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왜 하필 <클레멘타인>이었을까. 영화 속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김근태 코에 수건을 덮고 물을 부으면서 이 곡을 휘파람으로 불었다.
내 고등학교 시절, 일제시대 때 지은 커다란 강당 2층에 음악실이 있었다. 강당 옆 아카시아 꽃들이 하얗게 늘어지고, 향기가 교실 창문을 넘어오던 어느 초여름날. 까까머리들은 선생님 피아노에 맞추어 목청껏 이 노래를 불렀더랬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어떤 녀석들은 제풀에 눈시울도 조금 붉어졌다. 한때 그 고문기술자가 고등학교 선배라는 소릴 어디서 들었었다. 그도 까까머리 시절 그 음악실에서 나처럼 눈시울 붉히며 이 노래를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1985년 9월 남영동에서 전기고문, 물고문에 못 견뎌 나는 발가벗기고 두눈이 가려진 채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면서 항복한다고, 용서해 달라고 두손으로 빌었다. 그때 고문자인 김수현, 백남은, 그리고 고문 전문기술자 이근안 얼굴에 번졌던 소리없는 웃음. 그 웃음을 나는 절대로 잊을 수 없다.” 김근태는 항소이유서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김근태 선배 생전에 이 사건 재심을 부탁받았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지난해 가을 자세한 이야기가 듣고 싶어 연락을 했다. 그런데 그는 그 옛날 고문 후유증으로 병원에서 사선을 넘나들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인 지난해 12월 영영 이 세상을 떠났다. 진즉에 서둘러서 돌아가시기 전 무죄판결을 받아드리지 못한 회한이 남았다.
영화 시사회날, 나는 하루 종일 재일동포 ‘간첩’인 이헌치 이야기에 대해 다른 글을 쓰던 중이었다. 그도 극심한 고문에 못 이겨 북한에 갔다왔고 간첩질도 했노라 허위자백하고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수사관이 미리 쓴 진술서를 그대로 베꼈다. 그가 북에서 공연을 보았다는 만수대 극장은 당시에는 있지도 않은 건물이었다. 내가 다루었던 조작간첩사건에선 이런 엉터리 코미디가 흔하다. 강희철 ‘간첩’은 당시 있지도 않았던 노선의 버스를 타고 군사시설에 접근했고, 있지도 않은 서점에서 지도를 사서 북에 보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다. 영화 <남영동1985>에도 똑같은 대목이 나온다.
영화 내내 물속에 처박히고, 고압 전기에 감전되어 버둥대는 김종태의 얼굴에서 이헌치, 강희철, 인혁당 사형수들의 얼굴이 겹쳤다. 오랜 세월 내가 법정에서 내 의뢰인들에게 묻고, 대답을 듣던 그 끔찍한 일들이 떠올랐다. 때리고, 물에 넣고, 전기로 고문하는 모습에 불과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너무 고통스러웠다. 옆자리에 앉은 아내도 훌쩍였다.
현실은 지어낸 이야기보다 더 잔인하다. 영화 <피에타>의 젊은 청춘은 사채업자에게 고용되어, 돈 못 갚는 사람들의 손가락을 자르고, 정강이를 부러뜨리고, 옥상에서 등을 떠민다. 그래도 뒤늦게 나타난 ‘엄마’ 때문에 자기 죄를 보속한다. 손가락이 잘린 피해자 아내의 트럭 밑에 숨어들어가 자기 몸을 쇠사슬로 묶고는 차가 달리자 하얗게 눈덮인 신작로를 빨간 피로 물들였다. 그런데 김근태를 벌거벗은 몸으로 개처럼 기어가게 만들었던 이근안은 목사님이 되었다. 혹시 그는 남들에게 회개하라며 외치고 다닐까. 아아, 정말 그도 까까머리 시절 그 음악실에서 나처럼 눈시울을 붉히며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을 불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