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형 히어로물의 끊임없는 진화
2012-12-04
글 : 이화정
사진 : 최성열
<트레이스> 고영훈

‘미친분량.’ 고영훈 작가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다. 미안하지만, <트레이스>를 보면 이런 과격한 언사를 수정할 생각이 안 든다. 지금까지 총 200회가 넘는 분량. 2007년부터 다음 만화속세상에 연재하기 시작했고, 5년째인 2012년 <트레이스>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플 때 빼고는 항상 <트레이스>를 그렸다.”

지금은 1.5버전을 통과한 잠깐의 휴지기. 2기는 내년 초에 들어갈 예정이다. “평생을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다. 안 끝났으면 좋겠다.” 마블코믹을 즐겨봤고, 우리나라에도 그런 히어로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다. 분량만큼이나 <트레이스>는 다양한 이야기로 그 긴 시간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아왔다. 후천적 트레이스가 된 소년 강권의 이야기로 시작된 <트레이스>는 어느덧 트레이스의 운명으로 가족을 잃은 평범한 가장 윤성의 비극을 다룬 ‘거지’, 트레이스의 운명으로 사랑을 놓친 비극적 연애담 ‘장미’, 트레이스를 이용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시도를 파헤친 ‘난’에 이어 트러블의 정체에 본격적으로 다가서는 ‘교류자’에 이르렀다. 할리우드 슈퍼히어로가 가진 엄청난 초능력, 화려한 의상 없이 부성애가 강조되는 1기의 스토리라인 때문에 그간 그의 작품은 ‘한국적 히어로 장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 “히어로물이 워낙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다. 가족애는 그 간극을 좁혀줄 장치였다. 1년 연재를 계획 중인 2기 때는 좀더 사회적인 이야기로 풀어나갈 계획이다.” 감질나지만, 고영훈 작가의 원대한 계획에 대한 힌트는 여기까지다.

방대한 원작의 무게에 눌려서일까. 실은 한재림 감독이 만든다는 SF <트레이스>도 아직 감감무소식이긴 하다. “중단된 게 아니라 아직 시나리오 작업 중이다. 아마 전체를 다 요약하려는 의도였던 거 같은데, 지금은 다시 한편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조바심을 내는 대신 새로운 작품들을 연재해왔다. 듣지 못하는 여자와 보지 못하는 남자의 연애담을 그린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사랑해>에 이어, 액션무협활극 <외발로 살다>도 연재 중이다. 이들 작품과 <트레이스>와의 연관성을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좀 궁하다. 두 작품 모두 눈물을 쏙 뽑게 한다는 점에서 고영훈 작가에게 기대하는 작품과는 사뭇달라 보인다. 2006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디지털 만화대상을 수상한 <도깨비>가 히어로물의 도깨비 버전이라고 할 판타지물이었고, 다음 만화속세상에 연재한 <장마> 역시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그린 장르물이었다면, 일종의 지각변동인 셈이다. “<트레이스>를 쉬면서 이런 작품들을 내놓으면 다들 어울리지 않게 왜 이러냐고 다그친다. (웃음) 근데 원래 내 성향을 따지자면 이쪽에 가깝다. 그래서 <트레이스>와 <장마>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걸 그릴 땐 너무 힘들다. 몸살이 걸릴 정도로 몸도 아프다.”

순한 인상, 조곤조곤한 말투. 직접 만난 고영훈 작가를 보면 그의 말마따나 <트레이스>를 어떻게 그리나 싶을 정도다. 그럼에도 그는 조용히 욕심 부리는 스타일이다. 만화, 영화, 춤을 모두 좋아했고, 이 모두를 실현해나가는 중이다. 웹툰 작가 이전에 그는 코요태, 젝스키스, 이정현 등의 백댄서 활동을 한 경력이 있다. “댄서는 나이 들면 오래 못하니 힘들어도 장래성있는 걸 하자고 시작한 웹툰이었다. 군대 가기 전에 <트레이스>를 구상하고, 가서는 남는 시간에 캐릭터 컨셉 잡고, 내용을 구상했다. 그림에 소질이 없어 못 그린다는 소리를 들으니 더 해봐야겠다는 오기가 생기더라.” 사실 그는 꽤 오랫동안 영화화할 웹툰을 그려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고 한다. 언젠가는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생각에 만화의 표현방식 대신 영화처럼 컷을 분할하고, 시간을 늘리거나, 풀숏과 줌 기법을 사용해온 것이다. 제작자를 만나면 “만화에서 영화가 보인다”고 할 정도였다. “그동안 영화화 생각에 내가 좀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연재 중인 <외발로 살다>는 그래서 기존의 내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게, 만화에 가깝게 가려고 했다. 그러니 오히려 독자들 반응이 더 빨리 오더라.” 소재와 스토리만으로도 <외발로 살다>는 3회 만에 세 군데 제작사에서 연락이 왔고 영화화가 진행 중이다. 차츰차츰 자신의 방법을 찾아가는 단계지만, 아직도 독자가 무섭고, 신인 같은 마음이 크다. “언제쯤 나도 윤태호 작가처럼 되나 싶다. (웃음) 팬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작아진다.” 만화가의 재능을 타고난, 운명을 거부 못하는 능력자란 면에서 그는 작품 속 ‘트레이스’와 똑 닮아 보인다. 대체 그 능력은 어디서 나올까? “<무한도전>에서 나온다. (웃음) 광팬이다. 작업할 때도 계속 틀어놓고 영감을 얻는다.”

싱글 음반 한번 내볼까

-최근 가장 주목하는 웹툰.
최종훈 작가의 <은밀하게 위대하게>. 비슷한 면이 있는지 독자들이 착각을 많이 하더라. 나한테 <은밀하게 위대하게> 잘 봤다고 하고, 훈이 형한텐 <트레이스> 잘 봤다고 하더라. 강풀 작가 작품은 볼 때마다 엄청 울고 좋아한다. 웹툰 작가 외에 양경일 작가의 <소마화전기>도 좋아한다. <원피스>의 오다 에이치로는 최고다. 거의 인간이 아닌 것 같다.

-작업 이외의 시간에는 뭘 하나.
=춤추거나 노래 만들거나 그런 거 한다. 작품할 때마다 배틀 만들어서 올렸는데 나중에 싱글음반을 내볼까도 생각 중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랩 연습을 한다. 12월2일에 공연 수익금으로 연탄을 사서 나눠주는 <만화작가 락콘서트>(2012 Artist Sound Festival)에 참여한다. 연습시간이 별로 없어서 걱정이다.

-마감의 조력자(사람, 물건 다 포함).
=여자친구가 채색을 도와준다. 나보다 더 잘한다. 거의 내 매니저 같아서,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요즘 마감이 빨라진 것도 다 여자친구 덕분이다. <외발로 살다>의 여주인공도 여자친구가 하는 행동을 보고 만들었다. 원래 잘 웃는 성격인데, 여자친구 만나면서 더 많이 웃는다. 이런 밝은 부분을 독자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