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히 알려진 것처럼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3부작은 미국 DC코믹스의 그래픽 노블, <배트맨> 시리즈를 기반으로 제작됐다.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는 이미 그래픽 노블을 기반으로 제작한 영화가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 그런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원작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건 중요하다.
놀란 3부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공개되기 전부터 그래픽 노블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노 맨스 랜드>, 그리고 <나이트폴>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를 보기 전, 막연하게 생각하기로는 그래픽 노블 <다크 나이트 리턴즈>가 이번 영화에 가장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했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배트맨 활동에서 은퇴한 브루스 웨인의 복귀와 최후를 그린 작품이다. 사랑했던 여인 레이첼, 그리고 함께 범죄에 맞서 싸우던 동료 하비 덴트를 잃고 실의에 빠져 은퇴한 배트맨이 다시금 복귀해 고담을 위해 마지막 싸움을 벌인다는 <다크 나이트 리턴즈>의 설정은 그야말로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핵심 플롯이다. 물론 배트맨이 충격적으로 패배하고 그를 (말 그대로) ‘꺾는’ 악당 베인이 등장하는 <나이트폴>과 대지진으로 붕괴한 고담시가 미국 본토와 격리된 가운데 내전 상황을 겪는 <노 맨스 랜드>의 영향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배트맨> 그래픽 노블 시리즈를 주의깊게 보아왔고 그중 몇편을 번역한 나로서는 <배트맨> 시리즈는 물론 그래픽 노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지목되는 걸작 <다크 나이트 리턴즈>가 놀란의 세 번째 배트맨 영화와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언론시사에서 공개된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나이트폴>의 그림자가 생각보다 짙게 드리워 있다는 걸 목격하는 건, 그래서 흥미로웠다. <나이트폴>이 이 영화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대낮 전투신이다. 배트맨은 어둠의 기사다. 어둠 속에서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브루스 웨인의 다른 얼굴이며 어둠 속에서 적들과 싸운다.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만한 대결장면은 대부분 밤시간에 벌어졌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다르다. 배트맨이 최후의 대결을 펼치는 곳은 모든 대중에게 활짝 열려 있는 고담시의 대로변이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이는 낮이다. 이 낮시간의 전투장면은 배트맨 영화와 그래픽 노블에 익숙한 팬들에겐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이 이질적인 장면으로부터 <나이트폴>의 엔딩을 장식하는 배트맨의 독백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언젠가 차가운 동굴로 돌아가야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오늘은 햇살 속을 걷는다.” 동굴 속에서 싸우던 <나이트폴>의 배트맨은 전투의 여파로 파괴된 동굴에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크리스토퍼 놀란은 걸작으로 손꼽히기보다는 소품처럼 느껴지는 <나이트폴>의 마지막 장면으로부터 <배트맨> 3부작의 출구를 발견한 것이 아닐까. 음지의 흑기사를 양지로 끌어올리고, 어둠 속의 배트맨에게 빛을 찾아준다는 점에서 <나이트폴>에 대한 놀란 감독의 창의적인 해석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노 맨스 랜드>, <나이트폴>의 다양한 에피소드와 인물들을 매끄럽게 직조하는 능력도 높이 살 만하지만,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시리즈의 마지막 영화로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나이트폴>로부터 끌어낸 한줄기 빛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