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단카이 세대의 모던재즈
2010-08-12
무라카미 하루키와 재즈

얼마 전까지, 내가 어떤 자리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 인사를 나누면서 재즈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면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 와인 좋아하세요? 둘째, 무라카미 하루키 좋아하세요? 이상하게도 찰리 파커를 좋아하느냐 혹은 키스 자렛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아본 기억은 내게 없다. 물론 그때마다 나는 ‘예’라고 대답한다. 술은(와인뿐만 아니라) 다 좋아하니까. 그리고 적어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상실의 시대>는 재미있게 읽었으니까. 그때마다 속으로 생각했다. ‘이노무’ 재즈는 아직도 우리에게 독립된 음악이 아니구나. 그저 장식물이구나. 와인 마실 때의 배경음악 혹은 하루키풍 라이프스타일(또는 그것에 대한 로망) 속의 무엇.

그렇다. 언감생심, 나는 하루키를 질투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전세계 어디서든 베스트셀러 작가가 재즈 뮤지션보다 유명한 것은 당연하며, 그렇다면 그 작가의 눈을 통해 사람들이 재즈를 바라보는 것도 이해 못할 것은 아닌데도, 재즈가 하나의 독자적인 음악으로 인정받고 재즈 연주자 자체가 논의의 대상이 되길 바라는 나로서는(간단히 말해 재즈 동네에서 밥 먹고 살아야 하는 나로서는) 듀크 엘링턴, 찰리 파커, 마일스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키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 심사가 괜히 뒤틀렸다.

재즈팬들은 기억할 거다. 벌써 15년여 전 일이 되었는데 그때 국내에는 재즈 열풍이 불었다. 그런데 그 열풍이란 영화 <아마데우스>로 모차르트 열풍이 불었던 것에 비해도 그 내용이 턱없이 빈약했다. 카페, 드라마, 화장품 등 일상의 곳곳에서 재즈라는 이름이 들리는데 정작 그 안에 재즈 음악은 없었다. 모두 재즈를 듣는다고 하는데 우리 입에 오르내리는 작품과 연주자는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하루키의 소설이 한구석을 차지했다. 재즈란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하루 종일 글을 쓰거나 번역을 하고 해 저물 무렵 집 근처 카페에 앉아 맥주 한잔 앞에 놓고 TV로 야구 경기를 관람하며 듣는 음악이었다. 그가 외로울 때 콧노래로 흥얼거릴 수 있는 색소포니스트 레스터 영의 멜로디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더이상 집단의 명분(그것이 가족이든 회사든 아니면 정치적 결사체든)에 얽매이기 싫은 당시 90년대 새로운 인간의 영혼이었다.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때 재즈, 재즈 한 것이다. 당시는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이었으며 그것을 이해하면서도 하루키를 질투한다면 그것은 괜한 푸념일 뿐이다.

사실, 하루키에 대한 진짜 질투는 그 다음에 시작되었다. 와다 마코토가 그린 그림에 하루키가 짧은 에세이를 붙인 <재즈의 초상>(당시에는 <재즈 에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이 처음 국내에 소개되었을 때 나는 애써 외면하려고 했지만, 그가 재즈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각 아티스트를 묘사한 아름다운 문장이야 감히 내가 탐낼 경지가 아니었지만, 밥만 먹고 하루 종일 음악만 듣는 나로서도 놀랄 정도로 그는 음악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었다. 더욱이 나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 내가 책을 통해 읽고 음악을 통해 추체험했던 것. 바로 1950~60년대 모던재즈의 전성기를 동시대의 감수성으로 부딪힐 수 있던 기회가, ‘단카이 세대’의 짙은 체험이 그에겐 배어 있었다. 그가 작정하고 쓴 본격적인 음악 에세이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는 이미 질투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처럼 솔직하면서도 밀도있는 음악 에세이는 정말이지 읽어도, 읽어도 물리지 않는다. 아직 안 보셨다면 꼭 읽어보시라.

그런데 이상하게도 2006년에 소개된 이 책을 통해 재즈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렇다. 10여년의 세월 속에 우린 변했다. ‘스펙 쌓기’의 이 시대에 개인의 자유란 화두는 물론이고 진지한 음악 이야기란 저 멀리에 처박힌 것이다. 아쉽다. 이래저래 하루키를 질투할 일도 이젠 없어져버렸으니.

글 황덕호 재즈 칼럼니스트 <그 남자의 재즈일기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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