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현실 속 ‘악’의 리얼리티로 침투
2011-02-17
번역 : 정재혁
일본 현지에서 바라본 일본영화의 변화
<강바닥에서 안녕하세요>

2010년 일본의 극장 흥행수익은 2200억엔을 돌파해 역대 최고치를 기록할 전망이다. 활황으로 보이긴 하지만 이건 입장료가 비교적 높은 3D영화의 등장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일본은 최근 수년 자국영화의 점유율이 외화를 앞서며 ‘일본영화 부활’이라 말해왔지만 TV드라마나 인기 만화에서 출발한 안전한 기획이 넘치는 내실은 결코 호조라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난치병의 멜로드라마, 달콤한 로맨스, 뜨거운 우정, 게임의 오락성과 스릴을 내세운 모험극 등. 본래 방송국이 출자한 영화들은 ‘긍정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감동’을 제공하는 것이 많은데, 그 주축이 되는 영화사에서 이와는 정반대의 작품을 만든 것이다.

필두에는 영화사 도호가 제작한 <고백>과 <악인>이 있다. <고백>은 흥행수익 39억엔, <악인>은 19억엔을 기록해 연말연시 각종 영화상에서도 중심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방송국과 손잡고 탄탄한 히트작을 만들어온 도호가 강렬한 ‘악’에 대한 작품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엔 방송국이 배제돼 있다. 이는 대규모 경쟁 영화사는 물론 본래 이런 종류의 테마를 주특기로 해온 인디영화 제작사에도 큰 충격을 줬다.

마쓰 다카코 주연의 영화 <고백>은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이 원작, 쓰마부키 사토시와 후카쓰 에리가 주연한 <악인>은 요시다 슈이치의 베스트셀러가 원작이다. 유명한 원작+스타의 주연이라는 점은 최근의 히트 공식과 같지만 어두운 세계관, 예측할 수 없는 전개방식은 종래의 영화였다면 기피했을 것들이다. 하지만 두 영화의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요소’는 관객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영화 속 ‘악’이 실제 현실과 크게 다름없다는 사실은 큰 반향을 불렀다. 두 작품의 성공은 무난한 ‘TV적 엔터테인먼트’로 일관됐던 이전 대중영화에 대한 안티테제이기도 하다.

방송국과 손잡고 히트작 만들어온 도호의 모험

두 작품 모두 ‘악’을 그리고 있지만 접근방식은 전혀 다르다. 살인사건을 둘러싼 인간 군상을 그린 <악인>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 정공법의 휴먼드라마로 완성됐다. 반면 긴 독백으로 막을 여는 <고백>은 여교수의 복수를 철두철미하게 냉정한 시선으로 묘사한다. 이지메의 공포, 반동으로 인한 동조압력, ‘몬스터 페어런트’(monster-parent, 극성스런 부모들을 일컫는 말로 최근 일본에서 사회문제가 됐다)란 존재 등 현대 아이들을 둘러싼 현실이 숨막힐 정도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심지어 결말에서 영화는 이전까지의 이야기를 뿌리부터 뒤흔든다. 양식미에 공을 들인 영상을 두고 일부에선 ‘인간이 그려지지 않은 영화’란 비판도 있었지만, 손쉬운 방법을 피하고 회의를 거듭한 감독의 완고함은 관객과의 공감에 성공했다.

두 작품을 기획한 건 31살 사원급 프로듀서 가와무라 겡키다. 26살 때 처음으로 프로듀싱한 작품 <전차남>으로 37억엔을 벌었고, 컬트 인기만화가 원작인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를 히트시킨 신세대 기수다. 코믹하고 경쾌한 작품의 성공 이후 새로운 방향성을 찾던 그는 한국영화를 계기로 ‘악’에 끌리게 됐다. <살인의 추억>이나 <추격자>가 그린 인간의 불안과 악의 강렬한 묘사에 크게 자극을 받은 것이다. 안전한 기획을 하는 반면 리스크를 안고서라도 현실을 돌파하는 유연성은 도호의 강점이다. 그리고 최근 도호는 젊은 관객 증가를 목표로 계열 극장의 요금을 1500엔으로 내리겠다고 발표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놀랐다. 라이벌 회사에서는 간부가 “<고백> 같은 기획을 가지고 오라”고 부하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오고 있다. 당분간 도호의 1인 승자 체제는 계속될 듯하다.

<고백> <악인>에 이어 도호가 2010년 또 한편의 강렬한 ‘악’의 영화를 선보였다. 1963년 구도 에이치 감독의 도에이 시대극을 리메이크한 <13인의 자객>. 외부 프로덕션의 기획이 시작이었고 원작은 타사의 작품이라는 점, 인기 아이돌 SMAP의 이나가키 고로를 악역으로 캐스팅했다는 것 등 이 영화는 여러 면에서 획기적인 기획이었다. 무대는 에도 말기다. 장군의 배다른 형제라는 위치를 이용해 영주(이나가키 고로)는 죄없는 민중에 극악한 행동을 일삼는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노중이 가신의 무사(야쿠쇼 고지)에게 영주 암살 명령을 내린다. 기본적인 줄거리는 원작과 같지만 각본을 쓴 덴간 다이스케(고 이마무랴 쇼헤이 감독의 장남)는 영주의 인물상을 대범하게 변주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악독한 일을 행하는 폭군을 ‘일상에 싫증이 나 살아 있다는 실감을 느끼지 못하는 젊은이’, 즉 현대적인 악인으로 다시 만든 것이다. 이 냉혹한 사이코패스 영주를 이나가기가 훌륭하게 연기했다. 그중 자객의 습격으로 ‘생’(生 )을 처음으로 실감한 영주가 보이는 황홀한 표정은 관객을 압도한다.

어두운 세계관 그린 인디영화 수작도 다수

<히어로 쇼>

인디영화에 눈을 돌리면 더욱 황량한 불황의 일본 풍경이 퍼져 있다. <박치기>의 이즈쓰 가즈유키 감독은 직접 각본도 쓴 <히어로 쇼>(ヒーローショー)에서 현대 젊은이들 마음의 어둠을 예리하게 파고든다. 느긋해 보이는 타이틀에 ‘청춘★바이올렌스★엔터테인먼트’라는 카피, 젊은 개그맨이 주연이란 점은 응석 떠는 청춘 코미디를 연상케 하지만 내용은 실제 그렇지 않다. 여자를 쟁탈하는 것으로 시작된 ‘히어로 쇼’ 아르바이트에서 친구와 트러블이 일고, 보복 전투 끝에 장렬한 집단린치 살인사건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이즈쓰 감독은 이를 철저하게 리얼리즘으로 보여준다. <히어로 쇼>는 근래 실제로 일어난 부조리 흉포사건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이즈쓰 감독은 <가키체국>(ガキ帝國), <소년우연대>(岸和田少年愚連隊) 등에서 불량소년들의 항쟁을 그려왔는데 이번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불량하다 말할 수 없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젊은이들. 그들은 친구들과 놀 때에는 명랑하고 밝아 보이지만 권태감과 불안함을 항상 안고 있다. 그리고 마음속의 그런 요소가 이들을 과격한 폭력의 연쇄로 이끈다. 과거 작품에서 보인 성장기 아이들의 음성적인 생명력은 <히어로 쇼>에 없지만, 여기엔 시대를 반영한 살벌함 무력감이 영화 전편에 깔려 있다.

<아웃레이지>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아웃레이지>도 일본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한 작품이다. 폭력의 명수가 오랜만에 야쿠자영화로 회귀한 것이 화제가 됐지만 오히려 영화는 최근 내향적인 작품을 계속 만들어왔던 감독이 현실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배신과 의념이 소용돌이치는 야쿠자 항쟁극은 대의명분을 잃고 욕망에 매달리며, 항상 자기 보신에 힘쓰는 권력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전원악인’의 영화지만 이보다 더 인상적인 건 보스들의 추잡한 싸움은 무시한 채 두뇌 플레이로 맞서는 야쿠자(가세 료)와 야쿠자를 밥처럼 여기는 형사(고니하다 후미요)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시대가 낳은 악의 산물이다.

장기화되는 불황이 지역사회에 드리운 폐색감은 지난해 수작들에서 반복적으로 그려졌다. 부조리한 살인사건에 직면한 사람들의 모습을 지방도시의 황량한 풍경 속에서 그려낸 제제 다카히사의 4시간38분짜리 영화 <헤븐즈 스토리>(ヘヴンズストーリー), 기간산업인 조선소의 폐쇄로 점차 붕괴되어가는 마을의 모습을 섬세한 터치로 점묘한 구마기리 가즈요시의 <카이탄시의 스케치>(海炭市叙景), 실연 때문에 심각한 알코올 중독에 빠지는 대학생을 주인공으로 한 가네코 슈스케의 <바보>(ばかもの). 여기서 드러나는 지방 젊은이들의 고독과 갈증은 <악인>의 등장인물과도 겹친다. 침울한 터치의 작품이 많았던 가운데 눈에 띄는 영화는 이시이 유타카야 감독의 <강바닥에서 안녕하세요>(川の底からこんにちは). ‘중간 중에서도 하(下 )니까요’, ‘어쩔 수 없지’가 말버릇인 저가 안전 위주의 히로인(미쓰시마 히카리)이 고향에서 보여주는 의외의 열린 치유는 폐색에 갇힌 세상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현실과 마주한 수작이 많았던 인디영화계지만 승자, 패자의 격차가 벌어지는 멀티플렉스 시대에서 제작쪽 환경은 어렵다. 지난해 씨네콰논을 필두로 한 아트계 작품 배급사들의 도산에 이어, 역사가 긴 미니시어터들의 규모 축소와 폐점이 잇따르고 있다. 스크린 수는 늘었지만 도호 등의 메이저영화들이 90% 이상을 채우고 있고, 지방의 미니시어터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작품을 바꾸는 프로그램이 일상화돼 수익성이 저하되고 있다. 예전엔 5 대 5 정도였던 도쿄와 지방의 수익 비중이 이제는 7 대 3, 8 대 2로, 수도권 편중이 심해지고 있다. 필자는 지난해부터 도쿄를 떠나 고베에서 살고 있는데, ‘전국공개’라고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보지 못하는 영화들도 다수 있다.

하지만 블로그나 트위터의 입소문이 흥행을 만든 현상도 있었다. 영화제 등에서는 트위터의 감상 멘션이 의외의 관객 동원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미쓰시마 히카리가 부른 <바지락의 노래>(シジミの歌, 영화 <강바닥에서 안녕하세요>에서 여주인공이 불러 공장에 새 바람을 불고 온다)가 폐색 상태에 바람구멍을 열었듯이, 관객의 목소리가 새로운 길을 열기를 기대해본다.

글 : 후카쓰 준코/ 일본 영화 저널리스트·전 <아사히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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