 자리는 기자들을 부른 첫 번째 현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날 한국화에 관한 세미나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한국화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인터넷 서점에서 22권의 한국화 책을 사들고,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영화와 회화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유감스럽게도 유홍준 선생이 쓴 두권의 <화인열전>에는 장승업이 빠져 있었으며(그런데 안견과 신윤복도 빠져 있었다. 장승업을 고의로 폄하한 것 같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한국화에 관한 책들에서 김홍도와 김정희에 비하면 장승업은 매우 적게 다루어져 있었다(다루어져 있어도 부정적인 시각에서 쓰여진 것들이 많았다). 영화에서 화가를 다룬 작품도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고흐를 다룬 빈센트 미넬리의 <생의 갈망>,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안드레이 루블례프>,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에서 반 고흐를 만나는 에피소드, 자크 리베트의 <벨 느와제즈>(우리나라 제목으로 <누드 모델>로 알려진), 미조구치 겐지의 <우타마로를 둘러싼 다섯명의 여자>, 모리스 피알라의 <반 고흐>와 같은 작품들이 있을 뿐이다(아마도 내가 빼놓은 중요한 영화들도 있을 것이다). 자료들을 읽다가 발견한 이상한 한 가지 공통점. 유난히 반 고흐에 관한 영화들이 많으며, 장승업은 반 고흐와 동시대 화가였다는 사실이다. 또는 반 고흐와 장승업은 영화라는 기계장치가 발명되는 시대에 살아 있었던 사람들이며, 그들은 우리의 근대에로 들어오는 시대의 문턱에서 활동했던 화가들이다. 임권택 감독이 그려내고자 하는 장승업, 당신은 누구십니까?

임권택 감독 촬영현장에 비디오 모니터가 생기다니…

2001년 8월16일 맑았다 비

서울에서는 날씨가 맑았으나 전라남도 강진으로 내려가는 길에 비를 뿌리기 시작하다. 영랑생가에서 촬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장에 인사드리기 위해서 찾아 내려갔다. 아직 장승업은 어른이 되기 이전이며(따라서 장승업이 나오기는 하지만, 최민식씨는 오지 않았다) 영화에서 김병문 선생이 거지였던 장승업을 은암 선생에게 추천해서 그곳에 내려가 그림의 기초를 배우는 대목이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다음이며, 영랑생가에는 촬영차와 조명기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모든 것은 늘 보아온 것이지만, 다만 내가 신기하게 생각한 것은 임권택 감독 현장에 비디오 모니터가 생긴 것이다. 물론 지금 한국영화 현장에서 비디오 모니터는 낯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흔일곱편의 영화를 비디오 모니터 없이 작업한 임권택 감독의 현장에 비디오 모니터가 생긴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내가 알기로 한국영화에서 처음 비디오 모니터를 사용한 영화는 박광수 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일 것이다. 왕가위는 <화양연화>에서 처음 비디오 모니터를 활용했다. 왕가위는 “비디오 모니터는 현장을 바꿔놓는다”라고만 짧게 대답했다. 임권택 감독은 <춘향뎐>에서 비디오 모니터를 처음 사용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현장에 하루이틀 구경가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내가 제일 우습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영화기자들이 고작 한나절 영화현장을 들러본 다음 그 영화에 대해서 논하려 들 때이다. 사람은 자기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겸손해야 한다. 나는 인사를 드리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첫 견학길은 다음날 아침 발길을 돌렸다.

15여 차례의 NG, 대체 이유가 뭘까?

2001년 9월10일

충청북도 청송문화재단지를 찾아가다. 날씨 맑음. 두 번째 현장 방문으로 이날은 장승업이 기생 매향의 기방을 찾는 장면을 먼저 찍었다. 최민식씨를 그날 처음 보았다(사석에서는 스크린 문화연대 사무실에서 만나보았지만 현장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본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뒤늦게 유호정씨가 도착했다. 기생방에 장승업이 기생 매향을 찾는 장면을 단 한번에 오케이 놓은 다음 옆의 대나무 숲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날 밤에는 장승업과 기생 매향이 다시 만나는 한벽루 주변의 장면이다.

장면 #102. (달빛 교교한 오솔길을 거니는 승업과 매향) 매향 “화명이 어찌나 자자하던지 오시는 걸 미리 알았습니다.” 승업 “애저녁에 끌려가 죽은 줄만 알았네. 소식을 물어 찾았네만 아는 이가 없더니….” 매향 “서울서는 목숨을 보존키 힘들어 이곳저곳 흘러다니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장면 #102-A (구름 속에 비어져 나오는 둥근달) 승업 “정인(情人)은 있는가?” 매향 (못 들은 척 웃는다) “바로 한양으로 가시나요?” 승업 “저렇게 그림을 조르니 한 달포 예서 머물 걸세.”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현장에서 어둠은 깊숙이 내리게 마련이다. 겨우 9시 반경인데도 이미 어둠은 칠흑처럼 떨어져 내렸다. 별달리 어려움이 없는 것 같았고, 조명은 대나무 숲 뒤로 세워졌다. 두 사람이 대나무 숲이 펼쳐진 담벽길을 따라 걸어오면서 대화를 나눈다. 몇번 리허설을 해보고 슛에 들어갔다. 카메라는 두 사람을 따라 수평으로 레일을 깔았고, 그 위에 크레인을 올려놓았다. 비디오 모니터를 세워놓기는 했지만, 연기자들의 동선을 따라가면서 임권택 감독은 거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모니터를 열심히 보는 것은 매번 연기가 끝날 때마다 자신의 동선과 표정을 일일이 체크하는 최민식씨와 유호정씨였다(그 뒤로 나는 유심히 보았는데 최민식씨는 아무리 짧은 장면도 반드시 모니터 화면으로 자기가 나오는 장면을 다시 확인하였다.

그건 예외가 없었다. 이상하다 싶으면 “감독님,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만큼 자기 연기의 플랜에 확신을 갖고 있는 배우였다). 감독님은 두 사람의 동선을 따라 같은 속도로 걸으면서 대사를 나누는 두 사람의 표정을 세세히 보았다. 임권택 감독은 오케이 사인을 내리기 전에 이미 그 장면이 마음에 들면 함박웃음이 꽃피는 얼굴이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쉽게 웃음이 피지 않았다. 계속해서 엔지를 불렀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내내 옆에 서 있었지만 그 장면이 왜 엔지인지를 알 수 없었다. 두 연기자의 얼굴이 조금씩 굳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걸어오는 속도와 대사의 속도가 붙지 않는다고 설명하였다. 그래서 대사를 어떤 타이밍에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리저리 바꿔보았다. 그러더니 감독님은 정일성 촬영감독을 불렀다. 이번에는 아예 카메라의 동선을 바꿔보자고 말했다. 열네번의 엔지 다음에 레일은 위치를 바꾸고, 크레인의 각도도 바꾸었다. 두 사람은 연기 동선을 새로 배치받았다. 이미 앞의 동선에 익숙해서인지 두 연기자는 반복해서 엔지를 냈다. 그건 내가 옆에서 보기에도 이상하게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잠시 휴식을 하는 동안 임권택 감독이 비디오 모니터 앞에 앉아서 스크립터에게 앞의 장면을 모두 다시 틀어보자고 말했다. 아무 말 없이 보던 감독님은 다 끝나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모이가 좀 이상해, 하여튼 모이가 안 맞어.” 감독님의 혼잣말이지만 그 순간 옆에 서 계시던 정일성 촬영감독과 김동호 조명기사, 조감독, 그리고 모두가 얼굴이 굳었다. 시간은 열두시를 넘고 있었다. 이제 한국영화 현장에서 임권택 감독의 그 장면이 될 때까지(!)라는 그 전설적인 순간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모든 스탭들에게는 지옥의 순간이지만, 나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예상치 않게 빨리 마주친 셈이다. 모기들이 조명들을 찾아 날아들었고, 늦여름인데도 찬 공기는 옷매무새를 파고들었다. 임권택 감독은 장면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였다. 카메라는 처음 설계가 바뀌면서 쉽게 자리를 잡지 못했다. 처음에는 수평의 움직임이었던 것을 이번에는 사선으로 바꾸어 카메라를 이동하고, 장승업과 매향은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서 하던 대사를 서서도 해보고, 그 반대로 매향이 멈춰서고 장승업이 그녀를 원형으로 돌면서 대사를 나누기도 하였다. 한번 정해지면 그 장면에서 최선을 다해보지만, 번번이 임권택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여름은 새벽이 이르게 찾아오는 편이다. 결국 새벽 세시 반. 임권택 감독은 최민식씨와 유호정, 그리고 정일성 촬영감독과 김동호 조명기사를 한자리에 모아 그냥 한마디 하셨다. “여기는 그 대사가 묻어나는 장소가 아니요. 돌담길도 이상하고, 아무 맛이 안 살어. 암만 해도 여기서는 그게 안 나오는데, 여름이 끝나기 전에 다른 장소를 찾아봅시다.” 촬영은 결국 여섯 시간 반 동안 진행되었지만 포기하고 말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그 장면에 어울리지 않는 장소가 있는 법이다. “그렇지요. 차라리 날씨가 안 맞으면 그냥 갈 수도 있어요. 그러나 장소가 안 맞으면 그건 도리가 없는 것이지. 암만 해봐야 가짜 같거든. 그런데 그 장소가 그런지 아닌지는 그걸 해봐야만 안다는 것이요. 그러니 미치는 거지. 암만 해봐도, 배우가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그 다음에 카메라를 온갖 데다가 들이대도 결국에는 아닌 데는 아닌 것이요.”(임권택 감독과의 인터뷰) 이 장면은 조감독에게 나중에 들어보니 남원에 가서 한번에 오케이가 났다고 한다. 그 대사가 묻어나는 장소란 어떤 의미일까? 앙드레 바쟁은 장 르누아르에 대해서 쓰면서 이 말을 인용한다. “맞지 않는 장소에서 찍는 것보다는 못 만든 세트장에서 만드는 편이 낫다.”

조선춘화도 화집에서 빌려온 정사체위

2001년 9월11일

이튿날은 장승업과 매향의 야외에서의 정사장면이 있는 장면이다. 날씨 맑음. 장소는 청송문화재단지에서 조금 떨어진 담배밭에서 촬영되었다.

장면 #103 (강변, 앉은 자세로 정사를 나누고 있는 승업과 매향) 매향 “선생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세상살이 시름이 다 사라지니 이상하지요?” 승업 “그려서 위로주고, 그리면서 위로받는 게 환쟁이들일세. 자네와 나처럼 내 그림 통해 맘 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어디 그리 흔한가?”(서로 찾아드는 매향과 승업의 손) 시간경과 (꿈결같은 정사 뒤, 충일감에 누워 있는 두 사람) 승업 “이러지 말고 함께 사는 게 어떻겠나?” 매향 (웃으며) “화류계 떠도는 것도 모자라, 도망까지 다니는 신세입니다.” 승업 “…여기는 괜찮은가?” 매향 “아전 놈 하나가 눈치를 챘는지… 지분거리는 통에, 이곳도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마치 <서편제>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케 하는 키 높은 담배밭인데, 그 위에 자리를 잡고 장승업과 매향이 앉았다. 두 사람의 정사는 매향이 뒤로 앉아서 장승업을 올라타고 정사를 벌이는 후배위의 체위로 잡혔다. 감독님이 이 장면을 참조했다고 보여주신 책은 조선춘화도 화집이었다. 이 책에는 당시 그려진 수많은 춘화도들이 담겨져 있었다. 그 책을 넘기면서 본 것은 유교가 지배하고 엄숙한 양반들과 선비들의 근엄한 얼굴 아래 숨죽이며 지내던 옛 조선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인간적인 체취였다. 임권택 감독은 이 영화에서 정사장면들을 이 책에서 발췌하여 체위를 결정하였다. 이 책은 자주 이 영화현장에서 인용되곤 했다.

임권택 감독은 간단한 지시만 한 다음 그 자리에서 조감독을 불렀다. 그리고 이 장면을 열네개의 숏으로 쪼갰다. 이건 아주 의외였다. 당연히 롱테이크로 갈 거라고 생각하던 나는 갑자기 장면을 쪼개어서 들어가는 순간, 내가 <춘향뎐>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개의 숏을 더블 액션으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대사를 따라 마스터숏으로 시작해서 매향의 눈물 흘리는 얼굴의 클로즈업까지 파고들었다. 그 카메라의 동선은 장승업의 마음이 매향의 마음 안으로 파고들 듯한 순서를 따라갔다. 그러나 번번이 엔지를 내는 것은 연기자들이 아니라 바람이었다. 담배밭을 흔들어 주어야 하는데, 바람은 내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위에 찬란한 햇살이 떨어져야 하는데도 구름은 내내 심술을 부렸다. 기다리면서 담배를 피워물던 감독님은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하자 김동호 조명기사에게 “매향에게 빛을 떨어뜨려 주세요” 하더니 바로 일어나서 슛을 불렀다. 그리고 순식간에 열네개로 그 장면을 쪼개 들어갔다. 거의 망설이지 않는 정확함. 행여나 감정이 다칠세라 중간에 쉬지 않고 정사를 따라가면서 이러저리 나누는 것을 정일성 촬영감독은 거의 그 머리 안에 들어가서 그 속의 그림을 복기해내듯이 순서대로 따라갔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오랜 작업이 가져온 장인들의 경지일 것이다. 그것은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소름 끼칠 만큼 숙련된 솜씨였다. 영화는 숏을 이어붙이는 것이 아니다.

결국 영화는 장면을 어떻게 나누냐의 문제이다. 그것이 장 피엘 우다르가 브레송의 <잔다르크의 재판>을 보면서 상대-숏 없이도 대화를 펼쳐낸 저 기적의 순간과 마주한 순간의 탄식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내부의 인물없이 외부의 인물이 없지만, 외부의 인물없이 내부의 인물도 없는 숏나누기의 봉합(suture)을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이 영화에 부여한 철학적 의미라고까지 말한다. 우리는 그 순간 영화 안으로 들어가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끼어든 시선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영화의 숏들은 자리를 벗어나고(out-of-joint), 신은 성립되지 않는다(미안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영화들은 숏이 안 맞는다. 심지어 텔레비전 드라마는 그걸 무시하고 찍는다. 그것이 내가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이다). 햄릿의 아버지가 유령이 되어 그의 아들에게 들려준 첫 대사. “시간이 멋대로 가고 있다.”(Time is out-of-joint) 이 말은 영화에서 시간이 어떻게 제 자리를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경구로도 읽혀야 한다. 제자리에 있지 않은 인물은 영화에서 유령이 된다. 내가 그 장면을 옮겨놓은 메모를 읽으면서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취화선> 팀은 장승업의 유랑길을 따라서 조선시대 말 충청도를 거쳐 호남땅 풍경 안으로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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