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친 다음에 모든 과정을 일기에 다 적어놨다. 나중에 봐야지. 경험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순간들이지만,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구나, 스스로 도닥거려준 계기도 됐다.
웬만해선 그를 막을 수 없다. 끝까지 “괜찮습니다. 괜찮다니까요”다. 불혹을 넘긴 과거 고교 싸움‘짱’들의 서바이벌 쇼 <전설의 주먹> ‘전설대전’ 4강전에서 ‘샐러리맨의 우상’ 이상훈(유준상)은 쉽게 무릎을 꿇지 않는다. 적어도 링 위에서는 그렇다. 다리가 부러지는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오기로 악으로 버틴다. 그렇게 결승행 티켓을 따낸 뒤에야, 링에서 내려간 뒤에야, 카메라의 고개가 돌아간 뒤에야, 자신에게 무너질 여유를 허락한다.
‘스크린’이란 링 위에 오른 배우 유준상도 다르지 않았다. 현실법칙에 굴복한 대기업 홍보부장에서 전설의 파이터가 된 사내 이상훈은, 말 그대로 ‘사투’를 벌여서 얻어낸 결과물이다. 리허설 중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당하고도 그는 “무조건 끝내야 한다”는 일념 아래 “옆에서 스턴트맨들이 던져주고 받아주고, 던져주고 받아주고 하면서 찍기”를 무려 5시간 계속했다. 그리고 마지막 컷까지 OK를 받은 뒤에야 구급차에 몸을 실었다.
그는 이전에도 ‘열심히 했다’는 말을 “목숨을 담보로 한 영화”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실질적으로도 비유적으로도 정말 그랬다. “모든 게 이 한컷을 위해 움직이고 있구나. 현장에서는 막내 스탭의 움직임만 봐도 느껴진다. 그러니까 나도 절실하게 이 사람들과 혼연일체가 돼야 한다. 적당히 하면 되겠지, 하는 순간 끝인 거다.” 그래서 그는 ‘적당히’ 그만두지 못하고 “가족과 이별하기 직전까지” 갔다 왔다. 하지만 그 고행이 고독한 여행은 아니었다. “구급차에서 정두홍 감독님이 계속 옆에 있어줬다. 강우석 감독님은 중간에 차마 못 보겠다며 가셨다가 내가 계속 보고 싶다며 찾으니까 다시 오셨다. 눈시울이 젖은 채로 손을 잡아주시는데, 우리가 함께하는 작업이 외롭지 않구나, 생각했다.” 그에게 가장 강력한 진통제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만드는 영화에 대한 절실함”이었던 셈이다.
누군가 말하길, 연기는 관계를 통해 존재를 여는 예술이라고 했다. 그 열림의 희열을 그는 강우석 감독의 현장에서 늘 느낀다고 했다. “강우석 감독님이나 홍상수 감독님이나 현장에서 배우에게 밀어붙이는 힘을 원하신다. 집중력을 높여 범접할 수 없는 에너지를 만들어주신다.” 그 전이 상태에 대한 목마름이 커서일까. 그는 남의 손에 자신을 내맡기는 데 거리낌이 없다. “내 의지대로 하면 새로운 게 안 나온다. 이상훈 머리도 이렇게 올려주면 좀 어색해도 알겠습니다, 하고 가서 찍는 거다. 그렇게 날 맡겨야 외형적 변화가 생기고 감독님의 머릿속에 있는 캐릭터와 닿는 선이 만들어진다.” 이상훈의 주무기인 ‘킥’은 어릴 적부터 취미이자 특기였던 발차기 실력을 살린 경우지만, 그것도 “정두홍 감독님만 무조건 따랐다”. 인간 유준상의 에고를 잠시 내려놓을 줄 아는 배우 유준상은 그렇게 매번 새 영화에서 새 얼굴을 발견한다.
이번에 그가 찾아낸 새 얼굴은 ‘아버지’의 얼굴이다. 영화 <터치>에서 밑바닥을 쳤던 가장 동식,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국민남편 방귀남,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서 진상남편 근덕 등 모두 가부장제의 짐을 졌던 바 있다. 하지만 이상훈은 이 시대에 흔한 아버지의 애환이 드리운 인물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유학 간 아들이랑 통화할 때, 아빠한테 하고 싶은 말 영어로 해보라는 대사를 집어넣어봤다. 부모 마음이 다 그럴 것 같아서.” 그러나 이제 “아빠들의 무용담은 사라진 시대”다. 그가 아버지들에게 그들의 전설을 고단한 육체로나마 되돌려주고 싶었던 것도 그래서다. “마흔 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술적으로 화려한 액션보다는 정신적으로 무장된 액션이다. 맞은 만큼 돌려주는 처절함이 담긴. (웃음)” 그 처절한 전설이 완성될 무렵, 그의 미소가 화면을 채운다. 어느 아버지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담담한 위안이다.
그렇게 유준상은 이상훈의 전설에 안녕을 고했다. 하지만 마음껏 근육을 풀어놓을 틈도 없다. 뮤지컬 <그날들>이 시작되었고, 드라마 <출생의 비밀>도 준비 중이다. “하루살이 마음이다. 40대 중반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니까, 그 행복의 힘으로 하루하루 버텨야지.” 밤늦은 촬영에도 지친 기색 없이 스튜디오를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행복의 발명’가 유준상이 써내려갈 전설의 일기를 계속 읽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