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영화를 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재학 당시, 영화 대신 연극 작업에 빠져 있던 정정훈 촬영감독이 영화에 빠져 있던 학과 선배들한테 가장 많이 들었던 잔소리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정반대가 됐다. 정정훈 촬영감독은 데뷔작 <유리>(1996)를 시작으로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 <박쥐>(2009), <부당거래>(2010) 등 지금까지 꾸준히 촬영감독으로서 작업하고 있는 반면 그때 그에게 잔소리했던 선배들 중 지금 충무로에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 촬영감독은 학창 시절에 했던 연극 작업이 지금 현장에서 작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연극은 사회, 정치, 역사, 철학 등 인문학을 많이 거론하는 작업이다. 이야기와 인물, 배경을 분석하다 보면 무대 위에서 캐릭터가 움직여야 하는 동선이 보이고, 극에 쓰이는 음악을 집중해서 듣다 보면 이야기와 관련한 여러 감성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게 촬영감독이 현장에서 하는 일이잖나.” 그럼에도 정 촬영감독은 학창 시절 인문학 관련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말한다. “한편, 한편 촬영하면서 느끼는 게 좋은 촬영감독은 이야기를 잘 분석할 줄 알아야 하고, 인물의 심리를 이야기에 맞게 효과적으로 잘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어차피 앵글이나 노출과 같은 기술적인 부분은 (다른 촬영감독들을) 흉내내면서 출발하는 거니까…. 요즘 영화과 친구들은 그걸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러면서 그는 얼마 전 겪은 일화 하나를 들려줬다. “영화과 출신 후배들과 함께 최근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영화를 보러 갔다. 상영이 끝난 뒤 후배들에게 어땠냐고 물어보자 다들 ‘영화의 앵글이나 조명이 어땠다’ 하는 말만 하더라. 정작 내가 그들에게 궁금했던 건 극중 인물들 사이에서 오가는 감정에 관한 것이었는데…. 충무로에서 영화과 출신들과 일하다 보면 답답한 마음이 들 때가 종종 있다.” 그러니까 정정훈 촬영감독은 지금 영화과 신입생들에게 “시간적 여유가 비교적 많은 학창 시절에 영화에 빠져 있기보다 문학과 인문학을 공부하라”고 조언했다.
기술적인 부분은 흉내내면서 출발하면 돼
단편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 <조금만 더 가까이>(2010) 등을 연출한 김종관 감독의 생각 역시 정 촬영감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예대 출신인 그가 생각하는 영화는 “문학, 미술, 음악 등 예술적인 경험을 통해 얻은 소양과 살면서 직간접적으로 겪은 경험이 맞물리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화과 학생들이 ‘(영화를) 만드는 행위’만 신경 쓰는 게 다소 아쉽다고. 그럼에도 김종관 감독은 “일단 많이 만들어보라”고 말한다. “학교 다닐 때가 가장 거만할 때다. 사회에 나가면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한다. (웃음) 그 점에서 (영화) 공부는 실패하면서 배우고, 자기 것을 찾아가는 거다.” 그는 영화과 신입생들에게 ‘실패’라는 경험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나이가 들면서 깨달은 건데, 성공한 감독한테서 배울 수 있는 점도 많지만 실패한 감독한테서 느낄 수 있는 점도 많다. 이런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면 한다. 무엇보다 실패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은하해방전선>(2007), 인디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2010) 등을 연출한 윤성호 감독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내가 영상원(전문사)에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충무로는 산업으로서의 영화와 예술로서의 영화의 공존이 가능한 시기였다. 그 점에서 산업이 수직 계열화된 지금과 확실히 달랐다”면서 “요즘 영화과 신입생들이 소설을 비롯한 책을 읽지 않는 것은 탄식할 일이라기보다 요즘 세대가 생각하는 영화와 우리 세대가 생각했던 영화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다만 윤성호 감독은 두 가지를 언급했다. “먼저 영화라는 매체는 기본적으로 ‘서사’에 관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소설을 읽지 않고 서사를 만드는 행위를 한다는 건…. 또 영화 전공자라고 해서 영화를 많이 봐야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전공자가 아닌 시네필이 영화를 더 많이 보는 경우가 있다. 영화 보는 횟수는 어디까지나 개인차인 것 같다.”
각 학교 영화과 교수들의 생각도 위의 세 사람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특히 신입생에게 영화를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를 강조했다. 명지대학교 영화뮤지컬학부 김영진 교수는 “영화과가 가진 유일한 장점이라면 영화를 찍어볼 수 있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과 함께 생각을 나눌 수 있다는 것. 그런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했고,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유지나 교수는 “따분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장 뤽 고다르를 모르고 어떻게 영화를 하나. 영화 매체의 개념을 바꿔놓은 사람인데…. 영화는 물론이고 어떤 학문이든지 기본을 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좀더 구체적인 조언을 한 교수도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오명훈 교수는 영화가 아닌 다른 예술 활동을 경험해볼 것을 권했다. “어떤 숏을 어떤 위치에서 찍는가 하는 문제는 기술적인 부분이 아니다. 그건 취향의 문제다. 취향이라는 건 영화를 많이 본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소설과 미술, 음악, 사회적인 경험 등 다양한 분야를 접하면서 형성되는 거다. 그 점에서 신입생들은 직접 소설도 써보고, 연극무대에도 올려봤으면 한다.” 건국대학교 영화과 송기형 교수는 “사실 한국 중·고등학교 교육환경에서 다양한 영화를 접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면서 “어쨌거나 시간적인 여유가 많은 신입생은 하루에 한편, 일주일에 한번은 시네마테크에 가서 영화를 보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문학, 인문학 등 다양한 예술 활동 접해야
이 밖에 교육의 중요성을 언급한 교수도 있다. 경희대학교 연극영화과 이효인 교수는 “대부분 영화과가 취하고 있는 실기 위주의 교육이 크게 수정되어야 한다”면서 “물론 영화 제작에 대한 여러 이론과 기술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로는 (제작 수업이) 과도하게 강조되고 있다. 이제는 영화에 대해 생각하고 토론하는 습관을 다시 기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세종대학교 영화예술학과 최두영 교수는 영화를 가르치는 교수들도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미장센을 가르치는 수업이었는데 5분짜리 롱테이크 롱숏을 찍고 있더라. 미장센이라는 게 ‘숏의 의미’이지 롱테이크가 아니잖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학생들이 그렇게 배우고 있으니… 참. 교수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쳤으면 한다.”
어쨌거나 과거에 비해 현재의 영화과 신입생이 영화를 적게 본다고, 좀더 현실적인 고민을 한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모르면 하나씩 알아가면 되고, 공부하면서 영화의 또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가면 된다. 시작이 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