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고현정] 우리 시대의 여제
2010-12-23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한동안 이 배우는 멈춰진 ‘모래시계’였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유예된 삶 속에서 10년이 흘렀다. 그러나 다시 뒤집혀 운동을 시작한 아름다운 시계는 그로부터 5년 뒤, 세상의 시간마저 바꾸어놓았다. 드라마 <봄날>처럼 아련하게 귀환한 고현정은 <히트> <선덕여왕>으로 이어지는 박력있는 활약상을 통해 여배우들의 영토, 그 외연과 내연을 조금씩 확장해나갔다. 결국 ‘줌마델라’의 백일몽에 빠졌던 브라운관은 “아사리판”의 현실정치를 향해 직격탄을 날리는 거대한 여성 캐릭터를 잉태하기에 이르렀고, 수컷들의 대결로 피비린내 진동하던 스크린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던 <여배우들>의 육성을 날것으로 전할 용기를 얻었다.

지금 고현정은 ‘대물’(大物)이다. “49%의 악의 꽃 속에 피어나는 51%의 선의 꽃”,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판에 혈혈단신 뛰어들어 결국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된 여자의 믿지 못할 이야기를 소화불량 없이 씹어 삼킬 수 있는 배우는 흔치 않다. 물론 제아무리 고현정이라고 해도 SBS <대물>은 취임식장으로 이르는 길이 만만했던 드라마는 아니었다. 상대역으로 출연이 확정된 권상우는 방영 전 뺑소니 사고를 저질렀고, 우여곡절 끝에 방송을 시작했지만 5회 만에 작가가 교체되고 곧 PD가 중도하차했다. 하지만 거의 천재지변에 가까운 사건들을 거치고, <도망자 Plan B>의 다국적 추격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25% 이상의 고른 지지를 받은 데는 나이브한 대본과 성긴 연출의 틈새를 꼼꼼히 매워가는 고현정의 존재감이 있었다. ‘대물’이란 표현이 신체적인 조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육체를 싸고 있는 공기의 크기임을 고현정은 매주 두번씩 확인시켜주고 있는 셈이다.

어떤 이들의 꿈이 모여 한 시대의 예술이 완성되지만, 어떤 시대의 예술은 한 사람으로 인해 비로소 꿈을 꾸기 시작한다. <대물>의 서혜림이 회를 거듭하면서 사어로 전락한 ‘정의’나 ‘믿음’ 같은 단어에 피를 돌게 만들었던 것처럼, 배우 고현정의 매년의 행보는 중년에 접어든 여배우들에 대한 새로운 기대감과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얼마 전 방영한 SBS 다큐멘터리 <최후의 툰드라>로 이끄는 고현정의 목소리는 이 여인이 지난 굴곡의 개인사를 통해 획득한 자원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려준다. 이미 단단하게 굳어버린 견고한 땅이 아니라 인류 최후의 자원을 품고 부드럽게 출렁이는 툰드라의 대지처럼, 이 배우는 흔들림을 숨기지 않는다. 불안을 감추지 않는다. 여성을 간직한 채 모성을 더한, 거기에 자신감과 연륜이 붙은 역전의 여왕. 언젠가 여왕의 귀환에는 “하늘의 뜻이 조금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꿈에는 고현정의 뜻이 조금 필요하다. 2011년의 시계가 비로소 그녀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올해의 장면

SBS <대물> 2회
“우린. 대체. 누굴 믿고. 살아야 합니까! 내. 아이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이. 나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아아아!” 장대비가 쏟아지는 국회 앞. 피랍 뒤 주검이 되어 돌아온 남편에게 어떤 조치도 취해주지 않았던 국가를 향해 한 미망인이 타는 울부짖음으로 묻고 또 묻는다. MBC <선덕여왕>의 미실이 눈썹의 까딱거림만으로 1300년 전 신라를 움직였다면, SBS <대물>의 서혜림은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온몸으로 토해낸 절규로 2010년 대한민국의 마음을 흔들었다. 소녀시대의 수영이 각종 예능프로그램에서 선보인 성대모사로 화제를 모으기도 한, 월드컵의 함성도 뛰어넘는 진성의 ‘샤우팅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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