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들어본다. 영상이 절로 머릿속에 그려진다. 눈을 뜨고 바라본다. 화면을 해설하는 자막과 배우들의 목소리가 함께 들려온다. 영화를 입체적으로 보는, 아니 듣는 신기한 경험이다. 11월16일 토요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2012 배리어프리영화 포럼의 주요 행사인 한일 국제포럼이 열렸다. 배리어프리(barrier free)란 장벽을 없앤다는 말로 장애인과 비장애인간의 물리적, 제도적 장벽을 허물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운동이다. 얼마 전부터 영화계에도 이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선진국의 척도는 그 나라의 장애인을 얼마나 배려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처럼 한국영화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필수적인 일임에 분명하다. 최근 시청각 장애인들도 영화를 보고 들을 수 있도록 국내에서도 조금씩 제작, 보급되며 그 저변을 넓혀가고 있는 배리어프리영화에 대한 소식은 분명 긍정적이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걸음마 단계이다.
‘배리어프리’라는 말 그대로 한국, 일본, 장애인, 비장애인, 전문가, 비전문가의 장벽 없이 배리어프리영화를 알리고 보급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기획된 이번 포럼은 단순히 비장애인을 향한 홍보의 장을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갈 배리어프리영화의 제작 방향에 대한 진지하고 깊이있는 토론의 한마당이었다. 포럼을 주최한 사단법인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는 2011년 10월 발족한 이래 그간 <술이 깨면 집에 가자> <블라인드> <마당을 나온 암탉> <도가니> <완득이> <도둑들> 등 다양한 영화를 배리어프리영화로 제작해 선보인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 배리어프리영화 발전의 다음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 이번 포럼을 준비했다. 그간 짧은 기간과 경험에도 불구하고 국내 배리어프리영화는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국내 최초로 일본영화 <마이 백 페이지>를 일반영화 버전과 배리어프리영화 버전으로 동시개봉한 데 이어, 한국영화 최초로 배리어프리 버전으로 제작된 <달팽이의 별>을 개봉하여 호평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다양한 장르영화가 배리어프리 버전으로 다시 제작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크고 작은 실수부터 뜻깊은 성공까지,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작업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해본 이번 자리는 ‘효과적인 영화의 화면해설을 위하여’라는 대주제 아래 한일 양국의 관계자들이 모여 배리어프리영화의 미래를 그려나갔다.
배리어프리영화는 단순한 변환이 아니다. 창작자인 감독의 참여, 시청각 장애인들의 꼼꼼한 모니터와 전문배우와 성우들의 풍부한 감정표현, 작품에 맞는 전문적인 대본이 있어야 가능한 또 하나의 창작작업이다. 일본, 한국의 포럼 참가자들은 양국에서 활발히 활동해온 전문가들답게 이러한 지점에서 인식을 공유하며 각자의 경험과 사례들을 풀어냈다. 포럼 1부는 일본의 배리어프리영화 현황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영화음성해설 전문회사 B-MAP의 대표이자 현재 활동변사로 활동 중인 사사키 아키코와 영화전문화면해설작가로 활동 중인 마쓰다 다카코는 각각 오픈 방식과 폐쇄 방식의 배리어프리영화들을 대표하며 화면해설 작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오픈 방식과 폐쇄 방식의 차이와 장점
화면해설과 자막이 영화에 다 들어가며 현장에서 변사가 직접 관객에게 화면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는 오픈 방식은 그 생생함으로 인해 장애인은 물론 비장애인에게도 신선한 경험을 제공한다. 사사키 아키코 대표는 “오픈 방식은 시각장애인이 비장애인과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다. 비장애인도 함께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점에서 장벽을 없앤다는 배리어프리영화의 취지에도 잘 어울린다”고 밝혔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본격적인 발표에 앞서 시연된 <술이 깨면 집에 가자>의 라이브 화면해설은 그 자체로 신선한 경험이었다.
반면 무지개와 네이로 프로젝트 대표로 화면해설 제작일을 시작한 전문화면해설작가 마쓰다 다카코 작가는 폐쇄 방식의 장점을 일러주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어폰을 쓰고 화면해설을 듣는 폐쇄 방식은 소리의 유무를 선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난청인 분들은 화면해설이 잡음으로 들리는 경우도 있고 폐쇄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오픈보다 폐쇄를 좋아하기도 한다”고 한다. 화면해설에 좀더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과 사용자의 능동적인 선택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보급문제에서 폐쇄 방식이 더 자주 이용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것이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과 선택의 문제이며 더 나은 방식이 개발될 경우 환경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히려 이런 토론을 통해 좀더 나은 방식에 대한 힌트를 얻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두 사람의 모습은 경계없는 어울림, ‘배리어프리’ 그 자체였다.
제작의 어려움, 전문 작가의 필요성도 언급
이후 이어진 2부에서는 한국에서 활동 중인 두명의 작가가 나와 한국 배리어프리영화의 현재와 작가 양성에 관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사)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의 장현정 화면해설작가는 그간 장르영화를 배리어프리 버전으로 만드는 데 겪었던 어려움을 조목조목 알려주었고, 부산시청자미디어센터의 정수진 화면해설작가는 전문인력으로서 화면해설작가의 양성과 지원방향과 함께 화면해설작가가 갖춰야 할 조건에 대한 조언을 이어나갔다. 모두 화면해설작가는 단순히 상황을 묘사하거나 기계적으로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정서와 감정의 전달까지 표현해야 하는 또 하나의 창작작업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정수진 작가의 말에 따르면 “화면해설작가는 상당한 교육이 필요한 고급인력이며 질적 향상을 위해서는 정기적인 교육과 활동창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대본작업부터 감독과 함께해야 섬세하고 미묘한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고 상황이 허락한다면 시청각 장애인들의 감수도 필요하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마지막 3부에서는 양국에서 활동 중인 전문 인력들의 토론의 장이 열렸다. 혼자서는 알 수 없을 업계 전반의 현황을 파악하고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고자 상대에게 의견을 구하는 진정한 의미의 열린 토론이었다. 제작과정에서부터 감독의 참여가 필요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마당을 나온 암탉>의 감독이자 그간 배리어프리영화 제작에 활발히 참여해온 오성윤 감독은 “상황이 허락한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본다. 작가와 미팅을 해서 제작연출 의도를 공유하고 그렇게 나온 초고를 보고 감독으로서 방향성을 제시 뒤 수정해야 한다. 장애인들에게 직접 감수를 받는 작업도 있었으면 좋겠다. 만들고 나니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고 밝히며 화면해설작가들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한편 그동안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앞서 있다고 생각한 일본 배리어프리영화들의 상황도 그리 낙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사키 아키코 대표는 “일본에서는 여러 단체가 일을 하고 있어 아직 하나로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다. 네트워크와 교류가 그리 활발한 것도 아니고, 규칙 같은 것이 정리되어 있지 않다”고 밝혔다. 마쓰다 다카코 작가도 “400편 중 극장에서 완전한 형태로 상영되는 배리어프리영화는 연간 3~4편에 불과하다”며 아직도 갈 길이 험난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며 점차 시장도 확대될 것이라는 데는 모두 한마음으로 뜻을 같이했다. 특히 모두들 화면해설이 재창조 작업이며 배리어프리영화가 단지 장애인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 비장애인에게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들을 제공하는 영화라는 점을 강조했다. 낮은 문턱부터 높은 담벼락까지 서로를 가로막는 장벽을 허물고 모두 함께 영화라는 광장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눈 자리였다. 소통과 변화는 이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