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1]
2001-12-14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영화에 취한 신선, 붓끝에 핀 만다라를 좇다

그는 자신의 일을 꽃을 피우는 일에 비유했다. 꽃을 땅을 버리지 못한다. 자신의 뿌리가 놓인 땅에서, 꽃은 땅의 풍요와 가난을 먹고 살다, 그 땅으로 돌아간다.

임권택은 땅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환청처럼 땅의 노래를 듣는다. 노래는 그의 몸을 돌아 영화라는 꽃으로 피어난다. 그는 평생 이 땅을 떠돌며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한 불행한 떠돌이 예술가의 혼을 담은 <취화선>에 이르렀다. 그건 어쩌면 40년 영화인생에서 처음 감독 자신이 주인공인 노래인지도 모른다.

촬영현장 장기취재 허락을 청했을 때, 임 감독은 조용히 승낙했다. 그리고 그를 기꺼이 경외하는 외부인은 <취화선>의 제작진과 한달여를 함께 지냈다. 그는 그곳에서 꽃잎이 눈을 떠 영화의 하늘이 열리는 순간의 경이를 경험했다.

임권택 감독, 그리고 그의 영화가족과의 긴 동행의 기록을 여기에 담는다. 이건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설레고 자랑스럽고 벅찬 기록이다. 편집자

여기에 실린 사진들은 일부를 제외하곤 모두 <취화선> 스틸작가 김재영씨의 작품입니다. 김 작가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서문

2001년 3월 그 어느날. 당신에게 부탁하니, 서문이 긴 것을 용서해주기 바란다. 더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영화를 다시 돌아보면서. 날씨 매우 흐리다가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음. 그러니까 이 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중략)… 다시 말하지만 그러니까 영화는 이상한 힘이 있다. 누구라도 영화를 보고 나면 쉽게 입을 열게 만든다. 우리는 소설을 읽고 난 다음 아무렇게나 말하지 못한다. 조이스나 프루스트 같은 미로를 헤치고 나온 다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저 할 수 있는 일은 친구들의 이름이 적힌 수첩을 들추면서 우리의 하루를 돌아볼 뿐이다. 세잔의 그림을 보고 난 다음 그 감흥을 아무렇게나 말하지 못한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 제3악장 아다지오에 대해서 방금 듣고 난 다음에도 다시 한번 더 듣고 말하겠다고 대답을 미룬다. 베게트의 무대는 거의 등장인물이 없는데도 무언가 보지 못한 것이 거기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화는 보고 나오면, 그 영화가 난니 모레티이건, 허우샤오시엔이건, 제임스 카메론이건, 데이비드 린치건, 임권택이건, 그게 누구의 영화건, 누구라도 영화관 문을 나서면서 방금 보고 나온 것에 대해서 금방 입을 연다. 심지어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영화를 보고 나오면 화를 낸다.

그러나 우선 솔직하게 고백해야 하는 사실이 있다. 우리는 영화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보고 나온 영화에 대해서 격렬하게 비난하는 사람에게 그 장면이 그런데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라는 단 한마디 질문은 신기하게도 그 사람을 침묵시킨다. 우리는 영화를 그저 관념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영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까 영화에 의지해서 칸트와 사드를, 라캉과 지젝을, 들뢰즈-가타리와 바타유를, 프로이트와 소쉬르를, 벤야민과 아도르노를, 크리스테바와 이리가라이를, 니체와 레비나스를, 또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리비도를 끌어들이건, 잉여가치를 발견하건, 부유하는 기표를 따라가건, 소문자 타자의 구멍을 채우건, 그건 아무래도 좋다(그런데 더 우스운 것이 있다. 그 누군가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에 관한 영화평을 쓰면서 이 영화는 감각에 의지해서 직관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엄숙하게 끝을 맺은 글을 읽으면서 나는 낄낄대고 웃었다. 그건 그 영화에 대해서 나도 알지 못하니 그만 괴롭혀달라는 비장한 자백(!)이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영화에 대해서는 쓰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영화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영화에 의지해서 철학을 사유하는 것이다. 이 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은 철학에 의지해서 영화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그저 생각해서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구체적인 노동을 바탕으로 테크놀로지를 통해 기어이 자기가 가 닿으려는 상상의 형상에 항상 도착하지 못하는 실패에 관한 집단적인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모든 영화는 결국 근대가 발명한 기계장치를 놓고 인간이 속도 안에서 시간과 공간을 우리의 자아가 다룰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벌이는 바보 같은 경기이며, 결국 그 안에서 불가능을 받아들여야 하는 비극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벌어지고 만 근대라는 사건과 벌이는 협상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 안으로의 여행은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정말 영화를 주의깊게 보는 사람이라면 영화작가들이 만들어내는 기적과 같은 순간을 보면서 이 천지창조의 위대한 비밀이 과장없이 가슴이 미어지도록 궁금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이 말은 프랑수아 트뤼포의 말이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오명>을 보면서 정말 궁금했다. 세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비밀을 안은 아내와 비밀을 이미 알고 있는 남편과 그들 사이에서 시침미떼고 접선해야 하는 스파이 사이의 파티장에서의 만남을 담은 이 복잡하기 짝이 없는 심리상태를 단 한마디의 설명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연출하는 숏을 수없이 다시 보아도 그건 기적과 같은 것이었다. 빔 벤더스는 오즈의 영화를 아무리 다시 보아도 50mm 표준렌즈가 그 작은 가옥 구조 안에서 만들어내는 소우주의 엄격한 질서를 감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16mm 카메라 한대와 나그라 녹음기 한대를 들고 도쿄에 찾아와 오즈의 살아남은 스탭들을 차례로 만나서 질문하기 시작했다(<동경화>). 세르주 다네는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 <난>에서 불어오는 그 바람이 어떻게 깃발을 펄럭이게 만드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일본을 찾아간다. 파스칼 보니체는 자크 리베트 영화에 관해서 연구를 하다 결국 포기하고 그 비밀을 훔쳐내기 위해 그의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서 현장에 머물렀다. 그는 이제 더이상 영화평을 쓰지 않는다. 감독이 되었기 때문이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허우샤오시엔의 방 안과 세상 사이를 가르는 창문틀 너머 빛을 만들어내는 조명의 자리를 들여다보기 위해 타이베이를 방문한다(<HHH, 허우샤오시엔의 초상>). 아무리 영화에 관한 평을 써봐야 알 수 없는 기적들이 거기 있는 것이다. 나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볼 때마다 신기하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항상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 있었다. 그가 장르영화를 만들건 작가영화를 만들건 그런 건 나한테 중요하지 않다. <만다라>에서 삼라만상이 숨죽이는 순간, 나는 거의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장군의 아들>에서 다른 장소에서 촬영한 것이 분명한 숏들이 한 신 안에서 마치 제 자리를 찾듯이 착착 달라붙는 순간 거기서 거의 불가능한 조립을 본다. <티켓>에서 마담이 다방 아가씨들에게 술주정을 벌이는 장면이 만들어내는 감동은 그 3분40초의 롱테이크 길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장면을 자르는 순간이다. 마찬가지로 <서편제>에서 5분10초에 이르는 기나긴 롱테이크는 시간적 길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의 풍경에서 나온다. 그 풍경 안에서 넉살좋게 주름처럼 구부러진 길이 만들어내는 삶의 고단함 위에서 ‘가짜’ 가족인 아버지와 누나와 동생이 아리랑을 부르며 걸어오는 순간 우리는 거기서 햇빛 찬란한 날씨가 만들어내는 행복한 비극성과 마주한다. 분명히 아름답지 않게 찍혔음에도 불구하고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아제 아제 바라아제>의 무심한 롱숏들은 그 자체로는 매우 평범한데도 불구하고 그 맥락 안에 있는 위치의 좌표를 통해서 미학적 형상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태백산맥>에서 산을 타고 달려 내려오는 빨치산들의 속도의 편집을 떠올려보라. 또는 <창>의 폐소공포증에 가까운 세트 안에서 자크 타티를 연상시키는 화면틀-들(tableaux-vivant) 안으로의 무한한 수평 이동들. <축제>에서 어머니의 자리를 비워놓은 결여된 롱테이크의 비가시적인 구도. 거기에는 절대조감이라고 불릴 만한 관점으로 영화의 구성요소들의 순열-조합을 다시 이루어내는 상대적인 순간이 있다. 그 방법 이외에는 다른 그 어떤 것도 생각해낼 수 없는 절대적인 동시에 상대적인 조감은 그의 영화 안에서 모순된 말이 아니다. 아니면 <춘향뎐>에서 방자가 춘향을 찾아가고, 또는 변 사또의 부름을 전하러 달려가고, 아니면 떠나가는 몽룡을 춘향이 붙들고 늘어지면서 소리와 이미지가 어우러지는 단 일분 안의 점핑은 결코 반복될 수 없는 창조의 순간이다. 그건 본다고 베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그건 브레송의 손을, 베리만의 얼굴을, 오즈의 텅 빈 주전자를, 고다르의 카메라를 향해 돌아보는 몸짓을, 호금전의 하늘로 비상하는 무사의 경공술의 순간을, 그들을 뒤쫓는 세대들이 아무리 그대로 베끼려고 해도 그 장면들이 복제를 완강하게 거절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나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만드는 그 순간에 거기에 가서 그 위대한 비밀을 훔치고 싶었다. 하지만 감히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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