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빈의 외모는 첫 출시부터 독보적이었다. 90년대 후반에도 ‘조각미남’은 많았지만, 이토록 여리고 섬세한 ‘피겨’는 처음이었다. 기존의 남성 외모에 대한 미적 감수성을 흔들어놓는, 정말 세련되고 ‘얄상한’ 신상이었다. 이후 ‘꽃미남’들이 늘어났지만, 디자인만 따왔을 뿐 원빈처럼 내면이 느껴지는 눈빛을 구비하진 못했다. 그리움과 애정결핍이 그대로 묻어나는 꽃사슴 같은 그 눈빛 말이다. 기이할 정도로 개인성을 뿜어내는 그의 외모는 때로 배경과 유리되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얼마면 돼?” 하고 치켜뜨는 반항기 어린 모습은 극과 별개의 ‘짤방’인 양 관객의 뇌리에 남았다. 그것은 어쩌면 미모의 배우가 겪어야 할 필연적 한계일 것이다. 원빈 역시 이를 알았다. <태극기 휘날리며>와 <우리형>의 둘째아들이 우직한 형들에 맞서 인정투쟁을 벌이는 동안, 원빈은 배우로서의 한계에 맞서 자의식과 사투를 벌였다. 두편의 영화에서 원빈은 ‘어른 되기’의 도약을 시도하였으나, 여전히 형의 그늘을 인정하는 소년에 머무는 앳된 초상으로 남았다. 공백이라 할 군복무를 마친 뒤, 그는 안쓰러운 턱걸이에서 내려와 초심으로 자신을 돌아본다. 스타이지만 스타임을 못견뎌하던 진중한 시골 청년 원빈은 자신의 외모를 가장 본원적으로 역이용하는 <마더>의 도준이 됨으로써 자신을 성찰한다(원빈의 본명은 김도진이다). 도준은 ‘꽃사슴 같은 눈을 가진 바보’이자, 자신을 바보라고 말하는 자를 쳐죽이고 싶은 ‘욕망하는 남자’이다. 순수하면서 위협적이고, 아이이면서 비틀린 성인이다. 원빈은 도준이 되어 바닥을 침으로써 자의식에서 놓여난 듯 보인다. 그는 마침내 ‘아저씨’가 되어 우리 앞에 임하였다. 호산나! ‘아저씨’라는 평범한 호칭이 그에겐 생전 들어보지 못할 것 같던 가장 낯선 호칭이 아니던가. 그는 온전한 자기 세계를 지닌 성인남자가 되어 비장함의 총구를 내뿜는다. 사슴 같은 눈은 우수에 찬 눈빛이 되고, 어눌한 말투는 과묵한 신비가 되었다. 액션이 작렬하는 순간에도 날렵한 아름다움이 잔혹함을 압도한다. 눈빛과 침묵과 검정 슈트발이 제대로인 그는 누아르에서 확실한 입지를 증명하였고, 소미에게 에두른 고백을 하던 그는 이제 CF가 아닌 스크린에서도 롱테이크의 멜로 연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도준의 역할을 더 변용시킨 코미디가 어울릴 수도 있겠다. 무엇이든 좋다. 애벌레에서 번데기를 거쳐 나비가 된 그가 어디로 날아오를지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설레지 않은가.
올해의 장면
<아저씨>
영화 전체가 원빈의 화보라 할 만한 <아저씨>에서 결정적인 장면을 꼽는 것이 무슨 소용이랴마는 최고의 장면을 꼽는다면 역시 태식이 혼자 머리 자르는 장면이다. 장발로 얼굴의 반을 가린 채 은둔하던 그가 소미에 의해 촉발된 분노로 세상에 나오기 직전, 자기 응시와 결단을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 되겠다. 거울에는 벗은 상반신이 골반뼈 부위까지 드러나 있다. 총상을 입은 복부 주위로 잘 발달된 복근이 보인다. 그의 근육은 여느 수컷의 근육과 달리 위압적이지 않고 아름답다. 뭉텅 잘린 머리칼 아래로 수려한 이목구비와 섬세한 눈빛이 드러난다. 이제 야수처럼 돌변하여 닥치는 대로 적을 죽일 그이지만, 이 신비한 피조물을 보는 관객의 입에선 찬탄의 비명이 새어나온다. 가히 불가항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