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미첼의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19세기 중엽부터 먼 미래까지 포함하는 여섯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장르도 다양해서 해양 모험담, 게이 예술가의 수난기, 핵발전소의 음모를 파헤치는 추리물, 강제로 양로원에 감금된 출판업자의 코믹한 탈출기, 복제인간과 문명의 멸망을 다룬 SF까지 포함한다.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은 독창성으로 칭찬받을 종류는 아니다. 대부분 장르 클리셰에 기대고 있으며 종종 아슬아슬하게 패러디 근방까지 간다. 미첼도 엄청나게 대단한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책을 읽다보면 이야기보다는 능청스럽게 화자, 장르, 스타일, 시대를 바꾸어가는 화법에 더 신경을 썼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가장 창의적인 부분은 어떻게 보면 평범한 이 이야기들을 그럴싸하게 해체해서 하나로 묶는 방식에 있다. 이 소설은 거대한 지퍼처럼 생겼다. 다섯개의 이야기가 절반씩 나오다가 여섯 번째 이야기가 온전하게 끝나면 다시 역순으로 완성되는데, 각각의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의 독자이거나 관객이다. 모두 혜성 모양의 모반이 있어서 이들이 한 영혼이 반복해 환생했다는 암시도 흘린다.
이렇게 해서 전체 이야기가 더 커지고 깊어지나? 그렇지는 않다. 여전히 이야기는 그대로다. 전쟁, 환경문제, 착취와 같은 주제들이 연결되며 더 큰소리를 내기는 하지만 더 깊어지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추가의 의미를 얻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이렇게 엮으면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진짜로 재미있는 것이다. 미첼의 책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것도 주제보다는 이런 유희정신이다. 이런 글쓰기의 즐거움이 영화로 옮겨질 수 있을까? 그대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원작을 따르는 대신 원작의 재료를 가지고 자기 식으로 노는 것은 가능하다.
워쇼스키 남매와 톰 티크베어가 이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했던 것도 영화를 통해 이 재료들을 가지고 놀 수 있는 방법을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데이비드 미첼이 그랬던 것처럼 한번 내린 지퍼를 올리는 대신, 이들을 지그소 퍼즐처럼 잘게 부순 뒤에 하나의 퍼즐인 양 자잘한 교차편집으로 재조립해버린다.
당연히 이야기의 시작은 원작보다 어색하다. 이 여섯 시간대의 이야기가 동시에 등장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일단 발동이 걸리고 영화가 자기의 논리를 찾으면 관객은 흐름을 타기 시작한다. 그리고 중간 지점을 넘어서기 시작하면 영화는 오히려 소설보다 훨씬 의미가 있어 보인다. 원작 소설은 일차적으로 독자/관객과 책/영화의 관계로만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는 모티브들이 하나의 이야기 안에 통합된다. 여기에는 내가 아직도 다소 무리라고 생각하는 캐스팅 게임도 한몫한다.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 애덤 어윙이 노예해방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하는 장면에서 그의 아내 틸다 역으로 다섯 번째 이야기에서 미래세계의 노예인 복제인간 손미를 연기한 배두나가 나오는 식이다.
그럴싸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데이비드 미첼의 원작에서는 메시지를 강조하지 않는다. 여기서 추가의 의미를 찾아내고 읽는 것은 독자의 역할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럴 수 없다. 교차편집 자체가 그 연결점에 분명한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것이 여섯개나 존재하니 그 의미는 여섯겹으로 강조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진짜로 ‘진지함’을 유지하는 작품은 절반밖에 안된다. 핵발전소 이야기는 장르 공식을 충실하게 따르는 펄프 소설이고, 출판업자 이야기는 코미디다. 아무리 주제를 공유한다고 해도 인류 미래사를 정통으로 뚫고 가는 손미의 이야기나 멸망 이후의 하와이 이야기와 연결되면 서로에게 손해이다. 영화가 있지도 않은 깊이를 가지고 허풍을 떠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 처음부터 ‘과대평가’와 ‘허세’라는 단어를 십자가처럼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영화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