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비긴즈>(2005)에 이어 <다크 나이트>(2008), 종착역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도달하기까지 시리즈 8년사. 악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배트맨이 머리 싸매고 고뇌하는 동안, 그의 복장도 무기도 벙커도 수정, 보완, 업그레이드됐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사소하고도 중대한 변화상을 짚어본다.
고담시, 그 속의 배트벙커
고담시 재연을 위한 선결 과제는 어디까지나 사실에 기반을 둔 도시였다. 같은 소재로도 팀 버튼이 판타지의 끝을 체험하게 해준다면(<배트맨 리턴즈>), 놀란은 판타지마저도 냉정하게 현실과 접점을 찾아내는 감독이다. 보다 그럴듯한 시각적 효과를 보여주길 원하는 스튜디오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놀란은 현실적인 고담시를 염두에 뒀다. 웨인 기업이 실제 존재하는 뉴욕의 거리가 곧 고담시의 모델이었다. 웨인 기업의 외부는 트럼프 타워에서, 배트맨이 고담시를 내려다보는 장면은 퀸스보로 다리를 이틀간이나 봉쇄하고 촬영한 결과물이다.
<다크 나이트>의 고담에 ‘원’의 이미지는 없다. 조커가 싸웠던 세계의 구조처럼 고담은 사각과 선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건 종결편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시점에서 아이맥스가 단순히 즐거움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도시를 재연하는 실질적 도구로 사용됐다. 뷰파인더를 교체하고 렌즈를 새로 만든 결과, 낮은 조도에서 촬영을 할 수 있었는데, 대부분의 중요한 일들이 지하에서 벌어지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효과적이었다. 주요 장소는 해저동굴에 마련된 배트벙커다. 웨인 저택이 <배트맨 비긴즈>에서 파괴된 걸 기억할 거다. 브루스 웨인은 그래서 기지를 임시로 배트벙커로 옮겼다. 동굴 속에 마련된 배트벙커는 원시적이면서도 동시에 현대적이다. 평범한 문에서 출발해 동굴이 나오고, 거기서 버튼을 누르면 고가의 배트슈트와 슈퍼컴퓨터를 보관하고 있는 정육면체가 떠오르는 최첨단 디자인으로 고안됐다.
배트슈트
난제는 목선이었다. ‘bat turn’(급선회) 말고 ‘배트-턴’(Bat-turn)은 들어봤나. 목이 두꺼워 슬픈 배트맨이었다. 목선의 자유로움이야말로 제1 과제였다. 가면과 일체형처럼 이어져 둔탁해 보이던 기존 디자인 대신 군사, 의료, 하이테크 스포츠용품에 사용되는 네오프렌(합성고무의 일종) 소재를 사용해 자연스럽게 목을 감싸는 형태를 만들어줬다. 전체적으로 통기성과 유연함이 보강된 셈이다. 배트맨의 짐승남스러운 매력을 앗아갈 날렵한 목 따위, 절대 용납 못한다고? 온몸을 압박해오는 배트슈트 때문에 밀실공포까지 느꼈다는 크리스천 베일에게 그게 정말 할 소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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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백작의 것만큼 부드럽게 펄럭이는 망토에도 신소재의 은총은 더해진다. 망토는 영국 국방부에서 야간 전투시 사용하는, 세계에서 가장 얇은 파라슈트용 나일론 소재를 사용했다. CGI에 인색한 크리스토퍼 놀란을 위해 촬영 용도에 맞게 총 50벌을 제작, 망토를 바람에 날릴 소음없는 강풍기도 동원됐다.
▶스파이더맨처럼 한번에 쓱 입고 가면 쓰면 끝나는 은총은 배트맨에겐 없다. 배트슈트는 총 110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졌다. 확실히 배트맨의 재력을 보여줄 부티는 나지만 옷 한번 입으려면 한땀한땀 110번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경악할 만한 사실.
▶두꺼움과의 전면전이었다. 배트맨이 악당 베인과 싸우건 말건, 코스튬 디자이너는 초경량 배트슈트에 사력을 다했다. 배트슈트, 망토, 투구 무게 합쳐서 13.6kg이다.
베인의 착장
톰 하디가 목소리 출연한 줄 알았다. 베인 마스크 말이다. 장장 164분의 러닝타임 중 톰 하디를 식별할 수 있는 건 고작 몇 십초뿐이다. 하찮은 팬심에, 눈연기만인 톰 하디를 의심도 해본다. 배우의 얼굴을 이렇게 전면봉쇄하다니 놀란 참, 독하다. 베인의 마스크는 진통제를 계속 주입해 고통을 잊게 만드는 용도다. 단순 위협용이 아니라 기능성이니 절대 벗을 수 없다는 거다. 베인을 살리는 동안 정작 그걸 쓴 톰 하디는 죽지 못해 살았다. 마스크 담당자의 말을 빌려보자. “마스크는 톰의 머리를 빈틈없이 꽉 조이고 있다. 앞부분은 온통 마그네틱 제거판이고, 밑은 고무 실이어서 피부에 밀착된다. 그런 마스크를 쓰고 연기하다니 톰 정말 대단하다.” 만든 사람이 이러고 있다. 지옥을 경험한 ‘미련한’ 톰 하디의 말도 들어야 한다. “사실 너무 고통스러웠는데 크리스천이 불평이 없기에 나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미련스럽다. 이래서 톰 하디다. 베인과 조커의 악함의 지수는 논할 수 있겠지만, 이래가지고선 베인 마스크와 조커 분장, 고통의 우위는 가늠이 힘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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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인의 의상은 총 7벌. 전투용 부츠와 바지, 보호대로 구성된다. 의상은 자연소재를 사용, 베인의 열악한 환경을 보충 설명해준다.
▶베인의 마스크는 3D 프린터로 제작한 ABS 수지라고 한다. 이러나저러나 착용하면 아픈 건 매한가지다.
캣슈트
뉴욕 뒷골목.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가 마놀로 블라닉만은 제발(!)이라고 도둑에게 외칠 그 상황, 같은 뉴욕에서 캣우먼은 당황하지 않고 킬힐을 무기로 사용했다. 이 정도면 신발에서 무적의 칼이 발사되는 <이치 더 킬러>가 따로 없다. 쿨하고 세다. 기존 캣우먼은 물론이거니와 배트맨보다 백배 당돌해 은둔한 배트맨을 고담시로 끌어내는 당찬 여자. 근데 고양이귀가 달려 있다! 이 무슨 난데없는 귀여움? 의상디자이너의 변명을 들어보자. “모던하고 트렌디하고 쿨한 여자가 고양이귀라니 안될 말이었다. 놀란과 고심 끝에 해결책을 찾았다. 고글이 올라가면 그게 자연스럽게 고양이귀 모양이 되는 거다.” 고양이귀 머리띠와 고글이 고양이귀 모양인 것과의 차이는 잘 모르겠다만. 결과는? 캐스팅 잡음에 동조했던 걸 미안하게 만들 정도로 섹시하고 멋진 캣우먼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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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과 첫 만남 뒤, 5분 전에 나왔던 헬스클럽으로 직행했다는 앤 해서웨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몸의 형태를 강조하는 무시무시한 디자인, 캣슈트의 압박 때문이다.
▶활동성을 위해 투피스로 제작. 벨트를 하면 원피스처럼 보인다. 팔꿈치까지 오는 장갑, 스파이크 달린 부츠가 한 세트. 총 20벌이 제작됐다.
더 배트 VS 배트포드
캣우먼이 고양이 자세로 떨어진 건 첫 등장 때뿐이다. 그다음엔? 배트맨의 배트포드를 제것인 양 쓴다. 전용차를 여자에게 주다니 역시 그는 놀란 말대로 슈퍼히어로가 아닌 현실의 재력가다. 배트포드의 강력함은 이미 전편에서 입증됐다. 빠른 속력에서 턴을 해도 쓰러지지 않을 수 있도록 실험을 거듭했고, 지금의 텀블러 같은 타이어는 그 고심 끝에 나온 결과물. 여간해서 몰기가 힘들어 실제로 몰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할까 고민했던 디자인이다. 그러니 <다크 나이트>에서 경험을 쌓은 스턴트맨이 하면 좋으련만 앤 해서웨이가 반대했단다. 여성적 아름다움이 떨어진다고. 결국 스턴트우먼을 섭외했고, 여성이 탈 수 있게 앞쪽 전체와 뼈대 몇 군데를 알루미늄으로 장착해 중량을 줄이는 개조를 했다. 배트포드가 캣우먼 차지니 액션 신에서 모양 빠지지 않을 배트맨의 신무기가 절실했다. 더 배트는 기존 지상용 차량의 한계를 뛰어넘어 공중을 나는 차량이다. 기본적으로 배트모빌과 닮은 모습으로 아파치 공격헬기, 오스프레이 프롭 제트기, 해리어 점프 제트기가 디자인에 가미됐다. 회전날개가 차량 아래쪽에 있고, 위쪽 통풍구를 통해 공기가 아래로 내려가는 양날 헬리콥터로서 공기역학을 변화시키고 빌딩 주변을 날 수 있는 날개와 통풍구를 가지고 있다, 는 건 어디까지나 영화 속 설정. 길이 9m, 넓이 5m, 무게 1t이 넘는 기계가 제 스스로 날아오를 리 만무했다. 촬영 때는 건물 사이에 와이어를 연결해 매달거나, 크레인이나 헬리콥터를 동원해 매달기도 하고, 특수제작한 차량 위에 올리는 등 모양 빠지는 시도들을 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