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지역영화는 절대적으로 실존 인물과 사실의 힘에 기대고 있다. 추천작을 뽑아놓고 보니 8편 중 5편이 다큐멘터리일 정도다. 빔 벤더스의 첫 3D영화의 주인공이 되어준 피나 바우쉬부터 일본 AV의 거장 요요추까지, 지역의 원동력이 되어왔던 위대한 인물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피나 3D> Pina 3D
빔 벤더스 | 독일, 프랑스 | 2011년 | 106분 | 월드 시네마
2009년 6월30일,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무용가가 독일 부퍼탈에 잠들었다. 바로 현대무용가 피나 바우쉬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기에(그녀는 암 진단을 받은 지 5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현대무용 팬들은 충격과 비통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이 순간 가슴을 움켜쥐고 괴로워하던 사람이 또 있었다. 피나 바우쉬의 오랜 친구이자 예술적 동료였던 빔 벤더스다. 그는 26년 전 바우쉬의 탄츠테아터(무용과 연극이 결합된 형식의 춤) 공연을 관람하고 큰 충격을 받은 뒤, 언젠가는 그녀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오랫동안 형식을 고민하다가 3D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마침내 바우쉬를 위한 다큐멘터리를 찍을 수 있게 됐는데 그녀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하지만 빔 벤더스는 프로젝트를 폐기하지 않았다. 그는 친구를 잃은 슬픔을 딛고 피나 바우쉬가 평생을 바쳤던 부퍼탈발레단의 무용수들을 만나 바우쉬의 흔적을 채집했다. 그리고 지금의 바우쉬를 있게 한 그녀의 대표작 <카페 뮐러>와 <콘탁트호프> <봄의 제전>과 <보름달>의 가장 아름다운 대목을 화면에 담았다. 빔 벤더스의 첫 3D다큐멘터리영화 <피나>는 그렇게 탄생했다.
빔 벤더스가 이 영화를 연출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바우쉬는 오랫동안 영화감독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용수였다. 샹탈 애커만이 <피나 바우쉬와 함께한 투어>를 만들었고,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그녀에게>의 첫 장면을 <카페 뮐러>의 안무로 채웠다. 그러나 독일 문화계에 속해 살아왔으며 각자의 분야에서 실험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아왔던 빔 벤더스와 피나 바우쉬의 겹치는 행보는 바우쉬를 다룬 여타의 영화들과 <피나>를 구분짓게 하는 중요한 차이점이 된다. 그 일환으로 빔 벤더스가 시도하는 것은 이미지에 오감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의 카메라는 무용수의 작은 움직임과 헐떡이는 숨소리까지 섬세하게 담아낸다. 마치 보는 이가 공연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원으로 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듯한 느낌이다. 또한 벤더스는 자신만의 상상력을 덧붙여 부퍼탈 무용수들로 하여금 무대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바우쉬의 작품을 공연하도록 했다. 고등학교 체육관이나 공공 수영장, 모노레일이 지나가는 부퍼탈 시내의 교차로에서 무용수들이 춤추는 광경은 오직 <피나>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백미다.
<피나>는 이처럼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불멸의 춤에 대한 사려깊은 기록이다.
<노벨상 메달 도둑> Nobel Thief
수만 고쉬 | 인도 | 2011년 | 96분 | 아시아영화의 창
인도의 시성으로 불리는 타고르는 지난 1913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런데 이 메달이 지난 2004년 전시 도중 자취를 감춘다. 사건은 미결로 끝났고, 결국 노벨재단은 사상 최초로 복제본 메달을 인도에 전달했다. <노벨상 메달 도둑>은 이 사건에서 비롯된 픽션이다. 글도 못 읽는 농부 바누는 우연히 노벨상 메달을 줍는다. 바누는 마을 학교의 선생의 조언을 얻어 메달을 정부에 반환하려 하지만 그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다. 지쳐가는 바누의 마음 한구석에는 메달을 팔아 가난에서 탈출하고픈 유혹이 싹튼다. 하지만 이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다.
촌부인 바누의 주변에는 하찮은 이들의 말을 믿지 않는 세상이 버티고 있다. 정부와 언론은 타고르와 그의 메달이 지닌 가치를 떠들지만 정작 사람들은 타고르가 누군지 모르며 노벨상 메달과 금붙이가 다를 바가 뭔지 알지 못한다. 메달의 가치를 알아보는 건 인도 밖 나라의 장사치들뿐인 상황에서 타고르가 강조한 휴머니즘이 자리할 곳 또한 없을 것이다. 영화는 어쩌면 타고르의 메달이 스스로 모습을 감춘 게 아닐까 상상하는 듯 보인다. 한 인간의 순박한 마음이 전하는 감동과 웃음에 이어 묵직한 비극의 메시지로 방점을 찍는 영화다.
<집시> Gypsy
마틴 술릭 | 슬로바키아공화국, 체코 | 2011년 | 107분 | 월드 시네마
집시에겐 인종도 국가도 없다. 그들에게도 뿌리가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을 그냥 ‘집시’라고 부른다. 정처없이 떠돌고 음주가무를 즐기며, 문명사회의 모든 관습과 법칙에서 자유로운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집시>는 집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자신의 가치관과 집시 무리의 자유분방함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소년의 이야기다. 아담이 사는 동네에서 평범한 삶은 곧 생존 능력이 없음을 뜻한다. 집시 마을의 실세인 아담의 새아버지는 도둑질을 해서라도 필요한 물건을 구해와야 한다며 아담을 닦달한다. 소년이 괴로워할 때마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유령이 찾아와 그를 위로한다. 그러던 어느 날, 유령은 아들에게 충격적인 진실을 말해준다.
인구 2천명 중 스무명만이 일하는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이면 밤마다 한데 모여 음주가무를 즐기며 훔쳐온 음식을 나눠먹는 곳. 이 영화가 조명하는 집시사회는 그야말로 난장의 중심지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 거침없이 돌진하는 이들의 생동감은 혼돈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춤과 노래, 폭력과 냉소,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이국적인 영상은 이 무법천지의 매혹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다. 마틴 술릭 감독은 어떠한 긍정도 부정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집시사회를 포착하려 한다.
<지그> JIG
수번 | 영국 | 2010년 | 93분 | 와이드 앵글
<토들러 앤드 티아라>라는 미국 리얼리티 시리즈가 있다. 10살이 채 안된 소녀들 대상의 미인선발대회를 무대로 한 프로그램이다. 엄마 젖도 못 뗀 듯한 아이들이 푸들 머리에 티아라를 쓰고 섹시한 댄스로 심사위원들을 유혹하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하지만 이 지구의 어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열정에 사로잡혀 누구도 존재를 모르는 경연대회에 돈과 명예와 목숨을 걸기도 한다. <지그>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매년 개최되는 아이리시 댄싱 월드 챔피언십을 무대로 한 다큐멘터리다.
먼저, 아이리시 댄싱이라는 아름다운 단어에 속아서는 안된다. 이건 거의 발만 이용해서 무수한 점프를 해내야 하는 전통춤인데, 육체적인 노동의 강도가 거의 애크러배틱 체조에 가깝다. 카메라는 아이리시 댄서들이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을 집요하게 따른다. 그런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전통춤 대회 따위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을 비웃을 양 카메라를 뒤따르다보면 무시무시할 정도로 열정적인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한다. 이 부지런한 다큐멘터리는 그저 아이리시 댄싱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열정에 대한 축가처럼 보인다. 다큐멘터리 버전의 <빌리 엘리어트>라고 해도 좋겠다.
<사랑스러운 남자> Lovely Man
테디 소리앗마자 | 인도네시아 | 2011년 | 76분 | 아시아영화의 창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아버지가 카페의 남자종업원을 꼬이고 있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히잡을 두른 소녀가 낡은 사진 한장과 주소를 들고 자카르타에 도착한다. 복장으로 보아 모슬렘이 분명한 소녀의 이름은 카하야. 오래 전 집을 떠난 아빠를 다시 만날 생각에 들뜬 카하야는 호기심이 갈 만한 도시의 생경함도 뒤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향한다. 물어물어 아버지가 일하고 있다는 곳을 찾아가지만 그곳은 빌딩도 가게도 아닌 여장남자들의 매춘이 이뤄지는 대로 한복판이다. 카하야는 가까스로 자신의 아버지를 찾지만 그 역시 이 거리의 매춘부 중 한명이다. 놀란 카하야는 뒷걸음질치지만 반신반의의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오랜만에 찾은 아빠는 자신을 매몰차게 내칠 뿐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퀴어영화 <사랑스러운 남자>는 오래 전 집을 떠나 여장남자로 살아가는 아버지와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러 온 딸 사이의 관계를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확인하는 따뜻한 영화다. 특히 한밤중의 자카르타에서 벌어지는 부녀의 상봉기는 여러 가지 소동과 얽히면서 웃음과 감동을 전한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This Is Not a Film
자파르 파나히, 모즈타바 미르타마스브 | 프랑스 | 2011년 | 75분 | 와이드 앵글
이란에서 영화감독으로 산다는 건 지독하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는 정부에 비판적이다라는 이유로 6년 징역, 20년간 외부활동 금지를 당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이야기다. 인물 집중조명이나 거창한 투쟁사가 아니다. 카메라는 감독의 집, 침대, 식탁과 소파가 있는 일상을 기록한다.
새해 첫날 다른 가족들이 나가고 홀로 남겨진 파나히 감독. 변호사와 동료감독의 전화를 받고 난 뒤 파나히 감독은 정부의 제작금지령으로 무산된 차기작에 대해 설명을 시작한다. 예술대학에 합격하고도 보수적인 집안의 반대로 감금되고, 탈출을 감행한 여고생의 이야기. 열의에 차 동선을 짜고 시나리오를 읽어나가던 파나히 감독이 의기소침하는 순간, 억압당한 감독의 상황이 고스란히 갑갑한 현재가 되어 다가온다. 냉정을 유지하려던 그가 눈시울을 붉히거나 등을 돌리고 담배를 피우는 짧은 순간은 슬프고 미안한 장면이다. 기사를 작성하던 9월17일. 영화의 공동감독 모즈타바 미르타마스브가 이란 정부에 체포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것은 더 이상 정말, 영화가 아니다.
<요요추와 떠오르는 섹스의 나라> YOYOCHU in the Land of the Rising Sex
이시오카 마사토 | 일본 | 2011년 | 115분 | 와이드 앵글
일본 AV의 산파인 요요추는 74살임에도 현업에 종사하고 있는 AV감독이다. 신입사원 면접이나 만원의 지하철 등의 상황에서 사실적인 섹스를 그리는, 현재 AV영화의 트렌드를 창조한 게 바로 그다. <요요추와 떠오르는 섹스의 나라>는 요요추의 작품세계, 그리고 그의 영화를 향유한 일본을 조망하는 다큐멘터리다. 그가 만들었던 영화는 당시 최고의 히트를 치거나 논란의 대상이었고 일본사회는 그의 작품을 통해 AV의 범위를 고민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요요추가 탐구한 섹스의 세계다. 어느 유부녀는 AV출연을 통해 자신의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건 남편의 몸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4살, 7살, 10살, 13살 등의 인격을 모두 가진 여자는 AV에 출연하고 감독과 대화를 나누면서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해간다. 여타의 AV영화가 남성의 로망을 자극하려 한다면 요요추는 여성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담으려 한 듯 보인다. 현재 AV마니아인 관객이라면 남들에게 자신의 취향을 정당화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일 것이다.
<어로> Yulu
지아장커 외 6인 | 중국 | 2011년 | 88분 | 와이드 앵글
2011년 지아장커의 시선은 사라졌거나 점점 사라지고 있는 과거의 무언가가 아니라, 역동하는 중국의 현재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는 중국의 현재와 미래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젊은 감독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 같다. <어로>는 지아장커가 프로듀서를 맡고 그의 동반자 유릭와이가 촬영을 맡은 옴니버스 다큐멘터리다. 송팡, 웨이티에, 탄추이무이, 첸타오, 첸지헝, 왕지자오 등 현재 아시아 무대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여섯명의 신예감독들이 중국사회를 이끌어가는 12명의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어로>에 등장하는 사회 인사들은 각양각색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 분야를 막론하고 이들의 공통점은 한번쯤 실패를 경험해봤으며 그럴 때마다 자신의 힘으로 시련을 극복해낸 자들이다. 이들 각자의 에너지가 발전하는 현대 중국의 원천적인 힘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비중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예찬하는 이 영화의 정서에 위화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어로>는 분명 우리가 중국의 뭇 상업영화로부터 짚어내지 못한 대륙의 내재된 힘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