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1세기의 프랑스영화를 조망하다
2012-11-20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우리 시대의 프랑스영화 특별전’ 상영작 중 추천작 6편

11월13일부터 12월9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우리 시대의 프랑스영화 특별전’ 17편의 상영작 중 6편을 여기 소개한다. 비교적 그동안 상영 기회가 적었거나, 있었다 해도 조금 더 주목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작품들 위주로 골랐다.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지금까지, 프랑스영화의 현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이번 특별전에서는 올해 타계한 크리스 마르케 감독의 작품 5편도 상영된다. 크리스 마르케에 관심있는 독자는 <씨네21> 867호의 추모기사를 참조하면 좋겠다).

<지방법원 제10호실> 10e Chambre, Instants d’Audience 감독 레이몽 드파르동 / 출연 미셸 베르나르 르퀴앙 / 2004년 / 105분 / 컬러
2003년 5월부터 7월까지, 기자 출신의 레이몽 드파르동은 ‘파리의 경범죄법원’ 내부의 촬영을 허가받는다. 그곳의 열 번째 법정에서 드파르동은 어느 여성 판사가 내리는 판결을 촬영하게 되었고, 그렇게 200여개의 사건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지방법원 제10호실>이 골라낸 사건은 12개가 전부다. 이렇게 선정된 ‘음주운전, 환각제 투약, 여자친구를 괴롭히는 남성’을 다룬 사건들은 대사의 편집 없이 고스란히 영화에 모두 담겼다. 물론 영상이나 컷의 몽타주가 있지만 코멘트는 거의 편집되지 않았다. 감독은 이미 10년 전에 ‘파리 최고재판소’의 여덟 번째 법정을 기록한 영화 <명백한 범죄들>(1994)을 완성한 경력이 있다. 다만 이번에는 배경의 특성상 이전에 비해 가볍고 간결한 사건이 나열된 점이 다를 뿐이다. 비교적 짧고 쉽게 진행되는 판결의 진행을 살피고 있자면 법정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기이하고 인간적이며, 또한 열정적인 장소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별다른 극적 구성 없이도 인간사회의 본질적인 면을 생각하게 만드는 흥미로운 기록영화이다.

<신참경찰> Le Petit Lieutenant 감독 자비에 보부아 / 출연 나탈리 베이, 자릴 라스페로 / 2005년 / 115분 / 컬러
막 경찰학교를 졸업한 앙트완은 사법경찰이 되기 위해 파리로 간다. 그의 경찰 생활은 좀도둑과 알코올 중독자들을 상대하는 등 그의 예상보다 시시하다. 하지만 러시아 범죄자들과 연계된 사건을 좇으면서 그 지루함도 끝이 난다. 1995년 두 번째 장편 <네가 죽을 것을 잊지 마라>로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은 자비에 보부아의 네 번째 연출작으로, 현실과 허구를 잇는 극단적 색채가 완고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도입부의 경찰학교 졸업장면을 비롯해 실제의 사건이나 인물들이 종종 영화에 담기고, 후반부로 갈수록 드라마의 극적 구성은 더욱 치밀해진다. 즉 장르영화와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극이 시작되고 끝을 맺는다. 액션영화의 에너지를 갖췄지만 여성적 색채를 담고 있는 영화로서,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의 색채가 감성적이 되는 게 특징이다. 보부아 감독 특유의 사실적 화면 구성과 디테일한 리액션도 눈여겨볼 만하다.

<둘로 잘린 소녀> La Fille Coupée en Deux 감독 클로드 샤브롤 / 출연 뤼디빈 사니에르, 브누아 마지멜, 프랑수아 베를레앙 / 2006년 / 115분 / 컬러
영화 <둘로 잘린 소녀>의 주요 배경은 리옹시다. 지방 TV방송국에서 기상캐스터로 일하는 가브리엘은 젊은 억만장자인 폴 고당스와 데이트를 하는 동시에, 성공한 늙은 작가인 샤를 생드니와도 불륜을 저지르는 삼각관계를 맺는다. 마침내 폴과 결혼하면서 그녀는 상류사회에 속하게 되지만,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편의 본성이 드러나면서 또 다른 곤란에 처하게 된다. 1906년 뉴욕에서 벌어졌던 실화를 기반으로 만든 영화로, ‘아메리칸 이브’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이블린 네스빗의 이야기를 기본 틀로 삼았다. 1955년과 1981년에 이미 영화화된 적이 있지만, 클로드 샤브롤은 주요 인물의 직업을 바꾸는 등 디테일에 변화를 주어서 다시 이를 변주했다. 이 작품 역시 인간의 열정에 무자비한 칼을 들이대는 샤브롤 특유의 작가적 감수성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부르주아적 삶을 해부해서 보여주는 솜씨가 유려하다.

<알마이에르가의 광기> La Folie Almayer 감독 샹탈 애커만 / 출연 스타니슬라 메하르, 마크 바르베, 오로라 마리온 / 2011년 / 127분 / 컬러
<알마이에르가의 광기>는 조셉 콘래드의 1895년 데뷔작인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콘래드의 말레이시아 트릴로지 중 가장 먼저 완성됐지만 연대순으로는 가장 마지막에 놓이는 이야기로서, 샹탈 애커만의 영화적 감수성이 원작 소설을 어떻게 각색했는지에 관심이 생기는 작품이다. 부각되거나 간소화되는 디테일이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는 원안과 같다. 원주민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백인 남성이 어쩔 수 없이 혼인하고, 그렇게 얻은 혼혈아 딸이 백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지만 결국 자가당착에 빠진다는 이야기이다. 딸 니나를 둘러싼 신비한 공기, 아시아의 정글을 바라보는 애커만의 시선에서 마치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에게서 빌려온 듯 느껴지는 지점들이 종종 발견되기도 한다. 실제로 설치예술가 혹은 영상예술가, 소설가로서 애커만의 전적은 이 작품의 색채에 영향을 끼쳤다. 주인공 가스파르와 딸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유전적 재결합의 뉘앙스를 띠는데, 이는 감독의 현재 상태와도 꽤나 흡사하다. 즉, 화면을 가득 메우는 몽환적인 요소, 추상적 개념들이 응집되면서 영화는 서서히 특유의 로마네스크적 광채를 발하는데, 이는 작품의 개성으로 전면에 드러난다.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 Nostalgie de la Lumiére 감독 파트리시오 구즈만 / 출연 가스파스 칼라스, 라우타로 누녜스 / 2010년 / 90분 / 컬러
1974년 시작된 <칠레전투> 3부작 이후로 줄곧, 파트리시오 구스만은 칠레의 유산에 관련된 작품창작에 몰두해왔다. 이번 영화 <빛을 향한 노스탤지아>에서도 그는 칠레 북부에 위치한 아타카마 사막을 소재로 활용했다. 고도가 높은 데다 건조해서 천문관쪽에 유리한 사막, 그곳에는 거대한 천문관측소가 서 있다. 그 건물을 중심으로 모래밭 위에 각기 다른 두 가지의 상반된 행태가 펼쳐진다. 천문학자들이 거대한 망원경으로 자연을 관찰하는 동안, 칠레의 아낙들은 삽을 들고 사막을 파헤치고 있다. 별과 빛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렇듯 30년의 피노체트의 군사독재 시절에 목숨을 잃은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겹쳐진다. 유해의 일부라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여인들의 모습과 거대한 우주의 외형은 번갈아 이어지고, 마침내 주제가 관객에게 공감각적으로 전달되면서 비로소 영화는 일정 정도의 미적 수준에 도달한다. 즉 잔혹한 역사의 패러독스가 결국 변증법적으로 완벽한 영화적 주제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천문학과 정치학, 고고학을 잇는 감독의 주제의식이 빛을 발한 수작으로 형식이나 주제 면에서 흠잡을 데가 없다. 기억과 시간, 역사와 사라짐의 정서가 철학자의 에세이처럼 사색적인 구도로 나열되는 다큐멘터리다.

<비너스> Vénus Noire 감독 압델 케시시 / 출연 야히마 토레스, 안드레 야콥스, 올리비에 구르메 / 2010년 / 164분 / 컬러
1817년 파리의 국립의학아카데미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학자들이 사라 바트만의 전신 석고상을 바라보며 “이전에 이런 유인원은 본 적이 없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게다가 의자에 앉은 회원들은 조르주 퀴비에가 완성한 바트만의 인체 표본병들을 돌려가며 감상하는 중이다. 커다랗게 튀어나온 엉덩이와 유난히 큰 가슴 등의 외적인 특성 때문에 그녀는 ‘괴물 신체쇼’의 주인공 신세가 된다. 심지어 사후에 밀랍으로 봉인되기까지, <블랙 비너스>는 훗날 ‘호텐토트의 비너스’라 불리는 사라 바트만의 이야기를 꽤 충실하게 극화한 영화다.

튀니지계 프랑스 감독인 압델 캐시시가 메가폰을 잡았다. 그는 중요한 장면의 앵글을 거의 전부 보여리즘(voyeurism: 관음주의)의 시선으로 처리했다. 때문에 19세기 초 유럽인들이 바트만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극장에 앉은 관객 역시 그녀를 훔쳐보는 듯 느끼며 영화를 보게 된다. 실제로 그녀의 육체는 1974년까지 파리의 인류학 박물관에 전시되었다고 한다. 2002년 다시 남아공으로 돌려보내기까지 오랜 기간 유린당한 개인을 영화는 묵묵히 지켜본다. 이 과정에서 인간본성과 윤리, 미디어의 근성과 문명의 이기 등이 꽤나 직설적으로 파헤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