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 연기가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안 할 거다 했다. 그런데 몸으로 익힌 게 무섭더라. 정두홍 감독님한테 며칠 지나고 ‘액션 재밌는 거 같아요’ 했더니 막 웃더라. 그 재미에 자기도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고. (웃음)
대한민국에서 슈트발 최고인 배우를 꼽으라면 단연 황정민이다. 이병헌의 연기력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지원군이 저항할 수 없는 그의 목소리라면, 황정민의 몸은 그런 의미에서 마찬가지로 절대 우위를 차지한다. 팔다리가 길고, 몸집이 탄탄한 황정민은 감상을 위함이 아닌, 살아 있는 풍채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몸의 리듬이 곧장 캐릭터가 가진 멋스러움을 완성하는 진귀한 소품이 되는 것이다.
<전설의 주먹> 로커룸 장면에서 상의를 탈의한 황정민이 걸어나올 때, <아저씨>의 원빈을 향했던 탄성(원빈쪽이 좀 길긴 했다)이 관객석에서 새어나왔다. 고등학생 때 권투로 다져진 몸, 마흔이 넘어 이종격투기 대회에 참가하는 영화 속 전설의 주먹 덕규의 몸은 특별히 지난 몇 개월간 매일 3∼4시간을 꼬박 투자한 노력이 더해진 결과다. “윗몸일으키기만 하루에 1천개를 했다. 미치고 환장하는 거지. 밤 9시부터 새벽 1시까지 꼬박 몇 개월을 그렇게 살았다.”
<전설의 주먹>은 액션을 총괄한 정두홍 무술감독이 독하게 ‘진짜의’ 액션을 표방하고 제대로 매달린 액션이었다. 맞는 척이 아니라 진짜 맞아야 하는 이 혹독한 촬영현장에서, 황정민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는 고작해야 맞으면 터지고 부러지는 눈과 코 같은 부위만 간신히 피하는 정도였다. “액션이야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나 <신세계>에서도 했는데, 이번엔 달랐다. ‘했다 치고’라는 게 안 통하니까 그게 진짜 어렵더라. 오죽하면 집사람이 영화 보고 ‘우리 남편 고생 많았겠네’ 하더라. 다른 때는 이런 치사를 한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말이다. (웃음)”
몸의 고생을 상쇄해준 건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완벽한 촬영 환경의 뒷받침이었다. “강우석 감독님이 현장에선 대통령 같다고 하지 않나. 막상 촬영해보니 왜 그런 소리 하는지 알겠더라. 모든 게 감독님 머릿속에 있고, 확신에 차서 하니 배우들이 다른 데 신경 쓸 이유가 없는 거다. 짬나면 게임하다가, 촬영 준비됐다고 하면 나가서 연기했으니까. (웃음)” 까다로운 배우들에게만 따라붙는다는 ‘감독’ 수식어를 가진 배우의 발언치고는 나태함에 가까운 발언이다. “그게, 마흔이 되니 변하더라. 삼십대를 악다구니로 곤두선 채 살았으니, 좀 내려놔도 되겠다 싶더라.” 그 역시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내 감독을 못살게 굴고, 현장에 제일 먼저 와 스탭들을 힘들게 했던 소문난 배우라는 것쯤은 자각하고 있었나보다. “나도 안다. 내 앞에서는 말 못하지만, 내가 불편한 배우라는 걸. 근데 연기하는 데 있어서 내게 그것은 일종의 신념이었다. 제를 지내듯이 준비를 하고, 원칙을 지키며 살아온 거다.”
조금 유해졌다는 그를 마냥 반기기에 앞서 관객으로서는 깐깐한 점검이 앞설 수밖에 없다. 혹여, 이 여유가 탄탄한 연기를 흐트러뜨리지 않을까 싶은 일종의 노파심 말이다. 우려에 대한 그의 대답은 명쾌하다. “<신세계>의 정청을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 삼십대의 나였다면 정청을 그렇게 입체적으로 소화할 수 있었을까. 한발 물러서서 보니 더 많은 게 보이더라.” <전설의 주먹>의 덕규 역시 변화하는 황정민을 십분 반영한 캐릭터다. 어릴 적 비행을 뒤로하고 이제는 국숫집을 운영하며 딸을 키우고 살아가는 평범한 가장. <너는 내 운명>의 노총각 석중만큼 순박하지만, 덕규는 영화 같은 순박함을 넘어 흔히 볼 수 있는 가장의 모습을 자연스레 표출한다. “나이도, 살아가는 방식도 지금까지 한 캐릭터 중 나와 가장 비슷했다. 평소의 황정민 같으면 좋겠더라.”
정청이 입체적인 악을 선보였다면, 덕규는 다양한 모습의 선을 표현해내며 배우 황정민을 감탄하게 만든다. 잠깐이지만, 배우 황정민이 고갈됐다고 느꼈던 순간을 따끔하게 반성하게 하는 최고의 연기다. “난 몰랐다. 늘 똑같은 걸음걸이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댄싱퀸> 흥행되고 나니까 다들 앞다투어 축하한다고 하더라. 사실 그 정도의 굴곡에 일희일비해서는 이 생활 못한다. 이미 그런 데는 단련되어 있다.” 곧 촬영에 들어가는 <남자가 사랑할 때>에서 황정민은 한 여자(한혜진)에 대한 사랑으로 변모하는 삼류 건달을 연기한다. “또 건달이냐고?” 비슷함은 그도 늘 해결해야 할 숙제다. “정청을 하면서 어느 순간 백 사장(<달콤한 인생>)이랑 똑같게 해버리지 싶더라. 아무리 그래도 지나고 나면 백 사장처럼은 못하니까. 스토리 안에서 캐릭터는 늘 달라지게 마련이다. 해답은 다 이야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