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비로소 만나는 알랭 레네라는 영화적 진경
2012-11-20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알랭 레네의 신작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당신에게 권하며

사람들은 알랭 레네의 그 영화들을 알고 있다. 레네의 어느 영화 제목을 잠시 빌려온다면 사정은 일단 그래 보인다. 그는 영화사의 위대한 작품으로 인정받은 <밤과 안개> <히로시마 내 사랑> <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를 만든 감독이고 그로써 각종 영화사 서적에서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그의 독창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각 분야의 평자들에게 인정받았는데, “다른 누구보다 알랭 레네는 완전히 무(無)로부터 출발했다는 인상을 준다”(장 뤽 고다르)거나 “알랭 레네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우선적인 새로움이란 바로 중심, 고정점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질 들뢰즈) 등의 호평을 받았다. 전통적 서사 기술을 해체하는 파편적 구성이 그가 영화로 새롭게 해낸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현대영화 혹은 모던영화의 창조자로도 불렸다. 그런데 이렇게 좀 교과서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레네의 신작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말하는 건 꺼려진다. 우리는 무언가 다시 말해야 할 충동을 느낀다. 뭐랄까, 사람들은 알랭 레네의 그 영화들을 알고 있다. 다만 일부만 알고 있다, 랄까.

마음의 풍경에 머무르는 레네의 선택

젊은 시절 한때 같은 부류로 지칭되었으나 크리스 마르케가 정치사회적인 것을 세상의 토대로 보며 그 논평을 끝까지 놓지 않은 것에 비해 레네는 공적 세상에 대한 초현실주의적 논평으로서의 영화(<히로시마 내 사랑>)에서 인간의 행동에 대한 연구(<미국인 삼촌>)로, 영화와 연극의 흥미로운 결합으로(<멜로> <스모킹/노스모킹>), 대중적 문화기억장치(<우리들은 그 노래를 알고 있지> <입술은 안돼요>)로 나아갔다가, 요즘은 <마음> <잡초>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와 같이 사람들의 마음의 풍경을 그려내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이 구분은 정확한 것도 아니고 나빠졌거나 좋아졌다는 뜻도 아니지만, 레네의 선택이 지금 사람의 마음의 풍경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레네의 변화 중에서 몇 가지 염두에 둘 것이 있는데, 먼저 그에게는 누구와 함께 일하는가 하는 것이 언제나 중요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레네의 예술적 장르를 가른다기보다는 작품마다의 분위기나 감성의 시즌을 가르고 있는데, 유독 그것이 다른 감독들보다 더하다는 느낌을 준다. 말하자면 그가 한때 촬영감독 사샤 비에르니와 함께 여러 편을 촬영할 때와 지금 에릭 고티에와 여러 편을 이어가고 있을 때 이 영화들은 무언가 많이 다르다.

<히로시마 내 사랑>은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는 알랭 로브그리예, <뮤리엘>은 장 캐롤과 각본 작업을 하면서 그 영화들이 서로 달랐던 것처럼, <우리들은 그 노래를 알고 있지>부터 <입술은 안돼요> <마음> <잡초>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에 이르기까지, 각본가 로랑 에비에와 함께하고 있는 지금의 작품들은 또 하나의 시즌을 이루고 있다. 레네는 마음이 맞는 예술가와의 협업을 중시하며 그걸 작품의 효과로 변화, 상승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말하자면 레네의 영화를 말할 때 종종 사용되는 원심력 혹은 상호작용의 중요성은, 사실 그의 영화를 말하는 것을 넘어 그의 작업방식을 말할 때도 고려되어야겠다.

예상 밖의 그의 취향도 변화에 한몫했을 것이다. 과장이 얼마나 섞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잡초>를 만든 뒤 레네는 미국 만화와 미국 드라마에 대한 지대한 애정을 피력하며 <앨리어스>나 <소프라노스> 같은 드라마를 두고 “이 드라마들은 에릭 폰 스트로하임이나 아벨 강스가 만들고 싶어 했을 법한 영화들이다”라거나 “<잡초>에 영향을 준 것이 있다면 미국의 코미디언 래리 데이비드”라고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남겼다. 래리 데이비드란, 우디 앨런의 영화 <왓에버 웍스>에 나온 바로 그 배우가 아닌가. 실은 유년 시절부터 온갖 만화책과 루이 푀이야드의 <팡토마> 같은 모험물에 취해 있었던 그였다. 대중문화에 대한 그의 관심은 남달랐다.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당황스러웠던 레네의 영화는 1997년에 나온 <우리들은 그 노래를 알고 있지>였다. 이 영화는 인물들의 대사가 샹송이다. 샹송처럼 대사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불려서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샹송을 대사가 필요한 자리에 넣어 대신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영화 속 어떤 인물이 ‘오늘밤 나는 외롭다’는 감정을 대사로 말하는 대신 “나 오늘//오늘 밤은//어둠이 무서워요”라고 김완선이 부른 <오늘밤>을 부른다고 생각하면 꼭 맞을 것이다. 그렇게 여러 곡의 샹송이 나와 한편의 영화를 이룬다. 그때 그 노래들은 유행가라는 명목답게 대중의 집단적 기억을 끌고 들어오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레네의 영화 중에서도 유독 우리에게 거리감을 준다면 그건 이 영화의 형식 때문이 아니라 언어 또는 대중적 문화의 공유가 덜하기 때문이다.

어떤 예술적 선택과 자세도 레네 영화의 변화를 말하는 데 중요하다. 연극과 영화는 실상 다른 것이 아니고, 나는 둘 다 사랑한다는 것이 레네의 변치 않는 생각이고 선택이므로 그의 80년대 이후 90년대 영화들은 자주 연극 무대를 택했고 지금의 영화들도 실은 마찬가지다. <멜로> <스모킹/노스모킹>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고정점을 탈피하고 비선형으로 영화를 만들되 그것을 연극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설정하여 고양시키는 이 영화들은 무척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스모킹/노스모킹>의 상영이 있던 어느 날 벌어진 한 가지 해프닝이 그걸 확인해준다. 영화가 얼마간 진행되었을 때다. 갑자기 상영을 중단하고 주최자가 단상에 올라 방금 이 영화의 릴이 바뀌어 상영되었음을 알리고 관객의 양해를 구했다. 문제는, 무언가 이 영화가 지금 이상하게 흐른다는 걸 직감하면서도 그때 이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이 영화의 릴이 바뀌었다고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제기한 진행의 방식 자체가, 어떤 고정점과도 무관하게, 순간마다 질문에 빠트리는 영화였으므로.

<마음> <잡초> 그리고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와 같은 최근의 결과물은 앞서 말한 것들을 경유하고 바탕하고 있되, 실험보다는 감정을 포착하는 데 주력하고 그로써 어떤 명상의 결과물에까지 이르는 걸작들이다. 이 작품들을 두고 개인적으로는 ‘마음 삼부작’이라 부르고 싶은 유혹까지 느낀다. <마음>은 파리에 살고 있는 여섯 사람의 이야기가 교차하고 배치된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곳의 공간배치 또는 실외에 내리다가 실내에서도 내리는 모조로서의 하얀 눈의 환상성이 이 영화를 아름다운 경지에까지 이르게 한다. <잡초>는 어떤 소매치기 녀석이 만들어낸 기이한 러브 스토리인데, 어느 중년의 남자가 중년의 여자의 버려진 지갑을 줍게 되고 지갑 속 그녀의 물건들을 보면서 단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녀와의 사랑을 불태우게 되는 이야기다. 레네는 “무언가 생겨날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곳, 예컨대 벽 틈이나 천장에서 잡초가 돋아나듯이, 만날 이유가 전혀 없고 서로를 사랑하게 될 이유도 없던 두 사람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또는 그걸 “욕망에 대한 욕망”이라고도 했다.

이 두 작품과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자세히 오가는 건 필요한 일이겠으나 당장 이 자리에서는 어려울 것 같고, 그 대신 <마음>과 <잡초>를 문득문득 상기하며, 특히 레네의 말을 경청하면서, 새롭게 찾아온 이 영화의 정체를 예감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먼저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의 스토리. 화면에는 전화를 받는 사람들의 클로즈업이 보인다. 전화를 받는 사람들은 전부 앙투완이라는 연극연출가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그들은 앙투완과 함께 일했던 배우들이다. 그들은 앙투완의 성으로 초대받은 뒤 그가 남긴 어떤 영상물을 함께 보게 된다. 거기에는 지금의 젊은 연극배우들이 연극 <에우리디체>의 리허설을 하는 광경이 들어 있다. 기이한 일들이 이때부터 하나씩 일어나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 한번쯤은 이 연극에서 배역을 맡아본 이들이라 처음에는 그저 추억이나 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서서히 젊은 배우들의 연기에 훈수를 두기 시작하고 그러더니 저 영상물 속 배우들의 대사에 호흡을 맞추고 그러자 그들이 앉아 있던 거실은 갑자기 다른 무대가 되고 시공을 초월하는 연극 <에우리디체>가 다시 한번 끝도 없이 펼쳐진다.

90살이 된 레네의 영화적 모험

사실 레네와 연극 <에우리디체>의 만남에 관해서는 좀 오래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1941년 그해 장 아누이의 연극 <에우리디체>를 보고 나온 청년 레네는 흥분에 휩싸여 자전거를 타고 파리 시내를 두 바퀴나 도는 것도 모자라 그 다음주에 다시 또 작품을 보았다고 한다. 그 뒤 세월은 70년이 흘렀고, 제작자가 신작을 논의하며 건넨 아이디어 중 젊은 시절에 감격에 젖게 했던 <에우리디체>를 레네는 다시 만나게 된다. “다만 상영시간과 극적 전개를 고려하여” <에우리디체>에 장 아누이의 또 다른 작품 <사랑하는 앙투완>을 겹쳐 옮기면서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의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배우들이었다. 그리고 그 배우들에 관한 아이디어는 감독 루시앙 핀틸리에의 말에서 영감을 얻었다. 루시앙 핀틸리에가 라디오 방송에 나와 “더이상 자신의 나이대가 아닌 배역을 연기해내는 배우만큼 연극에서 아름답고 충격적인 것은 없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레네는 그걸 영화에서 좀더 복잡한 방식으로 펼쳐낼 생각을 하게 됐다. “영상을 보는 동안 앙투완이 초대한 손님들이 함께 연기를 하는 순간들”은 그렇게 시작됐다. 영화 속 배우들은 전부 사빈느 아젬마, 피에르 아르디티, 미셸 피콜리, 마티외 아말릭 등 실제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이름들이 차례로 불릴 때, 얼핏 지루해 보이는 이 첫 장면이 그렇게 시작할 때, 이 반복의 리듬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에서 이미 이 영화의 아름다움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판가름이 난다고까지 말하고 싶어진다.

독창적인 데다 그 효과가 아름답기 그지없는 몇 가지 형식들이 이 영화를 더 뛰어나게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 첫손가락에 꼽아야 할 건 젊은 연극배우들의 <에우리디체> 리허설 영상과의 상호작용이다. 레네는 놀랍게도 그걸 자신이 연출하는 대신 브루노 포달리데스라는 젊은 감독에게 백지 위임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내가 2011년을 살아가는 이 젊은 연극팀을 연출하고 촬영한다면 무언가 진실하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세대와 가까운 친구이면서 동세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맡기는 편이 훨씬 재미있을 것 같았다. 브루노는 내가 지시를 내려주기를 바랐지만 나는 계속 이렇게 주장했다. ‘이 시도가 정말 성공을 거두려면 당신이 찍는 장면에 내가 결코 관여해서는 안된다. 내가 찍는 장면들과 당신이 찍는 장면이 다를수록 우리의 계획은 더 잘 맞을 것이다’라고.”

이건 과감하면서도 용감한 창작의 방식인데,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서로 그렇게 상호작용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도전해본 모험이기 때문이다. 90살에 레네는 그런 모험을 했다.

한편으로 한정된 공간에 있으면서도 이 영화의 마술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영상물과의 상호작용과 더불어 이 무대와 무대 안의 사물들을 찰나마다 레네가 영화적으로 손보기 때문이다. 사물의 배치 등이 숏이 바뀔 때마다 수시로 바뀌고 있다는 것, 그리고 무대가 새로운 장소로 들고 난다는 점. 즉 무대가 있고 그 안의 고정된 사물을 숏으로 그저 찍는 것이 아니라 숏의 흐름을 전제한 다음 숏이 바뀌는 찰나를 이용하여 무대도 바꾸는 것이므로 이건 지극히 영화적인 전제 아래 있다고 느껴진다. 무엇이 이런 방식을 납득 가능하게 한다고 레네는 생각했을까. “인물들의 기억의 부정확성”을 그렇게 표현했다고 레네는 말한다. 그 말은, 이건 현실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어떤 인식에 대한 표현이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리고 레네의 영화에서 그건 대체로 기억이라고 불려왔다. 그런 점에서 사실상 이 영화의 숨겨진 매력 중 하나는 영화는 어떻게 플래시백을 하지 않고도 기억을 불러올 수 있는가하는 점일 것이다.

레네는 더 중요한 말을 남긴다. “배우들이 마치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움직일 수 있고, 아는 곳이긴 하지만 자신들에게 적합하지는 않은 그런 공간에 있는 것처럼 움직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추구했던 건 자유로움이다. 공간과 시간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자유로움”. 그러므로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보는 누군가가 이 영화의 인물들을 무언가 최면에 걸리거나 홀린 사람처럼 보거나 실은 그들 자체가 사람이 아닌 유령처럼 보이는 것으로 느낀다면, 혹은 이곳을 바로 이승과 저승 사이에 위치한 익명의 성으로 느낀다면 그가 바로 레네가 추구한 자유로움을 만끽한 가장 충실한 관객일 것이다. 그리고 이때 레네가 말한 시공의 자유로움이란, 기억을 포괄하되, 더 중요한 무엇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알랭 레네를 ‘기억’의 영화감독으로 알고 있다. 레네의 영화를 말할 때 늘 ‘기억’이 앞장서 언급되어왔다. 하지만 레네 자신은 내내 거북했던 모양이다. “나는 (기억이 아니라) 상상 혹은 의식이라고 말하기를 더 선호한다”라고 그는 오래전에 말했다. <잡초>를 만든 다음에는 더 자세하게 강조한다. “나는 기억의 영화감독으로 불려왔지만 언제나 그 이름표를 거절해왔다. 나는 상상을 묘사하는 영화를 만든다. 그 상상이 기억이라는 요소를 포함하고는 있다 해도, 그건 향수가 아닐뿐더러, 우리의 상상이 모든 영역에서 유발할 수 있는 보다 경이로운 것의 문제다. 나는 늘 세잔에 의해 그려진 사과와 정원에 있는 사과 사이의 차이점을 말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하루아침에, 세잔의 사과가 당신이 식료품점에서 가져와 바구니에 담은 사과보다 훨씬 더 당신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일인 것이다.”

상상의 영화, 의식의 영화

레네는 상상의 영향력, 예술의 영향력, 그 행복한 영향력을 말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게 곧 현실의 영향력만큼 가치있다고 믿는 건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의 공통 자질이다. 그러니 우리는 좁게 말해왔고 조금만 본 것인지 모른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기억을 포함한 상상이며 의식에 관한 영화라고 믿으며 한번 보자. 그렇게 하여 운이 좋으면 우리의 감각도 저 무대의 공간처럼 별안간 열리게 되지는 않을는지.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레네의 이 아름다운 영화에 대한 당신의 호기심을 무한정 자극하려는 목적으로 좀 심하게 과장하여 이렇게 말하고 싶다. 결국…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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