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세한 영화 제작사들에 폐업을 권고한다. 제작사 간판만 걸고 자기 자본 없이 리스크는 책임지지 못한 채 높은 수익만 찾는 영화 제작사는 당연히 퇴출되어야 한다. 스스로 양질의 콘텐츠를 개발하고 보유할 수 있는 노하우와 자본이 되는 회사들이 산업을 주도해야 한다. 영화 인력을 무임금, 저임금으로 착취하다가 영화 한편이 우연히 성공해서 인생 역전하는 불량한 제작사가 퇴출되지 않고 있다면 누가 제대로 투자를 하겠는가. 그런 불량 제작사가 퇴출된다면 대기업도 제작사들을 신뢰할 것이고, 양질의 콘텐츠를 가진 영화 제작사들도 대기업과 공정한 수익 배분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영화 스탭이라고 밝힌 독자가 최근 <씨네21>에 보내온 글 중 일부다. 그는 최고은씨의 죽음과 관련하여 강우석 감독이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영화계 전반의 인력과잉”이 문제라고 한 발언을 두고, “시장의 활황기 동안 제작사들은 아무런 변화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 대기업이 가지지 못한 노하우를 갖춘 제작사가 있었다면 투자사에 제작사가 종속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한국영화가 벗어나지 못하는 열악한 생태계의 1차적 책임은 스탭들의 ‘인력과잉’에서 초래된 것이 아니라 제작사들의 난립에서 빚어진 것이라며, 그는 “악성 제작자들의 퇴출”을 주장했다.
한국영화가 벼랑 끝에 내몰렸다는 위기론 앞에서 잠시 가려졌던 영화계 내부의 갈등이 최고은씨의 죽음으로 다시 불거지고 있다. 스탭들은 10년 전과 비교해서 전혀 나아지지 않은 열악한 노동환경은 제작자들의 횡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수를 던지고, 제작자들은 일부 부도덕한 제작사들의 사례를 일반화하는 오류는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창작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산업시스템”에 대한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의 성명에 대해 한 영화인은 “하청업체밖에 안되는 제작자들을 탓하고 같이 한배를 탄 이들(투자자)을 탓하는 전근대적인 대립각”으로는 어떤 해결책도 마련되지 않는다는 반대 의견을 내놓는다. 꼬인 실타래,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까.
스탭의 실질적 대우, 2001년 대비 제자리걸음
지표를 놓고 볼 때, 스탭들의 처우가 과거에 비해 개선됐다고 말할 순 없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이하 영화노조),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이하 제협) 등으로 구성된 영화산업협력위원회가 2009년 12월에 펴낸 <영화스탭 근로환경실태조사>에 따르면 퍼스트급 이하 영화 스탭들의 연간 수입 평균은 623만원이다. 이는 최저임금위원회가 제시한 월 83만6천원(연 환산 시 1003만2천원)의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하다. 영화노조의 전신인 4부조수연합이 2004년에 조사한 퍼스트급 이하 스탭들의 평균 연봉 634만원보다 더 떨어졌다. 4대 보험 적용률도 미미하다. 업무상 재해 시 산재보험 처리율은 10.98%, 반면 9.58%는 개인이 비용을 감당했다.
2005년 영화노조의 출범, 2007년과 2008년 임금 및 단체협약(이하 임단협) 체결 등을 감안할 때, 스탭들의 처우가 5년 동안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스탭들과 제작사들이 부문별, 직급별 최저임금 기준을 정하고, 야간·초과 근로수당 지급 등에도 합의했지만 2009년 스탭들의 평균 연봉은 최소한의 보호장치조차 없었던 2004년에서 나아지지 않았다. 눈에 띄게 달라진 건 서면계약 체결 여부 정도다. 2001년 서면계약 작성은 10.3%에 불과했지만 2009년에는 64.57%로 크게 늘었다. 다시 말하면 형식적으로는 구색을 갖췄지만 실질적인 변화가 이뤄지진 않았다는 뜻이다.
임금수준이 그대로라면 촬영현장에서 감내해야 하는 노동강도는 줄었을까. 2009년 1일 평균 촬영시간은 13.52시간이다. 8시간 노동을 훌쩍 넘는 과도한 연장근무를 수행했지만 정작 초과근무수당을 받았다는 이는 400명의 설문대상자 중 1.6%(2004년 9.2%)에 불과하다. 노동조건이 악화됐지만 그에 걸맞은 보상을 받지 못했다. 2009년의 ‘영화 스탭 근로환경실태 조사’ 결과 중 충격적인 건 “임금체불 등의 피해를 당했을 때 감수하거나 포기한다”는 응답이 2004년의 66.9%보다 많은 79.9%라는 점이다. 영화노조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스탭들은 자신들의 권리 주장을 포기하고 있는가.
위기를 이유 삼은 불이익 심화
영화 노사가 맺은 임단협이 촬영현장에 적용된 시점은 2007년 7월이다. 이 시기는 기회인 동시에 질곡이었다. 한국영화 평균수익률은 -43%(2006년 -22.9%)로 곤두박질쳤고, 개봉작 112편 중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는 불과 13편에 불과했다. 투자배급사들은 수익률 관리를 위해 더이상 기획개발비와 경상비를 제작사에 제공하지 않았고, 메인투자 지분 또한 50%에서 30% 수준으로 낮추었다. 편수 급감은 우려만큼 크지 않았으나, 개봉영화의 31.3%가 총제작비 10억원 미만인 영화들로 채워졌다. 제작사 및 후반작업 업체들의 도산 및 폐업이 진행되는 동안 4천명 이상의 인력들이 대거 이탈했다.
임단협 적용으로 “인건비가 큰 폭으로 상승할 것”이라는 일련의 예상은 위기론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찌감치 어긋났다. 부가판권 시장이 몰락한 상황에서 수익률 개선을 위해선 일단 제작비부터 절감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됐지만, 투자배급사, 제작사, 스탭들이 생각하는 제작비 절감 폭과 방식에는 엄연히 이견이 존재했다. 결과적으로 위기는 힘의 논리를 관철시켰으며, 이는 스탭들의 희생을 전제하거나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단적으로, 임금체불 사례의 대다수는 투자배급사의 무리한 제작비 감소 요구, 투자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도 제작사의 촬영 돌입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럼에도 스탭들은 불만의 목소리를 높일 수 없었다. 고용기회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투자수익률이 2009년 -13.1%, 2010년 -8%(영진위 잠정 집계)로 점차 나아지고 있고, 2010년에는 21편의 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넘었지만 이를 청신호로만 수긍할 수는 없다. 같은 시기 한국영화 평균 총제작비는 21.6억원, “2001년 이래 최저치”다. 전체 개봉작 140편 중 총제작비 10억원 미만의 영화는 73편으로 무려 50%가 넘는다. “2008년 이후 영화 스탭들의 근로조건은 오히려 악화됐다. 제도를 만들어서 내밀면 뭐하나. 투자사가 도장을 찍어주지 않는데. 자본이 동의하지 않으면 그만인 상황이다.” 한 제작사 대표의 말이다. 한국영화 관객 수가 감소하는데도 한국영화 투자수익률이 호전될 수 있었던 건 스탭들의 희생이 담보됐기 때문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제작사도 억울하다…
누군가의 희생에는 그에 걸맞은, 적절한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 가능할까? 2007년, 2008년부터 시작된 한국영화산업의 위기는 그 이전 수차례 반복됐던 동요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기존 자본의 위기가 신규 자본에 기회로 작용했던, 이전 국면과는 판이하다. 콘텐츠 생산의 파트너로 협업하던 투자사와 제작사의 관계는 더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시나리오 개발부터 마케팅까지, 투자배급사가 제작시스템을 직접 관할하는 시스템이 됐고, 기존의 창작자들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다. 한 정책연구원은 “지난 시기 불량 제작자들만 쫓겨난 것은 아니다.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의지를 가진 제작자들도 상당수 도태됐다”고 말한다.
스탭들의 근로조건을 향상시키고, 합리적인 제작시스템을 안착하겠다는 뜻으로 제협과 영화노조가 노사 합의를 이뤄냈지만 ‘안정적인 수익률 확보’라는 자본의 절대명제 앞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구상’을 얼마간 공유하던 노동은 이제 ‘실행’만 떠맡게 됐다. 한 프로듀서는 “제협 회원사 중 1년에 1편 이상 내놓은 제작사가 얼마나 되는가. 영화노조 또한 조직 유지에 급급한 측면이 많았다. 노사간 협상 테이블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영화계의 현안들을 풀어내려고 했던 부분은 인정받아야 하지만 향후 현실적인 해결책 마련에 있어 힘이 부쳐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라고 말한다.
창작의 영역을 ‘빼앗긴’ 제작사와 노동의 몫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스탭들을 둘러싼 풍경은 여전히 잿빛이다. “제작사가 제대로 된 시나리오를 개발하기란 불가능하다. 아이템 개발에 있어 어떻게 하면 시나리오의 완성도를 높일까 고민하기보다 투자와 캐스팅을 받기 위해 500만원짜리 시나리오 초고를 쓸 수 있는 이들을 찾고 있다.” 콘텐츠 수급 업무를 맡고 있는 제작사 관계자의 말이다. 시나리오작가들 또한 제작사의 문을 두드리느니 “헐값이라도 투자배급사의 시나리오를 각색하는 일을 따기 위해 몰두하고 있다”. 한 제작사의 이사는 “이런 상황에서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개발하는 일은 요원하다”고 푸념한다.
“투자배급사들은 그동안 산업화를 위해 제작사들에 명확한 일처리를 요구했다. 지난 시기 우린 그 요구를 받아 수천장에 가까운 영수증을 첨부했다. 하지만 정작 투자배급사가 내주는 정산서는 A4 1장일 때가 많다. 최종액만 달랑 적어서 보내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 마케팅비 예산을 어떻게 딱 20억원에 맞추는지도 신기하다. 내역을 보여달라고 하면 그걸 왜 보여줘야 하느냐고 한다. 수익 분배가 제대로 이뤄졌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때도 있다. 2차 판권의 경우 한참을 따져서 6개월 뒤에 수익을 분배받는 일도 있다.” 한국영화의 불합리가 투자배급사의 횡포 때문이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다면서도 한 제작자가 털어놓은 불만이다.
책임공방보다 중요한 것
투자배급사도 물론 할 말은 있다. CJ 관계자는 “투자배급사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투자배급사는 계약 당사자도 아니다. 노동을 제공하는 이들이 최저생계비도 받지 못하는 현실은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투자배급사만이 책임지거나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기획개발비 지급 중단과 관련해서도 “10년 전에 프로듀서의 기능이 중요했지만 산업화의 과도기인 지금은 스타 감독, 스타 배우들을 시장과 관객이 원한다”면서 “자본금 150억원인 회사가 한때 누적적자가 1500억원에 달했다. 회사 문을 닫아야 하는데도 산업에 대한 의지 때문에 버텼다는 점을 좀 알아달라”고 덧붙였다. 제작비 절감은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는 해명이다.
현 국면에서 책임 공방이 중요한 건 아니다. 그보다 4년 전 만들었던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으로서의 임단협 준수가 시급하다. 영화노조 홍태화 조직국장은 “지난해 개봉작 중 임단협을 준수한 촬영현장은 불과 한곳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영화를 개봉한 제작사들이 제협 소속사들이 아닌 신생 제작사들이 대부분인데다 기존 제작사들도 도급 형태로 신생 제작사에 제작을 떠넘기는 식으로 임단협 적용을 회피하고 있다. 한편, 정(政)의 역할도 필요하다. 공적 지원이 능사일 수 없으나 공적 역할은 절실하다. 문화체육관광부, 영진위 등 공적 기관들은 그동안 책임을 방관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흔히 공적 지원이라고 하면 실업부조금 제도의 실행만을 떠올리는데 그것만은 아니다. 현재 영화노조는 제협과 함께 스탭 표준계약서 개발, 4대보험 의무가입, 기획개발비 확충 방안, 현장 인력 전문화를 위한 교육 등도 준비하거나 진행 중이다.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이 2월15일 개최한 ‘한국 영화예술계 창작환경 개선을 위한 간담회’에서 문화체육관광부의 한 관계자는 “상생 구조를 위한 협의체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약속은 행하지 않으면 거짓이 된다. 수익률 개선이 합리적인 시스템의 필요충분조건일 순 없다. 창작 주체의 잠재력을 신뢰하지 않고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느 산업이 플러스 성적표를 기대할 수 있을까. 제작비 수준이 말해주듯이, 2011년의 한국영화는 2001년의 과거로 돌아갔다. 과거에 품었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무엇부터 해야 할지 되물을 때다. 한배를 탔다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누군가의 배고픔은 외면해선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