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박근혜 후보가 이 영화를 봤으면 한다”
2012-11-27
글 : 강병진
사진 : 오계옥
<남영동1985>의 정지영 감독

지난 1월, <부러진 화살>이 개봉할 당시 <씨네21>은 <의뢰인>을 연출한 손영성 감독에게 정지영 감독의 인터뷰를 부탁했다. 그때 인터뷰 장소에 도착한 정지영 감독은 “오늘 이 약속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곳이 있었다”고 말했다. “오늘이 김근태 의원의 영결식이더라고. 아침 8시에 영결미사로 시작해서 10시에 청계5가에서 노제를 지낸대요. 그리고 마석 모란공원으로 가는 거 같은데, 여기에 딱 걸렸어. 그래서 나는 어제 추모미사를 드렸어요. 내가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여하튼 한번은 인사를 해야겠다 싶어서….” 그 이야기를 들은 손영성 감독은 “딸 결혼식을 앞두고 병원에 들어가서 운명하신 거나, 고문당사자는 목사가 됐다는 그런 씁쓸함이 영화의 에필로그에 나올 법한 이야기 같다”며 “한 이상주의자가 현실에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패퇴하는 모습이라고 볼 때, 감독님 영화 속의 캐릭터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고 답했다. 그로부터 1년이 채 되지 않아 <남영동1985>가 공개됐다. 그때 한번은 인사하고 싶었다는 정지영 감독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와의 인터뷰는 이 질문으로 시작했다.

-김근태 의원의 추모미사에 참석했을 때, 이미 <남영동1985>의 연출을 계획했던 건가요.
=그때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다만 예전부터 고문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마음은 있었죠. 김 의원이 돌아가신 뒤에 수기를 읽고서 선택한 거예요. 추모미사라도 꼭 참석하려 했던 건 일종의 빚 때문이었어요. 동시대 사람들의 생각이 모두 같겠지. 수많은 사람들이 민주화를 갈망했고, 투쟁했고,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험악하게 당했으니까. 나에게도 부채의식 같은 게 있었던 거겠죠.

-실제 사건은 이미 그 당시 재판을 통해 알려졌어요. 감독님에게는 <산배암>을 연출하기 전의 시기입니다. 그때는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방송국에 있을 때였는데, 물론 그때도 이야기를 들었죠. 마음속으로는 정말 많이 분노했지. 하지만 그때 나는 일과 생각을 구분하는 게 몸에 배어 있었어요. 기껏해야 <완장> <지지배배> 같은 드라마에서 우화적으로 녹이기는 했지만 많이 아쉬웠어요.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상징성을 통해 메시지를 녹여내는 걸 더 예술로 평가하잖아. 그런데 나는 그게 성에 안 차요. 약간 피해가는 것 같으니까. 마음에서부터 문제를 똑바로 보기를 원하는 것 같아요.

-당시 억울하게 고문당했던 일반인들의 사연도 취재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어쩌면 김근태 의원보다 그들의 이야기가 더 영화적이지 않았을까요.
=그렇죠. 대중적인 확산을 고려할 때도 일반인으로 설정하는 게 맞아요. 하지만 누구를 선택하든 이 영화의 구조는 고문실에 가둬두는 것이기 때문에 차이가 없어요. 그리고 그 과정을 디테일하게 묘사한 유일한 기록이 김근태 의원의 수기였어요.

-<부러진 화살> 인터뷰를 할 때 손영성 감독도 말했지만, 김근태라는 사람이 감독님이 그려온 주인공과 닮은 부분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하고, 결국 무너지고 마는 과정에 놓여 있는 점이 그렇습니다.
=나로선 김근태라는 사람에 다가가기가 좀더 수월한 것이 사실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질 수밖에 없는 사람을 그려왔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런 사람들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에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알량한 민주주의도 그들의 패배를 딛고서 나온 거잖아요? 사람들은 평소 ‘함부로 덤비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요. 그래도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되면 조금씩 자기반성을 하고 용기를 끌어내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부분이 있죠.

-영화는 정말 대부분의 시간을 고문실 안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결정한 이후에도 부딪히는 부분이 많았을 것 같아요.
=시나리오를 같이 쓰던 사람들도 이건 너무 무모한 게 아니냐고 했어요. 초고 모니터링을 부탁한 사람들도 고문실 밖의 상황을 가끔은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고요. 비주얼로서도 관객이 덜 지루하게 느낄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밖의 이야기가 들어오면 고문실 안의 고통이 희석될 게 분명했어요. 솔직히 나도 그런 유혹에 넘어갈 뻔했지만 결국 가둬놓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요.

-<남영동1985>에서 받아들이기가 가장 난감했던 것이 이두한이란 남자였습니다. 고문기술자인 그는 자신이 다른 고문실 직원보다 우월하다는 걸 알고, 또 자신을 향한 경외의 시선을 즐기는 인물입니다. 무엇보다 그가 행하는 고문 기술은 상당히 섬세하고 우아합니다. 어느 순간에는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 캐릭터에 감독님도 영화적인 매혹을 느낀 건 아니었나요.
=어떤 친구는 이두한이 나올 때마다 욕이 나온다고 하던데? (웃음) 매혹을 느낀 건 아닌데, 일단 그를 전문가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전문가는 자기 일에 자신감을 갖고, 또 그 일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잖아요? 그의 성취감을 어떻게 표현할까 하다가 설정한 게 휘파람이에요. 명계남이 연기한 박 전무와 차별화하는 방법도 필요했어요. 박 전무는 출세를 위해서 김종태를 고문하지만, 이두한은 그걸 넘어서는 거지.

-이두한이 대표적이기는 하지만, 고문실 직원들은 이 영화에서 묘한 활력을 줍니다. 이 느낌을 활력이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인데, 그만큼 상당히 살아 있는 인물로 보입니다.
=실제 고문을 집행한 사람들은 한명도 못 만나봤어요. 후배 중에 경찰관이 있어서 물어봤는데, 누가 나서겠냐고 하더라고. 영화의 가해자들은 실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서 만든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오래 같이 있다 보니 친해질 때도 있었다고 했어요. 유숙렬씨는 스톡홀름 콤플렉스를 이야기했어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동정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게 더 무섭지.

-실제 고문의 종류는 영화에서 묘사된 것보다 더 많았을 것 같아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말 엄청나게 많더라고요. 사람을 매달아놓는 통닭구이 고문도 있고, 심지어 볼펜 심을 요도에 집어넣거나 손톱 밑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고문도 있었어요. 내가 그런 걸 배제한 이유는 간단해요. 그런 고문을 보여주면 끔직함은 더하겠지만, 아픔으로 다가오지 않겠더라고. 하지만 물고문 찍을 때는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배우가 실제 고문을 당해야 하는데, 어디서 컷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남영동> 수기를 읽으면서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고문을 당하는 동안 라디오에서 아름다운 음악이 나오는 식의 묘사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 같아요.
=수기에는 라디오에서 들리는 아나운서들의 멘트와 음악, 비명소리, 기차소리가 다 등장하죠. 나도 고민했지만, 집중적으로는 생각하지 말자고 했어요. 라디오 아나운서 멘트를 선택하려면 허락을 받아야 하는 문제가 있었고, 음악을 쓰려고 해도 돈을 줘야 하니까. 이 영화는 저예산이잖아요. 어쨌든 라디오는 비명소리를 바깥으로 들리지 않게 하려는 목적으로 틀어놓은 거니까 다른 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봤어요. 그래서 강 과장을 야구팬으로 만든 거지. 옛날에 실제 중계했던 내용을 떠온 거예요. 방송국이랑 이야기가 잘돼서 돈은 안 들었어요. (웃음)

-김종태가 파리를 보는 장면은 어떤 맥락에서 고민한 건가요.
=파리에 대한 질문은 처음 나왔어. 아무도 그걸 묻지 않았는데…. 그런데 내심 그 질문을 안 해주었으면 했어요. 내가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너무 그것에 집중할까봐. 이 인터뷰를 읽어보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는 않겠지만(웃음), 그 대답을 나에게 들으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CG를 한 친구에게 들을 수 있을 거예요. 원하는 그림이 있어서 조감독을 통해 내 의도를 전했는데, 그 친구가 말하길 “이건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거예요. 내가 안 한다고 했더니, 자기가 말하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어요. 사실 나로서도 누가 알아주기를 원해서 만든 건 아니에요. 영화감독은 때때로 그렇게 남들이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고집을 부리는 경우가 있어요. (웃음)

-영화가 준비한 클라이맥스와 관객이 예상한 클라이맥스가 다릅니다. 후자는 김종태의 몸이 온전히 보이는 장면이 아닐까 싶은데요.
=나체를 드러낸다는 개념으로 보기 이전에 김종태가 혼자 누워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장면이에요. 그가 그곳에 홀로 있는 걸 한번은 보여주고 싶었어요. 나체를 보여줄 때도 고민한 게 있었죠. 사실 리얼하게 가려면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보여줘야 하는데, 아직 한국 관객의 정서가 그런 모습을 받아들이기에는 어렵잖아요. 되도록 가리고 찍어야 해요. 그런데 끝까지 그렇게 가리면 너무 우스운 영화인 거야. 그래서 한번은 온전한 모습이 나오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마지막 장면이 아무래도 가장 많은 고민을 통해 선택했을 것 같아요.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고민하지는 않았죠. 김근태 의원은 실제로 감옥에 있는 이근안을 만나고 나와서는 ‘나는 지금 장관이고 그는 지금 감옥에 있는데, 왜 용서를 못했나. 내가 그렇게 졸렬한 사람인가’ 생각했다고 해요. 어쩌면 우스운 고민이 아닐까? 자기가 용서한다고 그가 용서되는 게 아니잖아. 마음이 편해질 뿐이지. 다른 사람이 용서한다면, 용서가 될까? 신이 있다면 신의 몫이겠지만, 용서를 할 수 있냐 없냐로 결정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일 수 없는 거지. 관객도 마음이 복잡해 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더 복잡할 것 같습니다. 부산영화제에서는 이 영화가 대선에 영향을 주기를 원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장 첨예하게 갈등하고 있는 부분이 과거사니까요. 대통령 후보들의 인식이 중요할 수밖에 없어요. 나는 박근혜 후보가 이 영화를 보기를 바랐어요. 사람인 이상 함께 아파하고 눈물이 나지 않을까? 그 뒤에 자신의 감정을 정리해서 느낀 바를 진정성있게 전달하면 과거사 인식에 관한 우려를 말끔히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 시사회에 대선 후보들을 초청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예요. 그들의 말과 대중의 말이 서로 피드백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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