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을 다룬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이하 <지슬>)가 3월1일 제주도에서 먼저 개봉했다. 그리고 개봉 2주가 채 안돼 1만 관객을 동원했다. 제주 사람 오멸 감독이 제주에서 제주의 역사를 이야기한 영화 <지슬>에 제주 주민들이 뜨겁게 화답한 결과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4개 부문 상(넷팩상, 시민평론가상, 한국영화감독조합상, CGV 무비꼴라쥬상)을 휩쓸었고, 올해 선댄스영화제에서 월드시네마 극영화 부문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고, 브졸국제아시아영화제에서 황금수레바퀴상을 가져갔다는 소식은 <지슬>의 영화적 성취를 잘 말해준다. 3월21일, <지슬>이 전국 개봉한다. <지슬>을 먼저 본 관객에게도, 아직 보지 못한 관객에게도 좋은 가이드가 될 글들을 준비했다. 정한석 기자는 오멸 감독의 영화세계 안에서 <지슬>의 의미를 풀어냈고, 4.3부터 강정까지 제주의 역사를 꾸준히 카메라에 담아온 조성봉 감독은 <지슬> 개봉에 즈음하여 제주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정성스런 글과 사진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제주도로 날아가 오멸 감독을 만났다. 제주도에서 오멸 감독과 함께 영화와 연극을 넘나드는 창작 활동을 펼치고 있는 자파리 필름/자파리 연구소의 식구들도 만났다. 올해 당신이 절대 놓쳐선 안될 영화 <지슬>에 대해 얘기할 시간이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제주 사람 오멸은 2009년부터 네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어이그, 저 귓것> <뽕똘> <이어도> <지슬>은 모두 제주에서 만들어졌고 제주에 관한 영화들이다. 그런 그의 두 번째 장편 <뽕똘>에는 이런 일화가 등장한다. 감독이랍시고 앉아서 배우 오디션을 보는 엉터리 영화감독 뽕똘에게 육지에서 온 남자 한명이 상황연기를 선보인다. 얼떨결에 제작자로 몰린 뽕똘의 동네 형은 남자의 연기가 마음에 든다고 하지만 뽕똘은 자기가 주인공까지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그를 영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눈치다. 그러면서 그 남자의 흠을 이렇게 잡는다. “언어가 안돼, 언어가.”
이 장면은 지나가는 우스개지만 언어가 안된다는 저 말에 뜻밖에도 오멸 영화의 본론이 들어 있다. 뽕똘의 말은, 한국인은 한국어를 하고 미국인은 영어를 할 줄 아는데 저 사람은 제주도의 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르니, 제주도의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에 무능하다는 불평이다. 뽕똘의 불평은 엉터리이고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에게 그 대사를 하게 한 오멸은 그 문제를 더없이 소중하고 신중하게 생각하는 창작자다. 실제로 오멸의 영화에서는 오로지 제주 방언만 쓰이고 있다. 아니, 방언이라고 표현해서는 안될 것 같다. 방언이라는 말에 표준을 벗어난, 중심이 아니라 변방에 위치한, 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면, 그건 육지가 자기를 중심으로 두고 제주를 고정된 타자로 가리키는 육지 지향적 지칭이 될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오멸이 동감하지 않을 것 같다. 오멸 영화에서 세계의 중심은 다름 아니라 제주도이며 그가 만드는 건 오로지 제주도의 것들이다.
땅의 역사를 마주하기까지
오멸이 관심을 쏟은 제주도의 것들 중에 첫 번째 것은, 사람이었다. 일찌감치 오멸의 작업 방식 및 지역영화 만들기의 의의에 초점을 맞춰 작성됐던 <씨네21>의 인물 기획기사에서 그는 웃으며 말했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이 있지 않나. 제일 싫어하는 속담이다. 사람 살 데도 없는데 말은 무슨….”(818호) 제주가 말들이 노니는 한가로운 풍경으로서의 땅이 아니라 사람이 끝내 살아가는 생활의 터전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이그, 저 귓것>에서는 그 사람들 중에서도 무명의 예술가들이 주인공이다. 실력과 명성에 무관하게 자기의 예술세계에 정답고 충직한 사람들 네명이 등장하여 이 한편의 음악영화를 끌어간다.
하지만 오멸은 이 영화에서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 아직 그 이야기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영화로 사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야 기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오멸은 느끼게 된 것 같고 <뽕똘>에서는 그걸 작정한 것 같다. 세계를 구하는 물고기 돗돔에 관한 영화를 연출하겠다고 나선 초짜 영화감독 뽕똘과 그 친구들의 좌충우돌 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 <뽕똘>. 이미 알려진 대로 여러 장면 중에서도 산방산에 얽힌 덕이의 전설을 구현하는 장면이 단연 돋보인다. 산방산에 사는 절세미인 덕이에 관한 전설이 오멸에 의해 새롭게 각색된 유머 버전으로 한 토막 펼쳐지는데, 박자와 장단을 타고 넘어가는 그 느낌이 마치 저잣거리의 구수한 이야기꾼의 입에서 나오는 것인 양 능글맞다. 이 장면의 화술은 어떤 세련됨을 지향하기보다는 울퉁불퉁한 투박함을 그 자체로 끌어안은 대담함이 있어서 우리와 같은 육지 사람에게까지도 제주의 재담이란 이런 것인가 하는 매혹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뽕똘>은 정교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정겨운 토속적 웃음과 뚝심이 느껴지는 이야기 한마당이었다.
그런데 오멸은 다음 영화에서 형식상 <뽕똘>과는 거의 반대되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뽕똘>에서 시도했던 극적 웃음을 <이어도>에서는 완전히 배제했다. 심지어 영화에는 대사가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추측건대 <이어도>에서 오멸이 집중한 건 영화의 이미지 표현법이었던 것 같다. 그의 인생에서 다소 뒤늦게 영화를 시작한 감독이 영화의 이야기를 생각해본 다음 영화의 이미지로 관심을 옮긴다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어도>를 두고 오멸은 이 영화는 상영을 염두에 두고 만든 영화가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건 어쩌면 이 작품이 작품의 완결성이 아니라 자신의 어떤 내밀한 형식적 실험으로서 의미가 깊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오멸은 <이어도>에서 인물과 시선과 음악과 움직임이 함께 어우러지는 그 어울림에 새롭게 눈을 뜬 것 같다. 갓난아기와 단둘이 사는 젊은 해녀의 생활이 시종일관 나직하게 들려오는 노랫가락과 흑백의 화면 속에서 초반부에는 외로움과 힘겨움으로, 후반부에 이르면 비통함과 참혹함으로 출렁거린다. 한국화를 전공한 감독은 이 작품에 이르러 마침내 회화적으로 아름다운 장면들을 무수히 뽑아낸다. 한편으로는 느리거나 정지된 순간에 뿜어져나오는 영적 기운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포착하기도 한다. 예컨대 영화에서 아기 엄마가 군인들과 서로 대치하여 오랫동안 앉아 있는 장면은 그 정지된 동작과 묶인 시선과 돌덩어리 같은 침묵만으로도 긴장감을 확보하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제주 4.3 사건에 기반하고 있다는 건 영화를 끝까지 지켜보는 사람이라면 대개 알게 된다. 4.3 사건의 어느 실화에서 유래했거나 상상되었을 법한,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건 하나를 여인의 그 눈동자가 목격할 때 그리고 그 눈동자가 제주 앞바다로 치환될 때 이것이 제주도의 역사를 목도하는 것에 관한 슬픈 은유가 아닐까 우린 묻게 된다. <이어도>에 이르자 오멸은 자신이 사는 땅이 지닌 슬픈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 같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작품 중에서 오멸 영화의 정점이라고 부를 만한 <지슬>은 이제 마침내 출현할 준비를 모두 마치게 된 것이다.
지슬, 누군가를 살리고 죽이는
<지슬>은 확실히 앞선 오멸 영화들의 총합의 결과다. 화법은 다듬어졌고 이미지는 한층 더 충만해졌다. 오멸이 제주도 사람들의 이야기와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창작자라고 했을 때, 그가 제주 4•3 사건에 관해 본격적으로 언급하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그의 가장 오래되고 깊은 열망이었을 것이다.
마을은 이미 군인들이 점령한 뒤다. 아직 빨갱이를 한명도 못 잡아왔다는 이유로 하급 병사는 눈밭에서 벌거벗고 벌을 서야 하고 상관들은 약에 취해 정신이 오락가락하거나 손에서 칼을 놓지 않고 기회만 생기면 피를 보려 한다. 그때 한 무리의 마을 사람들이 군인들을 피해 외곽에 있는 동굴을 찾아나선다. 그들끼리 싸우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이 피난의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을 거라고 서로 다독인다. 하지만 사태는 반대로 흐르고 무리 중에 끼어 있어야 했던 마을 처녀 순덕이가 어쩌다 군인들에게 붙들리고 마을 청년들도 위험에 처하면서 주민들이 숨은 동굴마저 발각될 위기에 놓인다.
영화는 마을을 점령한 군인들의 무리와 동굴로 피신한 마을 주민들의 무리. 두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군인들의 장면에서는 무엇보다 살육의 광기가 섬뜩하게 드러난다. 가령 힘주어 만들어진 오프닝 시퀀스. 군인 하나가 허연 연기 가득한 집 안을 여기저기 느린 속도로 헤치고 다닌다. 제사에 쓰이는 식기들은 마루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그 마루를 지나 다른 방으로 들어가면 거기에는 군인 하나가 칼을 갈고 있고 그 옆에는 서랍장에 구겨진 채로 넣어져 있는 젊은 여자의 시체가 있다. 방으로 들어선 군인은 칼을 갈던 군인에게 칼을 건네받아 손에 들고 있던 과일 한쪽을 자르고 둘은 나눠 먹는다. 사람을 죽인 칼로 과일을 깎아 먹는 일이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린 살인귀들. 그들을 묘사한 이 장면은 추후에 등장하는 끔찍하고 기괴한 장면들을 힘있게 예고한다.
상대적으로 마을 주민들의 장면에서는 웃음과 정겨움이 가득하다. 영화의 초반부 구덩이 장면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아주 간단하고도 탁월한 해학의 방식으로 그려낸다. 처음에는 작은 구덩이 안에 두 사람이 숨는다. 곧이어 한명이 늘어나 셋이 되고, 또 한명이 늘어나 넷이 되고, 다섯이 되고, 여섯이 되기까지, 단지 구덩이의 인원을 하나씩 늘릴 뿐인데도 그들이 낑낑거리고 앉아 있는 자세와 사람이 늘어날 때마다 생기는 그들 사이의 사소한 잡음이 웃음을 가져다준다.
영화적으로 <지슬>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도 동굴 속 마을 주민들을 비출 때에 등장한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설 때쯤 주민들은 돼지밥을 줘야 한다며 마을로 내려간 아저씨를, 오래 돌아오지 않는 마을 처녀 순덕이를 걱정한다. 혹은 각자의 사정들을 소재로 서로들 옆사람에게 말을 걸고 말을 받는다. 그때 카메라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미끄러지며 일렬횡대로 앉아 있는 사람들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담아내는데, 그때 카메라가 제자리로 돌아와 그들을 다시 담으려 할 때마다 사람들의 대화의 소재나 앉은 위치나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자가 매번 불가사의하게 바뀌어 있다. 이들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터놓고 맺고 있는 수평적인 공동체의 성격을 시각적으로 드러내주는 뛰어난 장면이다. 말하자면 군인들을 보는 카메라의 시선이 종종 아래에서 위로 오르며 수직의 인상을 주는 것과는 대립된다.
군인들의 세계와 마을 사람들의 세계는 그토록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쪽에 전부 등장하는 유일한 것을 찾는다면 그게 바로 이 영화의 제목이 되었고 제주도 말로 감자를 가리키는 지슬이다. 동굴로 피난을 가자는 아들에게 어머니 당신은 성치 못한 다리로는 힘들다며 너희들만 가라고 지슬을 싸주지만 아들은 갖고 가지 않는다. 하급 병사 한명은 학대받는 다른 하급 병사에게 배고픔을 이기라고 지슬을 건네고 그 지슬을 받은 병사는 포로로 잡힌 순덕에게 그 지슬을 건네려 했지만 그건 비극의 계기가 된다. 결국 어머니를 놓고 동굴로 피신 온 아들이 다시 어머니를 모시러 갔을 때 그녀는 세상에 없고 지슬만 있다. 아들은 그거라도 가져와 아사 직전의 이웃들에게 나눠주고 아무것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지슬이 참 달다며 맛나게 먹지만 어머니를 여읜 자식은 구석에서 혼자 조용히 운다. <지슬>에서 지슬은 모든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 사이에 산발적으로 걸쳐 있는 매개물이다. 이 매개물은 누군가를 살리기도 하겠지만 누군가를 죽이기도 하면서 이 땅에 얽힌 역사의 다양한 뒤안길을 상기시키고 있다.
경건하고 굳센 맹세
오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해왔다. 이방인이 관광하는 기분으로 착륙하게 될 제주도의 공항 밑바닥에서는 아직까지 4.3 사건 희생자의 시신이 발굴되어 나오고 있고,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고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는 정방폭포에서는 수도 없는 사람들이 총탄에 쓰러져 갔다고 말이다. 제주도는 이방인의 눈을 즐겁게 하는 천혜의 관광지로서 다인 것이 아니라 슬프고 고통스러운 정치사와 생활사가 뒤엉켜 있는, 그럼에도 사람들을 끝내 살게 해왔고 지금도 살고 있는 생생한 역사의 땅이라는 생각을 그는 <지슬>로서 전하고 싶어 한다.
<지슬>이 제사와 같은 것이라고도 오멸은 말했다. 물론 신위, 신묘, 음복, 소지라는 제사의 절차를 따라 붙여놓은 이 영화의 소제목들이 과연 영화와 긴밀한 내적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가령 순덕에게 일어난 비참한 사건이 핵심인 ‘신묘’의 장에서는 내용이나 표현 면에서 ‘영혼이 머무는 곳’이라는 신묘의 뜻과 어울리는 바가 거의 없다. 하지만 형식의 정교함이라는 차원보다 감독 자신의 마음가짐을 알리는 잉여적 개입으로 이해한다면 이 점을 못 받아들일 것도 없다. 죽어간 모든 혼령들을 위로한다는 뜻에서 제사의 마지막 절차와 마찬가지로 지방(종이에 적힌 위패)을 태우며 영화를 마칠 때 우린 이 영화가 기리고자 하는 바를 함께 수긍할 수 있게 된다.
<지슬>은 많은 이들이 이미 알린 것처럼 슬프고도 정겨운 영화다. 해학적이고 회화적이고 제의적인 방식으로 위령의 마음을 바치는 제사 혹은 씻김굿판이다. 이걸 지켜본 육지 사람에게도 한마디 느낌을 거드는 것이 허락된다면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다. 카메라가 땅의 기억을 길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담도록 땅이 카메라에 허락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 영화감독들이 있는데, 오멸도 거기에 속해 보인다. 그 때문에라도 오멸이 <지슬>이라는 영화로 오늘에 올린 제사는 제주라는 섬이 자신을 버리지 않는 한 자신도 끝내 제주의 모든 것들과 함께 살겠다는 경건하고 굳센 맹세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