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쓸모없는 일이 아니라 쓸모있는 삶
2013-03-26
글 : 이주현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지슬> 만든 자파리 연구소/필름 식구들

“애들이 좀 촌스러운 데가 있다.” <지슬> 개봉 소식에 자파리 식구들이 꽤나 감격스러워하더라고 전하자 오멸 감독에게서 돌아온 대답이다. 이 말엔 자파리 식구들이 세련되게 감정을 숨기는 법을 모르는 순수한 친구들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3월2일 간드락 소극장에서 만난 최은미씨가 그런 의미에서 특히 촌스러웠다. 인터뷰 도중 최은미씨의 눈가엔 몇번이나 눈물이 차올랐다. 목소리도 우렁차고 말도 조리있게 잘해서 무대인사 때 대표로 마이크를 잡는 장정인씨는 그런 은미씨를 보고 “고장난 수도꼭지”라고 놀렸다. 그런데 정작 본인도 <지슬>을 관람하러 극장에 들어설 땐 “야단맞기 직전처럼 배가 간질간질하다”며 긴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파리 식구들은 아직도 <지슬>만 보면 왈칵 눈물이 솟구친다고 했다.

장정인, 성민철, 최은미, 강지윤, 조은. 이들은 길게는 10년, 짧게는 1년을 ‘자파리’라는 이름으로 함께했다. 제주말 자파리는 ‘쓸모없는 짓거리’ 정도로 풀이할 수 있는데, ‘자파리 좀 그만해’, ‘내가 한 자파리 하지’ 등의 문장으로 활용 가능하다. 2010년 오멸 감독이 차린 영화제작사 이름도 자파리다. 자파리 필름과 쌍둥이 단체인 자파리 연구소는 역사가 더 오래됐다. 창작집단 자파리 연구소는 “세상의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에서 의미를 찾는 즐거운 실험”을 하기 위해 2004년 만들어졌다. 영화를 만들 땐 자파리 필름, 연극을 만들 땐 자파리 연구소라는 이름을 내건다.

자파리 식구들이 자파리 연구소로 흘러들어온 과정은 제각각이다. 장정인씨와 최은미씨는 오멸 감독이 만든 문화기획단체 ‘Terror J’가 주관한 제1회 ‘머리에 꽃을’ 거리예술제(2002년)에서 자원활동가로 일한 것을 계기로 자파리 세계에 입문한다. 철이 늦게 들어 종종 ‘만철’이란 별칭으로 불리는 성민철씨는 2004년 ‘머리에 꽃을’ 거리예술제에 조명 스탭으로 참여한 게 인연이 돼 쭉 자파리하고 있다. 제주생활 1년을 갓 넘긴 서울 출신 강지윤씨는 <지슬>의 스탭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가 아예 짐을 싸서 제주도로 내려왔다(지원자가 혼자였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어디서부터 얘길해야 하나” 망설일 정도로 방황의 시간이 길었던 조은씨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자파리 연구소를 들락거렸다. 딸의 방황을 잠재우고 싶었던 그녀의 어머니가 동생인 오멸 감독의 극단에 조은씨를 맡긴 거였다. 외삼촌인 오멸 감독의 극단에서 연기에 눈뜬 조은씨는 현재 자파리 연구소의 유일한 “전문 배우”로 맹활약 중이다.

성민철: 네가 전문 배우인 이유는? 조은: 그것밖에 할 줄 몰라서. <씨네21>: 연기라는 한우물만 파겠다, 그런 건 아니고요? (일동 폭소) 조은: 새로운 일을 시키면, 가르치는 데 시간이 더 걸려요. 최은미: 은이에겐 타고난 동물적 감각이 있어. <씨네21>: <뽕똘>에서의 전설의 돗돔 연기는 정말 최고였어요. 일동 합창: “저 스트레스 받으면 돌이 돼요~.”(<뽕똘>에서 조은씨가 연기한 산방산 덕이의 대사다.)

사실 세속적인 잣대를 들이대면 이들의 자파리는 비생산적인 놀음으로 보인다. 자파리 식구들도 자신들이 좋아서 하는 이 자파리가 생계까지 온전히 책임져주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자파리 식구들은 따로 봉급을 받지 않는다. 휴대폰 요금만 지원받는다. 제주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지윤씨는 동생 집에 얹혀살고 있는 은미씨에게 또다시 얹혀살고 있고, 4형제 중 막내이자 외동아들인 민철씨는 간드락 소극장 한켠에서 9년째 살고 있다. “평소엔 그럴 만한 상황들이 있으니까 그런 거지 싶어 아무렇지 않았는데, 오늘 인터뷰하니까 되게 짠하다. 뭔가 서글프고.”(장정인) 오멸 감독은 자파리 식구들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게 그냥 “시늉”이라고 했다. “그냥 죽는 시늉 하는 거다. 애들한테 말한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 너희는 이미 많은 작품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연극 하나 가지고 있으면 10년, 20년 동안 공연 섭외가 들어온다. 이 친구들은 그런 재산을 가지고 있다.” 그저 둘러대는 낙천적인 소리가 아니다. 민철씨가 연출한 연극 <오돌또기>는 2011년 서울어린이연극상에서 최우수작품상, 최고인기상, 연출상, 연기상까지 4개 부문을 휩쓸었다. <오돌또기>는 물론이고 은미씨가 연출한 <꿈꾸는 아이들>도 국내외 공연페스티벌에 단골로 초청받는 작품이다. 자파리 연구소의 든든한 보험이란 얘기다.

넉넉지 못한 형편으로 자파리를 지속하는 데엔 당연히 어려움이 따른다. 하지만 <지슬>이 개봉하면서 그간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음이 증명됐다. 가족들의 태도가 달라진 게 가장 큰 변화다. 서귀포에 살고 있는 민철씨의 부모님은 여태껏 아들이 연출한 연극이며, 아들이 출연한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지슬> 전까지는 아버지께서 이 일 하지 말라고 많이 말리셨다. 빨리 안정된 가정을 꾸렸으면 하셨다. 그런데 개봉 첫날 <지슬>을 보시고는 뿌듯해하시더라.” 3월3일엔 민철씨의 외가 식구들이 <지슬>을 관람하러 단체로 CGV제주를 찾았다. 자파리 연구소의 유일한 기혼자인 정인씨도 남편이 SNS의 프로필 페이지에 ‘<지슬> 많이 봐달라’는 글을 올렸다며 은근슬쩍 자랑을 풀어놓았다. 은미씨는 이런 일들을 지켜보면서 “영화의 영향력을 새삼 실감했다”고 한다. “서울어린이연극상에서 상을 받은 것도 굉장한 일이다. 그런데 그때는 사람들이 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런데 <지슬>이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TV에도 소개되고, 큰 극장에도 걸리니까 주위의 시선이 달라졌다.”

얘기를 나눌수록 이들에겐 자파리와 무관한 시간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허락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은미씨는 “자파리 연구소가 곧 나”라고까지 말했다. 자파리로 꽉 들어찬 삶을 살다보면, 자파리가 순수하게 자파리로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오지는 않을까. 은미씨는 “그 시기는 지나간 것 같다”고 했다. 민철씨는 “그걸 경계해야 하는 시간이 분명 존재한다”고 거들었다.

최은미: 자파리는 즐거워야 하는데 힘들고, 피곤하고, 창작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고, 압박이 생기고.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 그런데 연극을 한편 연출하고 그게 계속 무대에 올려지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런 상태를 넘어서게 된 것 같더라고. 사람들이 봤을 땐 우리의 자파리가 직업으로서의 일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우리에게 자파리는 일이 아니고 그냥 사는 게 아닐까 싶어. 성민철: 진짜 대책없이 놀다가 끝, 그런 분위기는 아니니까. 자파리를 하면서도 충분히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하잖아. 우리가 하는 자파리가 일이지만 일이 아닌 무엇인 건데, 그럴 때 스스로 세운 경계선이 무너지면 힘들어지는 것 같아. 그럴 때 내가 왜 이걸 하게 됐지, 라는 의문도 생기고. 난 아직 그런 시기들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것 같긴 해. 그럴 때 초심을 생각하면 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도 같고.

자파리 식구들의 꿈은 소박하다. 영화, 연극, 연출, 연기. 금을 그어놓고 어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겠다는 욕심 같은 건 없다.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들이 하고 싶은 자파리를 하는 게 결국 이들의 최종 목표이자 꿈이다. 자파리 팀에 뒤늦게 합류한 지윤씨는 개인적으로 좀더 성장해 팀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게 우선 과제라고 말했다. “이 일을 시작하면서 나의 모든 게 바뀌었다. 사는 곳도 바뀌고, 만나는 사람도 바뀌고, 하는 일도 바뀌고. 그동안은 그 변화에 적응하는 시기였는데, 이젠 ‘이곳이 바로 내가 있는 곳이구나’라는 생각을 조금 하게 됐다. 분위기가 한창 좋을 때 자파리 식구로 합류했으니 그만큼 더 성장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제주도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는 것을 걱정하던 은미씨는 “우리의 창작 작업을 통해 사람들에게 천천히, 즐겁게, 너그럽게 살아도 된다고 얘기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인씨는 “제주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구상 중이다. “우리가 제주의 것을 빌려와서 작품을 만들었고 그것이 사랑받고 있다. 받은 만큼 제주에 돌려놓으려 한다. 또 한 아이의 엄마로서 엄마들과 함께 놀 수 있는 일을 고민 중이다. 이를테면 제주 엄마들의 공연문화소비조합 같은 걸 만들면 어떨까 싶다.”

지난해 말엔 대학 입시를 앞둔 열아홉살 두 친구가 자파리 연구소의 문을 두드렸다. 3월3일 CGV제주에서 만난 김상훈, 안수호군은 소란스런 가운데서도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몰두해 읽었다. 이들의 꿈은 배우가 되는 것이다.

김상훈: 솔직히 처음엔 자파리 팀의 형, 누나들을 보면서 ‘이거 돈 많이 못 벌 것 같은데 어떻게 계속하실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돈이 중요한 게 아니고 진짜 우리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안수호: 예전에는 연기해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면 어쩔 수 없이 유명해질 수밖에 없겠구나 싶어요. (일동 폭소) 최은미: 너희들 정말 대단하구나. 정민철: 유명해지긴 하는데 돈은 못 버는 걸 몰라.

자파리 연구소 식구들은 3월13일 일본으로 떠났다. 2007년부터 해마다 2월과 3월에는 일본 하키국제어린이공연예술축제에 초청받아 쭉 일본에 머물고 있다. 올해는 <지슬>이 3월1일에 개봉하는 바람에 2월에 한번, 3월에 한번 나눠서 움직이게 됐다. 공연을 마치고 제주도로 돌아오면 다시 자파리 연구소의 자체 기획 공연을 준비해야 하고, 오멸 감독이 새 영화를 준비하면 영화 작업에도 참여해야 한다. 틈틈이 개인 창작 작업도 이루어질 것이다. 자파리 식구들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 자파리로 충만한 삶이 그렇게 완성된다.

촌스럽지 않아요, 순수할 뿐

자파리 연구소/필름 식구를 소개합니다

최은미 31살

자파리 연구소/필름의 사무국장이자 실세. 연출, 연기, 그림, 일본어 등 못하는 게 없는 재주꾼이다. 연극 <꿈꾸는 아이들>을 연출했다. <지슬>의 무동 아내, <이어도>의 어린 엄마, <어이그, 저 귓것>의 길가는 여고생을 연기했다. <뽕똘>에는 그의 어머니가 출연했다. 영화의 마지막 즈음, 청테이프를 온몸에 칭칭 감은 청년이 빵집을 들여다보는 장면이 있는데 그 빵집이 은미씨네 빵집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청년이 진심으로 불쌍해 보여 빵을 건넸고, 그 장면이 영화에 그대로 쓰였다. 20대를 자파리 연구소/필름에 올인했다. 아마 30대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성민철 33살

뭐든지 할 수 있는 남자, 편리한 남자, 즉각조치부대 등 별명이 많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만으로(졸업도 못했는데) 각종 기계 수리를 전담하고 있다. 대학 다닐 때 밴드에서 베이스기타를 좀 퉁겼다. 그의 첫 연극 연출작 <오돌또기>는 2011년 서울어린이연극상에서 4개 부문에서 상을 수상했다. <어이그, 저 귓것>에선 뒷모습, 손 등 각종 인서트 대역을 맡았고, <뽕똘>에선 붐마이크를 들고 있는 청년을 연기했다. <지슬>의 조연출이며, 만철 역으로 출연했다. 혼자 자파리하기엔 영상작업이 재밌고, 보람은 연극에서 더 크게 온다고 한다.

조은 23살

자파리 연구소/필름의 전문 배우. 간드락 소극장 옆 아라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가출과 일탈을 밥먹듯하며 심하게 방황했다. 고등학교는 자퇴했고 검정고시를 준비 중이다. 연극 <섬 이야기> <낡은 창고> <오돌또기> <꿈꾸는 아이들> <죽 쑤는 할망> 등에 출연했다. <뽕똘>에서 전설의 돗돔과 춘자를 연기해 나름 파란을 일으켰다. 돌로 변해가는 연기도 인상적이었지만 춘자의 얼굴과 불상이 오버랩되는 장면도 명장면이다. “이게 뭐야? 왜 이리 똑같아?” 하며 본인도 화들짝 놀랐다고. 외삼촌(오멸 감독)의 조카 사랑이 이 정도다.

장정인 40살

자파리 식구들의 브레인. 6살 된 딸(조이준)이 있는데, 모녀가 함께 자파리 연구소/필름의 식구로 있다. 부산에서 태어난 제주 사람이다. 20대 때 제주도에 놀러왔다가 제주도에 반해 15년째 눌러 살고 있다. 원래는 거친 사람이었지만 제주도에 와서 사람 됐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부산의 학교 후배들이 가끔 전화해서 “근데 언니 왜 욕 안 해요?”라고 꼭 한번씩 물어본다고. 연극 <오돌또기> <꿈꾸는 아이들> <으럇! 천둥아>에 출연했고, <어이그, 저 귓것>의 뽕똘 아내를 연기했다. <지슬>의 제주도 도내 배급을 담당하고 있다.

강지윤 27살

자파리 연구소/필름의 여자 뽕똘, 줄여서 ‘여뽕’으로 불린다. 가끔 엉뚱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놀래킨다. 원래는 배우가 꿈이었다. 서울에 있을 땐 배우에이전시의 문도 두드렸다. 길은 쉽게 보이지 않았다. 영화를 열심히 보는 걸로 무기력한 삶을 달랬다. 그러던 중 오멸 감독의 <어이그, 저 귓것>과 <뽕똘>을 극장에서 혼자 ‘전세 관람’하게 된다. 그것이 자파리 필름과의 첫 인연이라면 인연. <지슬>에선 연출부였고, 과일 깎아먹는 군인들 뒤쪽에 있던 시체로도 출연했다. <지슬>을 찍기 전 사귄 남자친구와는 결국 장거리 연애의 험난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남자친구는 떠났지만 더 소중한 꿈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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