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전설, 거짓말, 그리고 영화
2013-05-16
글 : 이주현
글 : 이기준
글 : 송경원
사진 : 최성열
‘디지털 삼인삼색 2013’ 중 <누군가의 남편의 배에 탄 누군가의 부인> 감독 에드윈
에드윈, 고바야시 마사히로, 장률 감독(왼쪽부터).

전주영화제로부터 ‘이방인’이라는 주제를 받은 에드윈 감독은 스스로 이방인이 되기로 한다. 우선 “한번도 들어보지도 가보지도 못한 곳에서 작품을 시작”하기로 한다. 인터넷에서 찾아낸 인도네시아의 세람섬. 자카르타에서 비행기 타고 3시간, 차 타고 1시간, 페리 타고 4시간, 또 차 타고 3시간, 보트 타고 1시간을 가야 닿는 섬. 그곳에서 에드윈은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이들과 충돌”하며 영화를 찍는다.

제목 ‘누군가의 남편의 배에 탄 누군가의 부인’은 인도네시아의 작가 세노 구미라 아지다르마의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한 구절이다. 에드윈은 이 문장에 매혹돼 <누군가의 남편의 배에 탄 누군가의 부인>을 시작한다. 수캅과 할리마의 전설(누군가의 부인인 섬 출신의 할리마와 누군가의 남편인 외지에서 온 선장 수캅의 사랑 이야기)을 다룬 소설은 그 전설을 찾아가는 두 젊은 남녀에 관한 영화로 탈바꿈한다. 사와이 마을에 도착한 영화의 주인공 마리아나는 마을 주민들에게 수캅과 할리마의 전설을 아느냐고 묻고 다닌다. 이 장면들은 실제로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촬영됐다. 에드윈은 남녀 주연배우에게 주문했다. “당신들이 수캅과 할리마의 전설을 실제로 믿고, 마을 주민들과 소통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끌어내줬으면 좋겠다.” 배우들은 4∼5일 동안 사와이 마을에 머물며 전설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어느 순간 마을 사람들이 이 전설이 실제로 존재하는 전설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마을 주민들에겐 우리가 마리아나의 할머니(전설 속 할리마)를 찾는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찍는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진심으로 할머니를 찾아주려 했다. 나중엔 죄책감이 들어 ‘마리아나의 할머니가 살았던 마을이 이 마을이 아닌 것 같다’고 얘기하고 철수했다. (웃음)”

<날고 싶은 눈먼 돼지> <동물원에서 온 엽서>를 찍은 뒤 전설을 찾아 떠났던 에드윈은 현재 “식민지와 에로티시즘”을 찾아가는 여정을 준비 중이다.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디지털 삼인삼색 2013’ 중 <만날 때는 언제나 타인> 감독 고바야시 마사히로

‘적게 말하고, 오래 바라본다.’ 전주에서 만난 고바야시 마사히로 감독과 ‘디지털 삼인삼색 2013’을 통해 공개된 그의 신작은 비슷한 인상을 품고 있었다. “전작 <사랑의 예감>(2007)은 살인사건으로 딸을 잃고 절망하는 남자와 죄책감에 시달리는 살인자의 어머니의 교감을 그린 영화였다. 이번 영화는 그 이야기의 부부 버전이다.”

영화 <만날 때는 언제나 타인>은 이상할 정도로 말없는 두 부부의 일상을 좇는다. 작은 예술영화관을 운영하면서 오직 책에만 빠져 사는 남편과 불편한 다리를 이끌며 집안일을 돌보는 아내의 조용한 생활은 담담하고 건조하게 묘사된다. “항상 20세기의 마지막 무성영화를 찍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1999년에 <유하>를 찍어버려서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웃음) 다큐멘터리적인 터치는 의도한 바가 크다. 리얼하게 보이게끔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면서 동시에 드라마틱한 부분을 어떻게 살릴까 많이 고민했다.”

영화의 후반부에 두 부부가 견고한 침묵을 지키는 이유가 밝혀지면서, 관객은 영화의 곳곳에 존재했던 여백들이 사실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참혹한 인고의 시간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감독은 두텁게 쌓인 침묵의 무게를 골깊은 갈등의 아픔으로 치환하면서,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를 새삼 다시 일깨워준다. “사람과 사람이 소통한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나도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비록 소통은 힘들지라도, 끊임없이 서로의 허물을 용서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서로를 이해하는 것보다도 서로를 용서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내가 찾은 답은 여기까지다.” 이렇게 답한 고바야시 마사히로 감독은 방금 자신이 던진 말을 들여다보듯이 오랫동안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의 말없는 응시처럼 <만날 때는 언제나 타인>은 희망도 절망도 없이 삶을 바라보는 그런 영화였다.

타향의 꿈, 고향의 봄

‘디지털 삼인삼색 2013’ 중 <풍경> 감독 장률

장률 감독의 첫 번째 다큐멘터리인 <풍경>은 한국의 거리를 떠도는 이방인들을 담는다. 타자의 시선으로 한국사회의 경계를 훑어가던 장률 감독이 이주노동자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댄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보처럼 보인다. “지난해 겨울에 전주영화제에서 요청이 왔다. ‘이방인’이란 주제하에 형식은 각자 알아서. 썰렁한 주제라서 나를 찾는구나 싶었다. (웃음) 다큐멘터리를 찍어도 괜찮은가 물었더니 상관없다기에 한번 해보겠다고 했다.” 장률 감독은 “원하는 장면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다큐멘터리 작업이 극영화보다 훨씬 힘들었다”고 전한다. 머릿속의 생각을 그대로 찍으면 됐던 극영화와 달리 다큐멘터리엔 “인내심”이 필요했다.

<풍경>에 출연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카메라를 바라보고 자신들의 꿈을 들려준다. “처음엔 각자의 삶을 인터뷰하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 경우엔 의도와 관계없이 질문하는 사람은 늘 강자의, 질문받는 사람은 항상 약자의 위치에 선다. 소통 지점을 고민하다 꿈에 대해 물어보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타향에서 꾸는 꿈과 고향에서 꾼 꿈은 다르다. 나도 그랬다. 결국 경계심 없이 편하게 카메라를 봐주더라.” 대상에 접근하는 태도보다 새로운 건 <풍경>이 건져올린 낯선 풍경이다. 서울이 이렇게 이국의 공간처럼 다가올 수 있다니. 장률 감독은 그것이 “늘 거기 있었던 풍경”이지만 “주로 아름다운 것들만 카메라에 담기다보니 그 풍경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스쳐지나갈 때 보이지 않던 것들도 한참을 보고 있으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 그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 둘 다 풍경이다. 서로가 서로를 풍경처럼 비추는 거다.” 어쩌면 장률 감독은 우리에게 그 풍경을 유심히 봐달라고 에둘러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경계에서 중심을 꿰뚫고 들어가는 시네아스트 장률 감독. 그의 차기작은 놀랍게도 “남녀의 아름다운 만남을 그린 코미디 멜로”다. “사람들이 내 영화를 하도 지루하다고 해서! 새로 데뷔하는 기분으로” 올여름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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