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새로 발견해야 할 이름 박노식. 한국영상자료원에서 6월19일까지 계속되는 기획전 ‘발굴, 복원 그리고 초기영화로의 초대’의 ‘복원전’에서는 ‘감독 박노식’의 면모가 드러난다. 테크니스코프 복원작 <집행유예>를 비롯해 <육군사관학교>, <하얀 수염>, <왜?>, <광녀>, <폭력은 없다>, <방범대원 용팔이> 등 박노식 감독의 영화 7편이 상영될 이 섹션을 두고 한국영상자료원쪽은 “감히 한국영화사의 새로운 장을 열 것”이라 단언한다. 이에 한국 액션영화에 대한 혈기 왕성한 탐식가 오승욱 감독이 박노식에 대한 글을 보내왔다. 거친 배우 시절부터 불균질한 매력으로 넘쳐나던 감독 시기까지, 그의 진면모를 훑는다. 한편 이번 복원전의 부대행사로 6월5일(일) 오후 6시에는 <집행유예> 상영과 함께 오승욱 감독의 해설이 이어지며, 6월12일(일) 오후 6시에는 <광녀> 상영 뒤 류승완 감독과 본지 주성철 기자의 대담이 펼쳐진다. 1970년대 자신만의 넘쳐나는 열정으로 액션영화를 찍었던 박노식 감독을 재발견하는 즐겁고도 놀라운 시간이 될 것이다.
초등학생 때 학교를 오가며 보았던, 콜타르를 먹인 시커먼 판자벽에 붙어 있던 영화 포스터들로부터 박노식에 대한 나의 기억은 시작된다. 매처럼 부리부리한 두눈을 치켜뜨고 포스터 밖을 노려보는 사나이. 그 사나이가 출연하는 영화의 제목과 포스터의 인상은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지 기억날 정도로 기괴했었다. 커다란 붓글씨로 박력 넘치게 휘갈겨 쓴 <왜?>라는 제목, 쇠고랑을 찬 두손을 높이 쳐들고 그가 분노에 찬 눈으로 누군가를 노려보는 <집행유예>. 집행유예란 영화의 제목이 하도 인상적이어서 나는 어머니에게 집행유예의 뜻을 물어보기까지 했고, 중학생이 되어 아침마다 법정에 출두하는 수인들의 행렬을 교실 창문 너머로 바라보면서 나의 머릿속에는 <집행유예> 영화 포스터가 어른거렸다.
지금은 40대에 접어든 그의 아들 박준규가 어린이였을 무렵. 아버지와 함께 우유 광고에 출연한 박준규의 머리를 박노식이 쓰다듬으며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하던 장면도 기억이 난다. 내 어린 시절 박노식은 용팔이였고, 용팔이란 이름의 폭력배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 이전까지 용팔이는 의리의 사나이였다. 그리고 나의 기억과는 다른 기억이 하나 있다. 내 또래 친구의 초등학생 때 기억 속 박노식은 아버지의 강퍅한 평안도 사투리에서 시작된다. 1970년대 중반, 친구의 아버지는 텔레비전에서 박노식이 나오기만 하면 “저 전라도 놈!” 하며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냈다고 한다. 박노식은 지역감정의 증오에 찬 친구 아버지의 시선 속 전라도 출신 영화배우였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50년대 중·후반 영화계에 데뷔한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있었다. 장동휘, 박노식, 허장강, 독고성, 이대엽 등등. 그들 중 신성일을 제외하고는 모두 80년대의 벽을 넘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 중 박노식은 숨막히는 악의를 발산하는 악역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 남성들의 고단함을 제대로 표현한 서민배우로, 거침없이 주먹을 휘둘러대는 액션배우로, 70년대 중반까지 기괴하고 불균질한 액션영화를 만들었던 감독으로 거침없이 활력을 쏟아내던 사람이었다. 박노식을 절대적으로 좋아하는 한국 배우라 말하고 다니는 영화광의 입을 빌려 부족하나마 그의 약전(略傳)을 기록한다. 하지만 주의하시라. 무릇 영화광이란 쓸데없는 말을 잘도 지껄이는 자들임을.
멜로배우에서 액션배우로 거듭나기까지
1940년대 초. 전남 여수의 신작로를 아직 솜털이 가시지 않은 뽀얀 얼굴의 10대 소년이 머리에 나까오리라 불리는 하얀 중절모를 쓰고 하얀 양복을 위아래로 빼입고 백구두까지 신고 으스대며 걸어간다. 길가의 어른들이 소년의 이런 모습을 그냥 보고 지나칠 리 없다. 손가락질을 해대며 “저놈 봐라. 학생이 나까오리까지 잡숩고, 건방진 놈이시.” “저 놈 허세가 보통이 아니네.” “저놈 뻥 좀 봐라. 저놈이 쓴 건 나까오리가 아니라 뻥까오리여.” 소년의 허세를 보고 어른들이 질책하자 소년은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남이사. 전봇대로 이를 쑤시든 뭔 상관이여” 하며 자신을 비웃으며 붙여진 뻥까오리에, ‘내가 하얀 양복을 입고 다니니 백작’이라며 둘을 합쳐 스스로 ‘뻥까오리 백작’이라고 좋아한다.
이 모양내기 좋아하고 허세가 보통이 아니었던 소년은 해방과 여순사건, 한국전쟁의 풍파에서 살아남고, 여수에 공연 온 악극단의 연극을 보고 반하여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다. 청년 박노식은 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피아골>의 이강천 감독이 그가 악극단에서 하는 연기를 보고 자신의 영화에 출연을 제의한 것. 이강천 감독의 전쟁영화 <격퇴>(1956)로 그는 영화에 데뷔한다. 몇편의 영화에 출연을 하고 인기가 오르자 새내기 배우 박노식의 마음속에 불만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가 이름을 얻게 된 영화들이 멜로영화였기 때문이다. 그는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권투와 운동으로 다져진 젊은 육체를 속시원하게 써먹을 수 있는 액션영화에 출연하고 싶었다. 그는 당시 최고의 액션영화 감독 정창화에게 매달렸다.
박노식을 멜로영화 배우라 생각했던 정창화 감독은 처음에는 썩 내켜하지 않다가 그가 하도 매달리니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에서 황해의 부하, 즉 단역으로 출연하라고 한다. 멜로영화에서는 주연급이었기에 마음이 상했지만, 그는 주인공 황해를 배신하고 탈출하는 2분짜리 격투장면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소년 시절 뻥까오리 백작이라 놀림을 받았던 그 차림 그대로 촬영장에 나타났다. 온통 하얀색 의상에 하얀 장갑까지 낀 그를 보고 정창화 감독은 촬영하면 그 하얀 옷 다 버릴 텐데, 했지만 그는 황해에게 온 힘을 다해 얻어맞는다. 맞고 일어나서 맞고, 또 맞고. 너무나 치열하게 얻어맞아, 원래 예정했던 영화 속 러닝타임 2분을 오버해서 약 10분 분량으로 감독에게 오케이 사인을 받아냈고, 액션배우로 거듭나게 됐다. 멜로배우의 딱지를 떼어버린 박노식은 무시무시한 악역배우로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데, 신상옥의 <벙어리 삼룡>(1964)에서는 벙어리 김진규와 최은희를 학대하는 방탕한 부잣집 아들로, 장일호의 <석가모니>(1964)에서는 싯다르타로 출연한 신영균을 질투하여 괴롭히는 동생으로 출연하여 악의를 마음껏 발산한다. 그뿐이 아니었다. 신경균의 <마도로스 박>(1964), 임원식의 <배신자 샹하이 박>(1965)에 출연하여 마도로스 박 또는 샹하이 박이라 불리는 선원 복장에 파이프 담배를 물고 주먹을 휘두르는 의리의 뱃사나이가 되어 액션배우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카인의 후예>로 대종상 남우조연상 수상
1968년 4월22일 새벽 1시. 대구의 금호 관광호텔 나이트클럽에서 폭행사건이 일어났다. 영화배우 박노식이 술을 마시고 춤을 추다 넘어져 호텔 깡패가 자신을 때렸다고 생트집을 잡아 호텔의 기물을 부수는 난동을 부렸다는 것이다. 액션영화 배우로 이름을 날리는 동시에 크고 작은 폭행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박노식이 또 폭행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며칠 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유현목의 <카인의 후예>(1968)에 출연하고 있던 박노식과 김진규, 장동휘가 그날의 촬영을 끝내고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었다. 10년차 배우 박노식은 좋은 작품이라 생각했던 유현목의 <김약국의 딸들>(1963), 신상옥의 <벙어리 삼룡>(1964) 같은 작품들에서 항상 악역이거나 성격 있는 조연이었다. 그는 아쉬웠다. 이번에 촬영하는 <카인의 후예>는 김진규가 주연이고, 장동휘와 자신이 조연이긴 했지만 자신이 맡은 역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출연했던 그 어떤 영화보다도 연기에 욕심이 났고 대종상을 타고 싶었다.
술에 취한 김에 그는 술자리를 얼어붙게 만들어버릴 말을 내뱉고 만다. “두 형님들 날 싸가지없는 놈이라 욕하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보시오 잉” 하고는 박노식은 부리부리한 눈을 들어 김진규와 장동휘를 노려본다. “이번 대종상은 나가 꼭 타야 쓰것는디, 형님들이 양보하쇼. 그리고 형님들이 암만 몸부림쳐도 말입니다잉. 이 영화에서 역할로 보나 비중으로 보나 나의 연기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잉. 아예 단념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런 천하의 당돌한 말이 어디 있는가? 점잖은 선배 김진규는 태연하게 알았다며 받아 넘겼지만, 천하의 장동휘가 어떤 사람인가? 이따위로 막가는 후배를 그냥 보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 박노식의 성격이 불같다면 장동휘는 활화산이다. 장동휘 왈. “그래 너 혼자 다 해먹어라. 이 싸가지없는 새끼야!!” “타라면 누가 못 탈까봐 그러십니까? 그런데 이렇게 큰 놈의 새끼 보셨습니까? ” 박노식이 이왕 저지른 것 끝까지 간다며 대드는 순간, 장동휘는 자기 앞에 놓여 있던 술병을 들어 박노식의 머리에 내리친다. 선혈이 흐르고 술집은 아수라장이 된다.
천한 머슴으로 일생을 살아온 하얀 백발의 머슴 도섭 영감(박노식)은 이렇게 세상이 바뀔 줄 몰랐다. 붉은 완장을 차고 세상을 호령하고 부자 놈들을 무릎 꿇게 하다니.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비록 천한 머슴의 딸이지만 너무도 아름답고 현명한 문희는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광기에 차서 날뛰는 아버지 도섭 영감에게서 돌아서버린다. 딸이 변한 것이 김진규 때문이라 생각하고 그를 증오하고 질투하는 박노식은 자신에게 친절했던 옛 상전의 아들이자 딸이 사랑하는 남자이며 무산자 계급의 적이라 증오해야 하는 김진규와 땀과 흙범벅이 되어 싸움을 한다. 늙었지만 힘이 장사인 그는 마지막 순간 김진규를 죽이지 못하고(죄의식 때문일까?) 그가 가진 모든 힘을 한순간에 소진해버리고 고목나무처럼 풀썩 쓰러져버린다. 폭력사건으로 그의 이름에 금이 가긴 했지만 박노식의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카인의 후예>에서 도섭 영감으로 출연한 박노식은 그해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한다. 폭발하는 에너지와 광기를 제대로 표현해낸 것이다.
60년대 한국 서민 남성의 고단함 대변한 용팔이 캐릭터
60년대 후반. 이제 박노식은 거칠 것이 없다.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미남배우들 옆에서 성격배우로 남아 만년 조역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박노식은 날기 시작한다. “나가 전라도에서 올라온 용팔인데 말이시 서울 종로 바닥에서 제일 쎈 놈이 뉘기여!” 김효천의 <팔도 사나이>(1969)에서 하얀 한복 바지저고리에 도리구치를 눌러 쓰고 전라도에서 올라온 사나이 박노식은 김두한 역의 장동휘에게 한방에 나가떨어지지만, 관객의 머릿속에는 전국 팔도에서 모인 주먹깨나 쓴다는 사나이 중,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 쓰고 껄떡거리는 용팔이가 남았다. 데뷔 초기 전라도 사투리의 억양 때문에 녹음실에서 얼마나 수모를 받았던가. 당시 주연급 배우들이 성우의 목소리를 빌려 자신의 캐릭터를 구축할 때 박노식은 끝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고집하여 더빙을 했다. 그런 그가 이제 영화에서 마음껏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해도 되는 용팔이라는 캐릭터를 만난 것이다.
이듬해, <팔도 사나이>의 속편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주연은 김두한 역의 장동휘가 아니다. 김두한의 이야기도 아니다. 전편의 조연이었던 용팔이가 주인공인, 편거영의 전혀 다른 영화 <돌아온 팔도 사나이>(1969)가 탄생한다. 1960년대 말 서울, 용팔이 박노식은 주먹으로 살았던 과거를 뉘우치고, 꽃처럼 아름다운 아내 사미자와 이룬 가정을 위해 날품팔이일지언정 땀을 흘려 일하는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한다. 그러나 주먹으로 남을 위협해서 먹고살았던 과거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 예전에 그가 몸담았던 깡패 조직은 그를 유혹한다. 그러나 용팔이 박노식은 땀 흘려 일해서 번 돈으로 꽁치 두어 마리를 사서 연탄불에 구워 아내와 함께 먹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달았다. 그런 용팔이를 깡패 조직은 용납하지 않고 간악한 흉계를 꾸민다. 용팔이의 아내 사미자를 겁탈하고 그의 가정을 박살내는 것이다.
한편, 오늘도 용팔이는 동대문시장에서 지게를 등에 지고 날품팔이를 한다. 오늘은 공치나보다 하고 풀이 죽어 있는데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용팔이를 불러 사과 두 상자를 배달시킨다. 평소 받는 돈보다 두어배의 웃돈을 쥐어주며. 동대문시장에서 사과 두 상자를 배달해야 할 곳은 저기 광화문을 지나, 아현동 고개를 넘어 신촌 로터리의 서강대학교의 여교수님 연구실이다. 지게에 사과 두 상자를 짊어진 용팔이는 동대문에서부터 걷기 시작한다. “아이고 솔찮이 힘든데 말이시…” 하며 목에 걸친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아현동 고개를 오르는 용팔이. 그 시간. 깡패들은 용팔이의 아내 사미자를 납치하여 골방에 가두고 강간하려 한다. 용팔이는 그 사실을 모르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서강대학교에 도착하는데. 이미 해는 지고, 사과 두 상자를 받아야 할 여교수님은 퇴근을 하셨단다. “아이고 이거 어쩌면 좋을까잉 그러면 여교수님 댁이 어딘가요잉.” 수위 왈. “여교수님 집은 저기 광나루를 건너 천호동….” 용팔이는 사과 두 상자를 고쳐 메고 신촌에서 광나루 건너에 있는 천호동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그의 땀에 젖은 어깨 위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는다.
과거의 주먹을 숨기고, 가정을 위해 굽신거리며 비굴한 성실함으로 살아야 하는 사내. ‘비굴한 성실함’ 그것은 조국 근대화를 위해 소모된 대한민국 남성들의 트라우마다. 종로 깡패 김두한의 주먹깨나 쓰는 부하 중 하나였던 용팔이 캐릭터는 새마을운동과 조국 근대화로 인해 소모되는 60년대의 한국 빈민 남성의 애환을 표현하는 캐릭터로 새롭게 탄생한다. 전라도에서 서울로 무작정 상경한 젊은 사나이의 애환을 그린 짝퉁 용팔이 시리즈 <맨발로 올라왔다> <맨주먹으로 올라왔다>까지, 70년대 초 극장가는 용팔이 세상이었다.
<인간사표를 써라>로 감독 데뷔
눈이 내리는 명동의 밤거리에 회한이 담긴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어깨를 움츠린 사내가 들어선다. 그는 깡패였던 과거를 씻고 새로운 조국의 일원이 되고자 사랑하는 아내와 가정을 꾸리려다 과거의 행적에 발목이 잡혀 한팔을 잃고 명동 거리에서 쫓겨났었다. 사랑하는 아내 문희와 전쟁 뒤 깡통을 들고 명동 거리를 헤매던 자신을 구해준 의붓아버지이자 깡패 두목인 장동휘를 파멸시킨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내는 원한의 거리, 명동에 들어선 것이다. 종로와 명동의 깡패들 이야기를 다룬 신화의 세계. 한국 깡패영화 중 빛나는 한편의 영화인 임권택의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1971)의 첫 장면이다.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쏟아져 나온 한국 깡패영화에 대해 박노식을 빼고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는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려다 과거의 죄에 발목이 잡힌 깡패영화의 전형적인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1971년 서울 무교동의 광성실업 20층 빌딩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구경거리다. 구경꾼들의 시선은 빌딩의 20층 벽에 쇠줄을 잡고 매달린 사내를 향하고 있다. 안전장치 하나없이 쇠사슬을 붙잡고 빌딩 벽에 매달린 사내. 박노식이다. 구경꾼들 틈에서 조명부들이 반사판을 들고 박노식을 비추고 있다. 반사판에는 “박노식 감독, 제작, 주연. 인간사표를 써라”라고 쓰여 있다. 박노식이 영화감독을? 이 전해에 경관 폭행 사건으로 구류를 살았던 배우 박노식은 구치소 안에서 수많은 생각을 했다. “인간사표를 쓰고 인간답지 않은 벌레 같은 삶을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백번 드는 것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이 엉뚱한 곳으로 발전했는데 그것은 “나도 내 영화를 만들고 싶다”였다.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 주연, 제작을 한 그의 첫 번째 영화 <인간사표를 써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에서는 처음 보는 기괴한 액션영화였다. 영화가 시작되면 고대 원시인 같은 복장의 사내들이 등장하고 일본인, 중국인, 그리고 조선인들이 이상한 제의를 한다. 굳이 따지자면 1930년대의 북만주 어느 곳인 것 같지만, 다음 신의 배경은 1970년대의 서울이다. 북만주에서 사랑하는 의형제 김희라를 악당 허장강의 음모로 잃은 박노식은 복수를 결심하고 허장강을 찾아 1970년 서울의 무교동 어느 빌딩으로 온 것이다. 김희라의 아내를 찾아가 그의 죽음을 전하려는데 김희라의 아름다운 아내 김지미는 장님이었고, 그녀는 자신의 남편 김희라가 돌아온 것이라 오해하고 박노식을 껴안고 오열한다. 사나이 박노식. 의형제의 아내 김지미 앞에서 차마 김희라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김희라 행세를 하며 영화는 진행된다. 무국적. 시대 무시. 훼손된 신체를 복원시키려는 과잉된 열망으로 충만한 비극적인 라스트. 당시에는 대단한 볼거리라고 여겨질 만한 카 체이스. 과거 뻥까오리 백작이라 놀림 받았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연상되는, 17세기 유럽 귀족들이 입었을 것 같은 이상한 취미의 의상들. 이 모든 과잉이 범벅된 영화가 <인간사표를 써라>였다.
하드보일드 액션영화와 서민적 미담극 사이
그 뒤 박노식은 총 14편의 영화를 주연·감독한다. 그의 영화들은 뚜렷하게 두 가지 성향으로 나뉜다. 하나는 마카로니 웨스턴에서 영향받은 잔혹함과 할리우드 액션영화를 따라잡고 싶은 열망, 일본 B급 액션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기괴함이 뒤범벅되어 있는 냉혹한 하드보일드 취향의 액션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에서 박노식은 항상 파마를 한 곱슬머리에 찰스 브론슨과 비슷한 콧수염을 기르고 전라도 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는 냉혹한 복수자의 캐릭터를 연기한다. <인간사표를 써라>를 비롯해 <쟉크를 채워라>(1972), <나>(1971), <집행유예>(1973), <일생>(1974), <왜?>(1974), <광녀>(1975),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1976)가 그것이다. 이 영화들은 대개 만주에서 음모와 배신, 죽음으로 시작해 현재의 서울 어느 곳으로 옮겨져 복수극으로 진행된다. 이 영화들에서 줄기차게 이야기되는 것은 짝패, 도플갱어들 사이의 갈등과 훼손된 신체를 복원시키려는 과대망상이다. <인간사표를 써라>에서는 죽은 동생의 눈먼 아내 김지미를 위해 동생 행세를 하고, 심지어 자신의 눈을 주려고 한다. <쟉크를 채워라>에서는 이복동생 신성일과 서로 한 핏줄인 것을 모른 채 앙숙이 되어 대결하고, <집행유예>에서도 예외없이 주인공은 죄의 대가로 눈이 멀고, <광녀>에서는 곱슬머리 가발을 벗어 화상을 입고 민대머리가 된 머리를 드러내며 원한을 호소한다.
다른 하나는 용팔이 캐릭터를 가져온 서민 인정 미담극이다. <하얀 수염>(1974), <폭력은 없다>(1975), <방범대원 용팔이>(1976), <돌아온 용팔이>(1983)가 그렇다. <하얀 수염>은 <카인의 후예>의 도섭 영감의 외모를 그대로 가져와 자식들에게 버림받는 노인의 이야기를 다뤘고, <돌아온 용팔이>에서는 쉴새없이 떠벌리는 방범대원 용팔이가 왕년 최고의 주먹이었지만 교도소 출소 뒤 새 사람이 된 용구 형님 황해를 모시고 그들의 의붓딸 서미경의 행복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여기서도 그의 도플갱어 애호 취미가 드러나는데 사랑받는 간호사 서미경의 쌍둥이 동생 소매치기 서미경이 등장하여 갈등을 만든다. 연기에 대한 욕심 때문에 선배 장동휘와 술집에서 싸움까지 했던 박노식이니 연출에 대한 욕심도 남달랐겠지만 그의 작품들은 너무나 조악하다. <쟉크를 채워라>를 보면 전 신에서 영화와 관계된 대사가 나오면 다음 신에서 박노식이 침대에 누워 일본 영화잡지 <스크린>을 보고 있다. 마치 끝말잇기, 말장난 같은 유아적인 신 전환 방법이어서 실소를 머금게 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광녀>의 라스트. 아무리 복수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지만 집단 강간으로 악녀에게 복수를 하는 장면은 눈뜨고 보기에 괴롭다. 영화를 많이 보고 열심히 공부한 것은 알겠는데, 표현을 위해 가장 중요한 기본을 무시한 조악한 연출이다.
그러나 <왜?>에 이르러서는 조악함이 많이 사라지고 좀더 영화적인 연출을 한다. 과거 팔도 사나이 시리즈에서 만들어진 캐릭터. 전라도 사나이 의리의 용팔이가 자신의 똘마니 용칠이 장혁을 데리고 일본에 오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타이틀 시퀀스가 지나고, 일본 야쿠자들이 좌우로 도열한 가운데 콧수염을 기른 한 사내가 서 있다. 앗! 저 사내는! 또 다른 박노식이 서 있다. 일인이역. 일본 야쿠자 두목 박노식이다. 박노식의 첫 번째 영화부터 줄기차게 나오는 파마를 한 곱슬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캐릭터 박노식이다. 라스트. 전라도 용팔이와 하드보일드 캐릭터 악당 박노식이 영화속에서 처음으로 대면하자마자 두 주인공은 박장대소한다. 두 명의 박노식과 주변인물들도 모두 박장대소 한다. 참 유쾌한 장면이다. 인간 박노식의 분열된 자아. 인정 많고 의리에 살고 죽는 구수한 전라도 사나이 박노식과 하드보일드 영화의 심각한 악당 박노식이 서로를 보고 비웃는 것이다. <왜?>와 <집행유예>에 이르면 박노식표 영화가 볼 만한 영화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왕년의 액션배우 쓰러지다
허세 가득한 뻥까오리 백작, 영화인 납세자 리스트 상위 5위 안에 드는 부자이면서 가난한 자들의 애환을 슬퍼하고 불같은 성격에 굽힐 줄 모르는 마초 용팔이, 인간의 불건전한 악몽을 줄기차게 이야기하는 예술가가 되고 싶은 욕망. 이 위험한 혼돈의 배우 박노식은 1970년대 중반 긴급조치의 철퇴를 맞게 된다. 과거 검찰과의 불화는 그를 폭력영화배우 1호로 낙인찍었고, 검찰청의 유리창이란 유리창을 모두 깨버리며 박노식은 자신에게 쏟아진 오명에 분노를 표한다. 배우 출연 금지. 세상은 변해버렸다. 할리우드 액션영화와 이소룡 영화. 무협영화들이 극장가를 휩쓸고, 왕년의 액션배우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박노식이 탄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 김두한 시리즈로 떠오르는 액션배우가 된 이대근이 LA 교민 위문공연을 위해 비행기에 탔다가 왕년의 액션배우 박노식을 알아보고 다가와 인사를 한다. 박노식은 과거 자신의 영화에서 같이 일하고 싶은 배우나 스탭을 만나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나한테 한방 맞아주라.” 이대근에게 박노식은 주먹을 들이대며 말한다. “내가 다시 영화 찍으면 한방 맞아줘라.” 이대근은 흔쾌히 한방 맞기로 했고, 그 약속은 <돌아온 용팔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카인의 후예> <하얀 수염>에서 뒷머리를 부여잡고 고목이 거꾸러지듯 쓰러진 것과 똑같이 박노식은 풍으로 쓰러지고 만다. 병상에서 자신을 찾아온 시나리오작가에게 다시 한번 “한방 맞아주라”를 힘없이 말했지만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 이 글에 쓴 박노식의 사건과 그의 말들은 박노식의 자서전 <뻥까오리 백작(박노식 지음. 씨와날 펴냄, 1995)에서 인용되었고, 한국 영상자료원에서 출간된 <신문기사로 본 한국영화>를 참고로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