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BIFF 추천작: 대중 유희-지금 아시아가 열광하는 건 뭐?
2011-10-06
글 : 씨네21 취재팀

대중영화가 아니라 장르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다. 액션, 퀴어, 뱀파이어물, 호러 장르가 이 섹션에 포진해 있다. 이야기도 이야기이지만 형식에 대한 전세계 영화인들의 고민이 커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와이 순지의 신작과 중국의 첫 3D 애니메이션영화를 만나보자.

<점프 아쉰> Jump Ashin!

린유셴 | 대만 | 2011년 | 126분 | 아시아영화의 창
우리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어떤 작가영화를 만드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어떤 대중영화를 만드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중화권의 무협영화나 일본의 기획영화를 제외한다면 좀처럼 수입되는 대중영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자. 한국은 과연 아시아 대중영화의 최전선을 홀로 걸어가고 있는 독점적 황태자인가? 오로지 한국영화계만이 상업적으로 매력적인 대중영화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건가? 물론 그렇지 않다. <점프 아쉰>은 그런 질문들에 대한 대만의 대답이라고 할 만하다.

<점프 보이즈>(2005) 등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유명한 린유셴의 <점프 아쉰>은 감독 형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스포츠영화다. 주인공 아쉰(펑위옌)은 어린 시절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고등학교 체조선수로 활동 중이다. 그러나 아쉰의 엄마는 체조에만 열을 올리는데다 잦은 부상으로 병원비를 가져가는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스스로도 잦은 부상에 지쳐버린 아쉰은 체조를 그만두고 과일가게를 돕는 동시에 뒷골목 양아치로 성장해간다.

<점프 아쉰>은 지난 몇년간 개봉한 한국 대중영화와 닮은 데가 많은 영화다. 좌절한 스포츠 선수들이 또다시 꿈을 찾아 뛰어든다는 설정은 <국가대표>를 연상케 하고, 80년대 대만의 복고적인 문화와 배경을 이용하는 건 <써니>와 닮아 있다. 사실 80년대 향수를 극적 양념으로 활용하는 건 지금 아시아 대중영화들의 어떤 공통적 경향으로 보이는데, 린유셴 감독은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패싸움 장면이 성룡의 80년대 영화들을 향한 오마주라고 밝힌 적도 있다. 중화권 문화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왕걸(王傑)의 음악이 만들어내는 복고적인 향취에 더욱 심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젊은 체조선수가 기나긴 방황 끝에 다시 점프대 앞에 선다는 이야기는 세상의 모든 스포츠영화들이 갖는 클리셰로부터 한 발자국도 채 멀리 있지 않다. 물론 그건 흠이 아니다. <점프 아쉰>은 대중영화의 클리셰를 굳이 벗어던질 생각 없이 클리셰가 만들어내는 감동적인 대단원을 향해 활기차게 점프를 할 줄 아는 영화다. 특히 지금 대만 최고의 스타 중 한명인 펑위옌의 팬이라면 <점프 아쉰>은 절대 놓치지 말기를 권한다. 펑위옌이 아도니스의 몸으로 점프를 하는 순간 영화의 사소한 결점은 자잘한 복근 사이로 녹아 없어진다.

<미소년지련> Bishonen

욘판 | 홍콩, 중국 | 1998년 | 101분 | 욘판 감독 특별전
욘판 감독 특별전에서 딱 한편을 권한다면 역시 <미소년지련>을 고를 수밖에 없다. 욘판의 가장 훌륭한 영화이기 때문이 아니라 커밍아웃한 게이 감독 욘판의 어떤 감정적 정수가 이 1998년작 퀴어멜로영화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게이바에서 몸을 파는 고급 남창 제트(풍덕륜)는 우연히 만난 경찰 샘(오언조)과 첫눈에 운명적인 사랑을 느낀다. 둘은 곧 친구가 되고, 점점 연인으로 발전해간다. 하지만 샘은 복잡한 남자다. 그는 제트의 친구인 아칭과 오래전 연인관계였으나 아칭을 처절하게 버리고 사라진 과거가 있으며, 보수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여전히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간다.

<미소년지련>은 이후 욘판이 만든 <유원경몽>(2001), <눈물의 왕자>(2009)만큼 영화적으로 숙성한 작품은 아니다. 이야기는 종종 퀴어시네마라기보다는 ‘야오이 시네마’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대신 여기에는 90년대 홍콩의 동성애자 커뮤니티에 대한 자기고백과 연민, 멜로드라마적 클리셰를 두려워하지 않는 신파의 뜨거움이 있다. 바로 전해 개봉한 (그리고 욘판의 <미소년지련>에 큰 영향력을 끼쳤음이 분명한)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1997)와 비교해서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무림토끼> Legend of a Rabbit

순리준 | 중국 | 2011년 | 85분 | 애니메이션 쇼케이스
‘뚱뚱한’ 토끼와 ‘나쁜’ 판다가 대결을 벌인다. 전국의 무림 지존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쿵후 고수가 제자인 판다 슬래시에게 배신을 당한다. 그는 요리사인 토끼 투에게 쿵후의 기운과 어릴 적 자신의 품을 떠난 딸을 찾으라는 유언을 남긴다. 도심으로 향한 투는 우연히 슬래시의 도장에서 일하게 되고, 피오니란 이름의 쿵후 고수를 만난다.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슬래시의 야욕을 막으려 노력하고, 투는 조금씩 자기 안의 쿵후를 깨닫기 시작한다.

중국의 첫 3D 장편애니메이션인 <무림토끼>는 중국의 애니메이터들이 <쿵푸팬더>에 얼마나 약이 올랐는지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자국의 상징인 동물을 데려다, 역시 자국의 국기인 쿵후를 소재로 삼은 할리우드가 얼마나 미웠으면 판다를 아예 악역으로 설정했을까. 게다가 이 판다의 야욕이 중국 정복이라는 점 또한 의미심장하다. 형형색색의 미감으로 담은 배경과 현란한 액션, 무엇보다 캐릭터에 대한 호감도는 <쿵푸팬더>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다만, <쿵푸팬더>를 먼저 보고 자란 아이들은 안타깝게도 <무림토끼>가 <쿵푸팬더>의 아류라고 생각할 수도. 할리우드가 쿵후영화의 관습을 연구해 창조한 결과물을 중국이 역수입한 흥미로운 사례다.

<가자지구 바다의 물병> A Bottle in the Gaza Sea

티에리 비니스티 | 이스라엘, 프랑스, 캐나다 | 2011년 | 100분 | 월드 시네마
우리 모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다루는 영화들에 조금 질려 있는 상태다. 이 해결 불가능한 지구의 화약고에 대한 영화들을 언제까지 우리가 견딜 수 있을 것인가. 한 가지 다행한 일은, 새로운 세대의 이스라엘 감독들이 점차 대중영화적인 화법으로 분쟁의 일상적인 모습들을 그려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요시와 자거>의 에이탄 폭스가 지난 2006년 내놓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퀴어 시네마’ <거품>이 대표적인 사례다.

<가자지구 바다의 물병>은 국내에도 출간된 발레리 제나티의 베스트셀러 <가자에 띄운 편지>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유대인 소녀 탈은 일상적인 자살폭탄 테러에 지친 나머지 미지의 팔레스타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병에 넣어서 바다로 보낸다. 편지를 우연히 발견한 가자지구의 소년 나임은 이메일을 통해 탈과 교류를 시작하고, 둘은 일상적인 폭력 속에서도 우정을 나누며 만날 날을 꿈꾼다. <가자지구 바다의 물병>은 손쉽게 말하자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영화다. 이스라엘 소녀과 팔레스타인 소년은 벽 너머의 인간에게 사랑과 용서, 그리고 미래를 배운다. <가자지구 바다의 물병>은 어른들의 분쟁에 보내는 젊은이들의 사랑이다.

<뱀파이어> Vampire

이와이 순지 | 미국, 캐나다 | 2010년 | 120분 | 미드나이트 패션
수줍어 보이는 청년 사이먼(케빈 지거스)은 인터넷으로 자살 희망자를 찾은 뒤 온몸의 피를 서서히 뽑아내는 살인마다. 그가 피해자들의 피를 마시기는 하지만 정말 뱀파이어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자살을 원하는 소녀(아델레이드 클레멘스)와 사랑에 빠지고, 끝없이 자살을 기도하는 미나(아오이 유우)에게 연민을 느끼면서 점점 변해간다. 하지만 어두운 비밀은 종착역을 향해 가기 시작한다.

한국에서 이와이 순지의 이름은 상징적인 어떤 세계를 의미한다. 소녀와 청춘과 뽀얀 역광으로 가득한 ‘이와이 순지 세계’ 말이다. 그런데 이와이 순지의 세계가 팬시 상품처럼 달달하기만 했던가. 오히려 이와이의 영화에는 죽음과 섹스에 대한 욕망이 종종 이글거렸고, 그게 가장 잘 드러난 영화는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이었다. 오랫동안 이와이가 영화화를 꿈꿨던 <뱀파이어>는 살인과 자살과 체액 교환의 성적인 기운이 가장 직접적으로 화면에 전시되는 이와이 세계다. 지나치게 달달한 순간이 튀어나오곤 하지만 그것 역시 이와이 순지 영화의 매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더 콜러> The Caller

매튜 파크힐 | 푸에르토리코 | 2011년 | 91분 | 미드나이트 패션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온 메리. 긴 이혼소송에 지친 그녀는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꿈에 부푼다. 어느 날 바비라는 남자를 찾는 전화를 받은 메리. 그녀는 잘못 걸려온 전화라 생각하지만 전화는 계속되고 동시에 전남편의 협박과 집착도 그녀의 목을 조여온다. 계속 걸려오는 전화가 이상하다 느낄 무렵 메리는 전화를 건 이가 로즈라는 여성이며 그녀가 1979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신이상자의 소행이라 생각하지만 로즈의 말대로 벽지를 뜯자 장미 그림이 나오는 것을 보고 이상한 전화가 정말 과거에서 걸려오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두려움을 느낀 메리는 로즈의 전화를 피하지만 로즈는 메리가 전화를 피하면 피할수록 그녀의 주변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미스터리한 ‘전화’를 매개로 <더 콜러>는 긴장의 끈을 영화 끝까지 밀고 나가는 뚝심있는 영화다. 특히 과거를 따라가며 밝혀지는 사건들은 충격적이다. 여기에 과거에서 사는 여성 로즈와 현재에 사는 메리의 대결, 메리의 주변을 멤돌며 시시때때로 협박하는 전남편의 존재가 극에 긴장감을 더한다.

<마이 백 페이지> My Back Page

야마시타 노부히로 | 일본 | 2011년 | 141분 | 아시아영화의 창
“지금의 나보다 어른인 체했던 그 시절의 나.” 혈기에 가득 찬 젊은 시절에 대한 회한을 노래한 밥 딜런의 명곡 <My Back Page>야말로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마이 백 페이지>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영화는 1960년대 말. 젊음을 바칠 비장한 각오로 학생운동에 가담한 우메야마, 그리고 학생운동을 취재하는 선배를 따라갔다 뒤늦게 투쟁의 세계에 빠져든 <아사히신문> 기자 사와다의 만남을 쫓는다. 두 젊은이의 사고방식은 바로 전공투세대를 거쳐온 일본 청춘의 단면과도 같다.

<아사히신문> 기자 출신 평론가 가와모토 사브로의 논픽션 <마이 백 페이지 어느 60년대 이야기>를 다룬 작품. 감독은 직접적인 방식 대신 ‘과거’라는 필터를 통해 지난 시절에 대한 냉철한 정리를 시도한다. <린다 린다 린다>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 같은 그의 전작이 사춘기의 예쁜 동화였다면, 이젠 완연히 청년기로 접어든 느낌이다. 전작 <악인>으로 선 굵은 연기를 선보인 쓰마부키 사토시는 과거를 돌아보는 사와다의 오열장면으로 또 하나의 인상적인 필모그래피를 추가한다.

<무협> Wu Xia

진가신 | 중국, 홍콩 | 2011년 | 115분 | 갈라 프레젠테이션
중국의 어느 작은 마을, 종이 기술자로 살고 있던 진시는 어느 날 동네에 들어온 두명의 강도와 몸 싸움을 벌인다. 결과는 두 강도의 죽음. 진시는 얼떨결에 마을의 영웅이 되지만, 수사관 바이쥬는 강도의 죽음이 우연한 게 아니라 무술 고수의 가공할 초식에 의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알려진 바로는 <무협>은 <외팔이 검객>의 리메이크였다. 하지만 진가신 감독이 <외팔이 검객>으로부터 가져온 것은 고전 무협영화의 풍미 정도인 듯 보인다. <무협>은 어두운 과거를 지우고 좋은 사람이 되고팠던 한 남자와 법의 힘이 아니고는 본성을 지울 수 없다고 믿는 남자의 만남을 그리는 영화다. 극중의 바이쥬가 인체의 혈에 대한 지식과 현장감식 능력으로 진시와 강도들의 결투를 재구성하는 과정이 현대적인 긴장감을 전한다면, 정체를 감추고 사는 견자단의 풍모는 정통 무협영화가 지녔던 매력의 재현이다. 무엇보다 현재 홍콩의 유일한 액션배우나 다름없는 견자단과 <외팔이 관객>의 왕우가 벌이는 결투장면이 명불허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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