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고백>이었다. 2010년 6월5일 일본 전국 266개 스크린에서 개봉한 <고백>은 개봉 주말 이틀 만에 2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수익 2억6천만엔을 벌어들였다. 물론 박스오피스 1위. 3D영화의 호조로 외화가 강세였던 지난해 일본극장가에서 자국 극영화의 박스오피스 1위는 2009년 10월 <내 첫사랑을 너에게 바친다(僕の初恋をキミに捧ぐ)> 이후 8개월만이다. 자극적인 소재와 다소 잔인한 화면으로 국내의 15세 이상 관람가인 R-15 등급을 받았지만 <고백>은 소설의 주 독자층이었던 40대 여성은 물론 여고생들 사이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4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지켰고 최종 39억엔이 넘는 흥행수익을 거뒀다. 미나토 카나에의 동명소설을 <불량공주 모모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의 나카지마 테츠야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2010년 일본 극장가의 최대 화제작이 됐다.
하지만 <고백>은 처음부터 흥행이 예상된 영화는 아니었다.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이란 이점, 마츠 다카코란 배우의 이름값이 있었지만 대다수 일본 언론은 당시 7주 연속 1위를 지키던 팀 버튼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고백>이 누를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배급사인 도호조차 개봉 이후 <고백>의 예상 목표치를 수차례 상향 조정했다. 일단 <고백>은 많은 관객이 가볍게 즐길 만한 내용의 영화가 아닐뿐더러 영화의 구조가 대중에 친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소설 방식을 영화에 그대로 가져온 나카지마 감독은 본인의 CF 연출 경력을 살려 영화를 빠른 편집과 색도 높은 영상으로 완성했다(이어지는 기사 <고백> 참조). 가족 관객이 유독 많은 일본 극장가에서 학생에게 딸을 살해당한 여교사의 복수극 <고백>의 흥행은 그만큼 뉴스였다.
영화계 큰 손인 TV의 힘 빌리지 않은 <고백> <악인>
그리고 <악인>이 나왔다. 9월11일 개봉한 <악인>은 요시다 슈이치의 동명 소설을 <훌라걸스>의 이상일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다. 전국 231개 스크린에서 공개됐고 첫주 19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순위 2위에 올랐다. <악인>의 최종 흥행 스코어는 19억엔이다. <고백>만큼 큰 히트는 아니지만 <악인>의 성공 역시 뉴스가 됐다. 살인자와 살인자를 사랑한 한 여자의 이야기, 그리고 악의 본질에 대한 질문. <악인>이 던진 화두는 일본 대중영화에선 보기 드문 종류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영화전문지 <키네마 준보>는 <악인>을 “관객에게 무언가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라 평했다. <악인>은 관객을 즐겁게 하는 게 아니라 불편하게 한다. 클로즈업으로 잡힌 주인공 쓰마부키 사토시의 불안한 표정은 관객의 심기를 건드린다. 고통과 역경을 극복하고 행복한 결말을 맞는 주인공에 익숙한 대중은 악에 대한 선입견을 재고하는 이 영화 앞에서 어리둥절하게 된다.
<고백>과 <악인>이 최근 대중영화와 달리 어두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주목해야 하는 건 아니다. 두 영화의 ‘나쁜 결말’(Bad Ending)은 2010년 일본 영화계에서 분명 새로움이긴 했지만 일본영화 전체를 다시 검토할 만큼 놀랄 뉴스는 아니기 때문이다.
2010년 일본영화를 결산하면서 <고백>과 <악인>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 건 이 두 영화가 방송국의 입김을 벗어난 작품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 제작위원회 시스템(영화를 제작할 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영화 제작사뿐 아니라 방송사, 출판사 등 다양한 기업이 위원회를 꾸리는 방식)이 시작된 이후 일본 영화계에서 방송국의 역할은 계속 강화됐다. 2000년 이후엔 TV 드라마를 영화로 만들거나, 히트한 영화를 TV 드라마로 다시 제작하는 식의 ‘이벤트 무비’도 등장했다. <고쿠센> 시리즈, <노다메 칸타빌레> 시리즈, <춤추는 대수사선> 시리즈 등이 모두 이벤트 무비다. 2000년 이후 일본 영화계에서 방송국은 가장 큰 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악인>과 <고백>의 제작사인 도호는 이벤트 무비로 돈을 가장 많이 번 회사다.
그렇다면 <고백>과 <악인>은 어떻게 제작될 수 있었을까. 두 영화를 기획한 가와무라 겡키 프로듀서는 두 소설을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한 뒤 처음부터 방송국의 참여는 배제했다고 한다. <고백>과 <악인>은 각각 출판사인 후타바샤와 아사히신문사 그리고 도호를 중심으로 제작위원회가 꾸려졌다. “원작의 내용이 최근 도호 영화와는 정반대의 패턴이라 TV와의 연계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백>의 R-15 등급은 도호 영화로선 2007년 쓰루하시 야스오 감독의 <사랑의 유형지> 이후 3년 만이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도라에몽> 시리즈와 같은 가족용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그리고 <춤추는 대수사선> 등의 이벤트 무비로 대표되는 게 도호의 영화다. 실제로 제작위원회 미팅에서 두 영화는 “너무 어둡다”는 의견에 부딪혔다. 하지만 가와무라 프로듀서는 두 소설을 엔터테인먼트로 성립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한국의 <살인의 추억> <추격자>, 미국의 <다크 나이트>가 성공한 것처럼 일본의 관객도 ‘배드 엔딩’을 수용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00년 <배틀로얄> 이후 일본 관객은 오래 기다려왔다.” 가와무라 프로듀서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쁜 결말’의 영화를 기획할 거”라 말했다.
2000년 이후의 절대권력 이벤트 무비의 흥행력 약화
한 젊은 프로듀서의 야심찬 도전으로 시작된 <고백>과 <악인>이지만 사실 도호가 두 영화를 제작한 데에는 2010년 이벤트 무비들의 다소 저조한 흥행 성적표 탓도 있다. 도호가 지난해 가장 기대를 건 영화 중 하나는 <노다메 칸타빌레> 시리즈다. 2006년 <후지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동명 드라마를 도호는 전편과 후편으로 나눠 제작했다. 2009년 12월 <노다메 칸타빌레 최종악장 전편>이 공개됐고, 2010년 4월 후편이 개봉했다. 하지만 두 작품 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전편은 41억엔을, 후편은 37억엔을 벌어들였다. 나쁘진 않은 숫자지만 애초 50억엔 이상을 최저 목표로 삼았던 도호로선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였다. 2009년에도 비슷한 영화가 있었다. 오다 유지 주연의 <아말피 여신의 보수>(アマルフィ女神)와 나마카 유키에 주연의 <고쿠센 THE MOVIE>(ごくせん The Movie). 두 영화는 각각 36억엔과 34억엔을 벌어들이는 데 그쳤다. 30억~40억엔이란 숫자. 영화 저널리스트 오타카 히로오는 “이 애매한 숫자는 아직까지 미묘한 밸런스를 갖추고 있지만 TV 선전 영화들이 지금까지의 영향력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즉 이벤트 무비의 효과가 이전 같지 않다는 말이다.
2010년 4월 개봉한 <야지마 미용실 THE MOVIE 꿈을 붙잡아 네바다>(矢島美容室 THE MOVIE 夢をつかまネバダ) 역시 이벤트 무비의 흥행력을 의심케 한 작품이다. <야지마 미용실 THE MOVIE 꿈을 붙잡아 네바다>는 <후지TV>의 오락 프로그램 <톤네루즈 여러분 덕분입니다>(とんねるずのみなさんのおかげでした) 기획으로 결성된 그룹 야지마 미용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코미디영화다. 개봉 전후 <후지TV>는 방송을 통해 엄청난 전파 공세를 했고, 스크린도 비교적 많은 154개를 잡았다. 하지만 영화는 4억엔이 밑도는 성적을 거뒀다. TV의 선전력이 기대만큼 발휘되지 않은 것이다. 이벤트 무비의 흥행력 저하. 그리고 도호의 새로운 움직임. 그렇다면 2011년 일본영화는 새로운 장을 맞이할까. 불행히도 아직은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다. 흥행력을 갖춘 TV 드라마, 10년이 넘게 이어지는 장수 애니메이션이 방송국 창고에 쌓여 있기 때문이다. 3대 배급사인 도호, 도에이, 쇼치쿠, 주요 방송국인 <후지TV> <아사히TV> <일본TV> <TBS> 등은 올해도 수십편에 이르는 이벤트 무비를 제작한다고 발표했다.
일본 영화계로서는 TV의 힘을 뿌리치기 힘들다. 일본의 TV를 통한 영화 홍보는 특정 영화 프로그램, 주연배우들의 쇼 프로그램 출연 등으로 한정되는 국내 사정과는 천지차이다. 개봉 전 특별판 드라마를 제작해 방영하는가 하면 낮 시간대를 이용해 영화의 메이킹 영상 등을 틀기도 한다. 방송국이 관여한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의 홍보 효과는 당연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도에이가 배급해 1월18일 현재 관객 200만을 돌파한 영화 <파트너-극장판2-경시청 점거! 특명계의 가장 긴 밤>(相棒-劇場版II-警視庁占拠!特命係の一番長い夜)은 2002년부터 <아사히TV>에서 방영되고 있는 인기 드라마 <파트너> 시리즈가 원작이다. 2편이 상영 중인 2011년 1월 현재 TV에선 원작 드라마의 아홉 번째 시즌이 방영 중이며, <아사히TV>는 개봉 일주일째인 1월1일 스페셜판을 방영하기도 했다. 흥행에 있어 TV의 역할은 아직까지 무시하지 못한다. 예로 1월23일자 일본 박스오피스를 보면 2위가 구사나기 쓰요시의 <보쿠>(僕)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나와 아내의 1778가지 이야기>, 8위가 기무라 다쿠야 주연의 <SPACE BATTLE SHIP 야마토>로, 외화를 제외하고 10위권 안의 영화 중 방송국이 관여하지 않은 작품은 단 한편도 없다.
호기심 자극한 이슈로 젊은 관객들 극장으로
그렇다면 <고백>과 <악인>은 2011년 일본 영화계를 어떻게 움직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두 영화의 흥행에 대한 분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의 영화평론가 데라와키 겐은 영화 전문지 <영화예술>에서 <고백>과 <악인>의 흥행을 각각 “‘<고백> 현상’, ‘<악인> 현상’”이라 표현했다. 즉 영화의 완성도와 재미가 관객을 부른 것이 아니라 영화가 하나의 화제가 되면서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는 거다. 데라와키 평론가는 “지금의 관객은 영화를 영화로서 보는 게 아니라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를 보듯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고백>은 자극적인 소재의 독특한 영화로, <악인>은 주연배우 후카쓰 에리의 몬트리올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작, 그리고 쓰마부키 사토시의 노랑머리 변신으로 주목받았다는 거다. <고백>은 많은 언론들이 여고생들의 입소문을 흥행의 원동력으로 꼽기도 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면서 관객 동원에 성공했다는 거다. 실제로 <고백>의 흥행수익은 첫주보다 둘쨋주, 셋쨋주, 넷쨋주가 높다. 일본의 문화적 트렌드 혹은 대중의 관심의 흐름이 두 영화의 성공을 이끌어낸 셈이다.
2000년 이후 일본 영화계에선 새로운 영화 팬이 없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현재 극장을 찾는 영화 팬은 모두 80년대 시네마테크나 단관 극장을 찾으며 영화를 즐겼던 40, 50대 중년이고 20대의 젊은 영화 팬은 없다는 자조다. 어릴 때 극장을 다니며 영화 보는 재미를 체험했던 이전 세대와 달리 지금의 젊은 세대는 DVD, TV, 게임기를 통해 영화를 직간접적으로 접하기 때문에 보는 영화도 대중 오락영화에 치우쳤다고 말한다. 실제로 일본에선 젊은이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2008년 여름부터 1년간 ‘영화관에 가자 실행위원회’가 ‘고교생우정 프라이스’를 실시했다. 고교생 3인 이상일 경우 관람료가 1천엔으로 할인되는 제도다. 하지만 이 캠페인은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겠지만, 이벤트 무비로 가득 찬 일본 영화계는 새로운 영화 팬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젊은 영화 팬이 실종된 상황에서 이벤트 무비의 제작은 더욱 가속화됐다. 영화 팬을 잃은 일본 영화계는 트렌드와 화제에 민감한 대중을 노릴 수밖에 없다.
영화 팬의 실종, 그리고 트렌드, 화제에 따른 흥행. 이는 2011년 일본 영화계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니 20년 넘게 다져진 제작위원회 시스템을 고려할 때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영화 제작사를 비롯해 방송사, 출판사, 게임회사 등이 동등한 입장에서 제작에 참여하는 제작위원회 방식은 다양한 분야에서의 문화적 트렌드를 반영해 영화를 제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이 꼭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이전까지는 TV에 무게가 과하게 실리면서 획일적인 이벤트 무비들이 양산됐지만 2010년 일본 영화계에선 <고백>과 <악인> 외에도 새로움을 감지할 만한 작품들이 두루 있었기 때문이다. <너에게 닿기를>(君に届け)과 <하나미즈키>(ハナミズキ)가 제시한 새로운 청춘영화, <무사의 가계부>(武士の家計簿), <13인의 자객>(十三人の刺客), <번개나무>(雷桜), <최후의 충신장>(最後の忠臣蔵)으로 부활한 시대극은 2011년 일본영화의 동향을 점쳐볼 수 있는 단서다. 다양한 문화와 트렌드를 헤엄치던 일본영화가 2011년 <고백>과 <악인> 같은 또 다른 대어를 낚을 수도 있다.
대중의 트렌드 포착한 청춘영화와 시대극 부활
도호의 배급으로 8월21일 개봉된 <하나미즈키>는 여성 가수 히토토 요의 2004년 동명 싱글을 모티브로 한 청춘영화다. 대학에 진학하며 도쿄로 상경한 소녀와 어부의 일을 도우며 시골에 남은 소년이 10년에 걸쳐 사랑을 나눈다는 내용이다. 일견 진부한 청춘 연애담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는 여중고생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27억엔이 넘는 흥행수익을 거뒀다. 드라마 <오렌지데이즈>와 영화 <눈물이 주룩주룩>을 연출했던 도이 노부히로 감독은 만남과 헤어짐 사이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결을 섬세하고 현실적으로 그린다. 빤한 미담으로 빠지지 않고 10대 청춘의 현실을 사랑 이야기에 담아 곱게 포장한다. <키네마 준보>는 <하나미즈키> 특집기사에서 이 영화를 “종래의 멜로드라마, 연애영화, 아이돌영화와는 다른 위치에 놓고 싶다. J-Pop 영화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라고 적었고, 영화평론가 모리 나오토는 “기존의 아이돌영화를 업데이트했다”고 평했다.
기존의 10대 대상의 연애영화가 이야기 틀에 얽매여 관습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하나미즈키>는 현실을 반영해 여중고생과 소통에 성공했다. 그리고 <너에게 닿기를>은 마치 여고생들 수다에 동참하는 방식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골수팬이 많은 시이나 가루호의 동명 만화가 원작인 까닭에 제작진은 팬들의 목소리를 수렴한다는 취지로 홈페이지를 통해 ‘전하자! 마음 캠페인’을 벌였다. 총 1만5천통의 메시지를 모았고 이를 시사회 자리에서 공개했다. 원작의 명장면, 명대사도 그대로 살렸다. 개봉 전 TV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되며 TV의 힘을 많이 보긴 했으나 <너에게 닿기를>은 여중고생들 사이의 원작의 인기를 그대로 이어가며 14억엔이 넘는 수익을 벌어들였다. 여학생들의 책가방 속을 훔쳐본 듯한 두편의 영화 <하나미즈키> <너에게 닿기를>은 2011년 일본의 청춘영화를 가늠해보는 좋은 잣대다.
하반기에 몰아닥친 시대극 붐도 주목할 만하다. 도에이의 <필사검 도리사시>(必死剣 鳥刺し, 7월3일)와 <사쿠라다 문 외의 변>(桜田門外ノ恋, 10월16일), 쇼치쿠와 아스믹 에이스의 <오오오쿠>(大奥, 10월1일)와 <무사의 가계부>(武士の家計簿, 12월4일), 도호의 <13인의 자객>(十三人の刺客, 9월25일)과 <번개나무>(10월22일), 그리고 워너브러더스의 <최후의 충신장>(12월18일) 등 2010년 일본 극장가에선 많은 시대극이 관객과 만났다. 그리고 대다수의 작품들이 흥행에도 성공했다. 아라시의 멤버 니노미야 가즈나리가 주연한 <오오오쿠>는 22억엔이 넘는 수익을 올렸고,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13인의 자객>, 모리타 요시미츠 연출, 나카마 유키에, 사카이 마사토 주연의 <무사의 가계부>는 각각 13억엔, 12억엔의 흥행성적을 거뒀다. <영화예술>은 “2010년은 일본영화의 재산인 시대극을 다시 주목하게 한 해”라고 지적했다.
2010년 다시 나타난 일련의 시대극들은 관객 구미에 맞게 적절히 조리된 게 특징이다. ‘일본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란 카피를 달고 나왔던 아오이 유우, 오카다 마사키 주연의 <번개나무>, 픽션이 많이 가미돼 거의 판타지에 가까운 미이케 다카시의 <13인의 자객>, 고산요모노라 불리는 회계 사무라이의 일상을 그린 <무사의 가계부> 등은 시대극은 무겁다는 선입견을 발랄한 아이디어로 돌파한 작품들이다. <13인의 자객>의 각본을 쓴 덴간 다이스케는 “역사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 점점 없어지는 지금, 시대극의 다양한 변주는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일본영화의 자산인 시대극을 2011년 대중의 입맛에 맞춰 제작할 필요가 있다는 거다. 반면 <최후의 충신장>은 60년대 일본영화의 맛을 충실히 살린 작품이다. 에도시대 최고의 충신이라 불리는 에코 낭사들의 전원 할복사건을 소재로 죽지 못하고 살아남은 두 충신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하급 사무라이의 사명을 밀도있게 그려냈다. 일본의 각본가 마루우치 도시하루는 “영화적인 흥분을 느낀 작품이다. <7인의 사무라이>보다 재밌었다”고 평했다.
새로운 영화 만들기는 2011년에도 계속된다
2010년 일본영화의 TV 의존은 여전했다. 방송사가 주축이 되어 기획을 꾸리고 홍보를 전개하는 방식은 이미 확고해진 일본영화의 흥행 공식이다. 하지만 빈틈도 발견됐다. 이벤트 무비 일색으로 도배된 일본 극장가에서 관객은 옥석을 가려냈다. 재미가 있는 작품은 성공했지만 원작, 시리즈, TV의 힘만 믿고 만들어진 영화들은 실패했다. 그리고 TV의 힘을 빌리지 않은 영화 두편이 나타났다. 도호는 엄청난 자본력으로 이벤트 무비를 연달아 제작함과 동시에 고개 돌린 관객을 잡을 준비에도 나섰다. <고백>과 <악인>의 등장은 도호의 향후 움직임을 가늠하는 중요한 작품이다. 그리고 일본 영화계는 대중의 트렌드를 포착해 새로운 청춘영화를 제시하기도, 일본영화의 전통 속에서 시대극을 다시 꺼내 콘텐츠를 다양화하기도 했다. 조금은 좁아진 TV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시도였다.
물론 부정적인 목소리도 있다. 도호의 독주 체제가 일본영화를 획일화한다는 거다. 올해 도호는 총 748억엔의 흥행수익을 기록하며 2008년 739억엔의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도호, 도에이, 쇼치쿠를 3대 메이저 배급사라 하지만 사실 근래 수년째 시장 양상은 도호의 1강 체제에 가까웠다. 하지만 2010년 그 우려의 도호 독주 체제에서 새로운 영화들이 등장했다. 가와무라 겡키 프로듀서는 <악인>과 <고백> 이후 “들어오는 기획의 내용이 달라졌다”고 했다. 다른 두 배급사도 약해진 이벤트 무비의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영화를 모색하고 나섰다. 발표된 3사의 2011년 라인업은 여전히 이벤트 무비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2010년과는 또 다른 시도도 보인다. 도호는 <고백>에 이어 다시 한번 ‘책방대상’ 수상작인 <노보우의 성>과 <신의 카르테>를 영화화하고, 쇼치쿠는 야마다 요지 감독 데뷔 50주년을 맞아 오즈 야스지로의 <도쿄 이야기>를 야마다 요지의 연출로 리메이크한다. 2010년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영화들을 일본 영화계가 어떻게 만회할지도 주목된다. 도호의 2010년 최대 기대작 두편인 <SPACE BATTLE SHIP 야마토>와 <노르웨이의 숲>은 각각 1월18일 현재 35억엔, 11억엔의 성적을 내는 데 그쳤다. 두 영화의 엄청난 마케팅 비용을 감안하면 제작비 회수도 장담하지 못할 수치다. 도호가 이 두편의 부진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예상외 성공과 예상 밖 실패. 2011년 일본영화는 시행착오 속에서 벌어지는 엎치락뒤치락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2011년 일본 영화계가 조금은 재밌어지기 시작했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