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뤽 고다르의 근작 <필름 소셜리즘>이 개봉할 예정이다. 자세한 논의는 아마 개봉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다(나는 이 영화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보았고, 지난해 여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러므로 우선 머릿속에 떠오르는 세 가지 다른 이야기를 통해 우회하고 싶다.
첫 번째 이야기. 올해 프랑스 대선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정책 중 하나는 ‘아도피법’이었다. 아도피법은 2009년에 도입된 일종의 ‘스리 스트라이크제’로 위법적인 다운로드 단속법을 말한다. 사르코지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진 이 법은 다운로드 유저에게 인터넷상의 저작권 침해의 죄를 물어 형사 처벌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최고 징역 3년에, 벌금 30만유로를 물리게 하고 덧붙여 최고 1년의 인터넷 접속 차단을 명할 수 있다. 대통령 선거 시에 올랑드 후보는 ‘아도피법’을 폐지할 것을 제창했고, 지난 세기에 논의됐던 ‘문화적 예외’와 관련한 내용을 디지털 시대에 적합하게 변용한 ‘프랑스의 문화적 예외 2막’을 이와 관련해 선언했다. 내년 초에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이 발의될 것으로 알고 있다.
두 번째 이야기. 2005년, 프랑스의 음악애호가인 제임스 클레망은 1만3788개의 MP3파일을 불법적으로 인터넷에서 다운로드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기소되었다. ‘다운로드가 시민의 권리’라 말한 클레망의 주장은 온라인 저작권 보호법에 따라 쉽게 무시되었다. 사안의 성격상 언론의 주목을 끌 만한 일은 아니었다. 고다르가 나서기 전까지는 아마도 그랬다. 클레망은 고다르가 자신의 재판 비용으로 사용하라며 1천유로를 기부했다고 발표했다. 고다르는 이미 잡지의 인터뷰에서 프랑스의 온라인 저작권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한 상태였다. 그는 인터뷰에서 “지적재산권이란 없다. 창작자에게는 권리가 없다. 단지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세 번째 이야기. 지난해, 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를 방문한 알랭 베르갈라를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고다르의 절친이자 그와 관련한 방대한 저서를 출간한 평론가이다. 베르갈라는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의 주제가 ‘영화가 없다’라고 말했다.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인데, 말 그대로 ‘필름 소셜리즘’을 증명할 것이 영화 안에는 없다. 고다르의 <아워뮤직>이 지성과 문화로서의 유럽을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그렸다면, <필름 소셜리즘>에는 그런 유토피아적 희망이 없고, 영화가 보여주는 지중해에 떠 있는 거대한 유람선은 공포의 유럽, 소비로서의 유럽, 파멸로 향하는 유럽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고다르는 경멸스러운 유럽을 보여주기 위해 휴대폰의 흉한 화질로 춤추는 사람들을 촬영했는데, 그런 장면들이 고화질의 화면으로 촬영될 가치가 없기 때문이란다. 반대로,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자연의 장면은 고화질의 카메라로 촬영했는데, 이는 아름다운 장면이기 때문이다. 마치 화가가 그림의 투박한 부분을 표현하기 위해 큰 붓을 사용하고, 새를 그리기 위해 세밀한 붓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고다르는 이 영화에서 필름이 아니라 다양한 디지털 붓을 사용했다.
이제 지난 세기의 것이 되어버린 필름과 소셜리즘
이 세 가지 기억의 공통의 화두는 아마도 국가, 저작권법, 권리, 디지털, 유럽, 소셜리즘 등이 될 것이다. 여기에 복잡한 관계들이 있다. 가령 <필름 소셜리즘>은 제목 그대로 ‘필름’과 ‘소셜리즘’을 결합한 영화다. 그러나 이 둘을 묶는 공통의 지 평은 애매하고, 현실은 더더군다나 망연자실하다. 필름이 이제 사라지고 있고, 소셜리즘은 마찬가지로 지난 세기의 낡은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제목과 달리 철저하게 디지털로 만들어진 영화다. 그러니 필름에 의해 소셜리즘을 되돌아본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 둘의 결합이 환상이나 상상적인 것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물론 우리는 이러한 상상을 ‘사상은 우리를 나누고 꿈은 우리를 이어준다’라는 고다르의 내레이션과 연관해 생각해야만 한다. 물론 종종 그러한 꿈은 악몽이기도 하다). 불법복제와 허락받지 않은 공공상영은 불법이라는 FBI의 경고문을 보여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래서 차가운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고다르는 탁월한 이미지의 수집가인 데 반해 앞서 인용한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철저히 저작권을 부정한다. 누벨바그의 작가로서 고다르는 태생적으로 이미지의 도둑이었다. 이미지를 수집, 보존, 활용하는 것에는 언제나 위법성이 따른다. 비합법적 거래나 카피에 손을 댄 수집가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고다르적 이미지 교육학의 선생이었던 랑글루아가 영화 저작권의 소유자에 경의를 표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아카이브에는 비합법적 카피나 컬렉션이 있었다. 이미지에의 공공적 접근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불법을 저질러야 한다(가령 고다르는 영화탄생 100주년작인 <2×50 프랑스영화의 역사>에서 멜리에스의 후손들이 멜리에스 영화의 상영과 관련해 권리를 주장한 것을 비난했다). 국민적이고 국제적인 법이 제작자의 권리를 보호하지만, 대중이 영상의 유산적 가치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는 보호받지 못한다. 그 결과 이미지의 상당 부분이 한계를 갖게 되었고(그런 점에서 역사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사실상 권리상의 싸움이다), 나쁜 결과가 만들어진다(영화사의 경험의 불가능성, 불법적인 수단을 통한 영화에의 접근, 표준 이하의 버전과 포맷을 통한 불법적 보기로 인한 이미지 퀄리티의 하락 행보등). 고다르는 그리하여 지적소유권을 도발적으로 부정하면서 ‘필름의 소셜리즘은 소유권’이라는 관념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작품의 소유권 따위는 있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필름과 소셜리즘을 결합하면서 고다르가 디지털을 끌어들이는 것은 그래서 이중적 의도가 있다 하겠다. 그 하나는 베르갈라가 말한 것처럼 지금의 사회가 필름의 퀄리티로 찍을 필요가 없을 만큼 암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굳이 필름을 끌어들여 아름답게 찍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이는 <사랑의 찬가>에서 디지털을 회화처럼 활용한 것과는 다르다). 한편, 디지털의 활용은 필름 다음에 디지털이라는 위계성과 필름만이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특권성을 부정하는 함의를 지닌다. 소셜리즘에 집중한다면 필름의 소셜리즘은 필름의 특권성을 고집하는 것을 멈추고, 다른 매체와 이미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즉, 모든 종류의 이미지에 권리를 주고 이미지에 급진적인 평등성을 부여하는 것이 (긍정적이든 아니든 간에) 이미지의 소셜리즘이다. 그런 식으로 <필름 소셜리즘>에는 다종다양한 이미지의 이종교배가 있다. 전편이 디지털의 HD 캠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게다가 상당수의 다른 극영화나 기록 영상으로부터의 인용이 <영화사>에서처럼 등장한다. 디지털의 압도적인 장면은 1부를 장식하는 대형 여객선의 화려한 외용이다. 휴대전화와 디지털카메라의 동영상으로 찍은 저해상도의 영상들, 대형 스크린, 모니터 등 오늘날의 즐비한 영상 환경의 풍경이 펼쳐진다. 권리상 이러한 이미지들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평등하게 존재한다. 그게 지금의 이미지의 풍경이다.
사상은 우리를 나누고, 꿈은 우리를 이어준다
이 영화에 그렇다고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세 가지 이야기를 상정할 수 있는데,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스페인 내전 시 스페인 은행에서 사라진 대량의 금화를 둘러싼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다. 이는 돈과 영화와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자 자본주의와 영화와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알랭 베르갈라의 설명을 빌리자면 이는 고다르가 끊임없이 제기한 ‘역사는 왜 늘 나쁜 길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의 답변이다. 돈(의 순환)은 결국 악의 근원이다. 돈이 모이는 스위스에 살고 있는 고다르다운 질문이다(여담이지만, 고다르는 자파르 파니히를 수감시킨 이란을 비난하는 영화인들이 왜 폴란스키의 체포를 용인한 스위스를 비난하지 않는지를 의심했다). 두 번째 이야기는 프랑스의 시골 마을에서 주유소를 경영하는 마르탱 집안의 이야기로, 글로벌화되어가는 현대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고다르에게 글로벌화란 ‘하나’의 국가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는 <사랑의 찬가>와 <아워뮤직>에서 반복 인용되었던 것처럼 개인과의 충돌을 빚어낸다. 왜냐하면 ‘국가가 요구하는 환상은 하나이지만, 개인의 꿈은 둘이 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아이는 선거에 입후보해서는 안되는가’라는 질문이 터무니없게 제시되는데, 여기서 아이는 어떠한 권력도, 국가도 원치 않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모색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이 아이는 ‘Be 동사를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데, 모호한 말이지만 디지털이 구성하는 0과 1로 구성된 세계가 결국 ‘무’와 ‘하나’의 세계로 귀착하기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소셜리즘은 여기서 둘이 함께 서 있는 꿈을 꾸는 개인을 긍정하는 것으로 부각된다. 0과 1을 넘어선 셋에의 강조는 또한 ‘한명은 다른 이의 안에 있고, 다른 이는 한명 안에 있다. 그래서 이는 세명이다’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또한 (디지털과는 다른) 이미지에 대한 고다르의 인식을 반영한다. 이미지 또한 하나(안의 하나)와 다른 하나(안의 하나)의 둘의 결합인 셋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야기는 철학, 민주주의, 비극의 기원으로서의 서양 문물의 기원을 만들어낸 그리스에 관한 비감한 시선을 담고 있다. 알다시피 이 부분은 지난 그리스의 경제 위기의 현실을 반영한다. 유럽연합이 그리스의 위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것과 관련해 고다르는 그리스에 빚진 유럽국가가 임무를 망각하고 있다고 힐난한다. 이는 그리스에의 채무를 저버린 것이다. 가령 철학, 민주주의, 비극, 논리학 등 모든 것들이 그리스에서 기원했다면, 그리스는 마땅히 거액의 저작권료를 현대의 세계에 요구할 수 있고, 세계는 그리스에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 고다르의 (괴이한) 논리다. 하지만 이상한 일도 아니다. 만약 저작권을 주장하는 것이 국제적 규범이라면 그리스는 저작권상 그러한 지불에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진 또 하나의 이야기는 <아워뮤직>에서도 제기된 팔레스타인과 관련한 문제다.
<필름 소셜리즘>에는 팔레스타인 저술가 에리아스 산바르가 출연하는데, 그는 ‘1839년부터 현대까지의 토지와 그 인민의 사진’을 저술했던 자이다. ‘팔레스타인이 최초의 사진가를 맞아들인 것은 1839년이다’라는 앨범의 문장이 인용되는데, 이 부분은 꽤 복잡한 내용이지만 고다르의 전작들(<여기와 저기> 혹은 <아워뮤직>)을 떠올린다면 단지 일원적인 권력에 의해 볼 수 있는 세계, 즉 자본이 보여줄 수 있는 세계로 인해 실종된 영상으로서의 팔레스타인의 이미지와 관련한 문제제기라 할 수 있겠다. 가령 영화의 한 장면에는 ‘내 소중한 땅 팔레스타인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실종된 영상을 암시하는 말이 나온다. 고다르의 특별함은 유럽 작가로서는 그가 거의 예외적으로 팔레스타인을 영상의 문제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말하는 이들은 많으나 팔레스타인을 언급하는 작가는 적고도 고귀한 편이다. 영화에 대한 사랑이 실제로는 사라진 영상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말한 세르주 다네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다르는 진정으로 영화를 사랑한 작가다.
언어의 저편, 사상의 저편
<필름 소셜리즘>은 알랭 베르갈라의 지적대로 음울한 영화다. 소셜리즘과 필름이 이제 지나가버린 것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다르의 소셜리즘은 단순한 이념은 아니다. 그것이 사상이나 이데올로기, 혹은 언어라면 그의 말대로 우리를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 것이다. 고다르는 이데올로기, 사상, 언어로서의 소셜리즘에는 불신을 드러내는 듯하다. 아이와 동물들이 영화에 많이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이는 말을 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하고, 마찬가지로 동물들도 언어 이전의 언어로 말한다(고다르는 농담처럼 만약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천 마리의 개를 끌고 나오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 말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개들이 서로 반가워하는 통에 언어 이전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눌 때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나눠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두 가지의 가능한 길이 남았다. 그 하나는 FBI의 (저작권)법의 문구에 앞서는 ‘법이 올바르지 못할 때, 정의가 법에 우선한다’는 저항의 길. 다른 하나는 디지털의 0과 1의 저편, 언어의 저편, 사상의 저편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작별의 인사가 될 것이다. 고다르의 신작이 ‘언어와의 작별’(Adieu au Langage)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필름 소셜리즘>은 고다르의 끝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