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 감흥을 주는, 영화제가 응원해 마땅한 영화.’ 전주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김영진 평론가는 <용문>을 상찬했다. <용문>은 YTN 앵커 출신인 이현정 감독의 첫번째 극영화. 자전적 다큐멘터리 <원시림>에 이은 신작이다. <시사매거진 2580> 같은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서 나올 법한 정력제가 소재로 사용되지만, 영화는 어느새 현실의 영역을 넘어 민화와 종교, 구원과 희망 같은 거대 주제로 은근슬쩍 넘어간다. 용문산 근처 뱀탕집에 사는 남자 용의 기이한 경험을 토대로 한 <용문>은 새로운 기운을 품은, 낯설지만 매혹적인 영화다.
-실제 용문산의 토속적인 에너지를 영화의 주요 에너지로 삼았다. 용문산을 배경으로 한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머릿속에 그린 가장 민화적이고 신화적인 느낌이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곳이 용문산이었다. 영화 찍기 전 사전 조사와 공부를 많이 했다. 용문산은 대표적인 뱀산이자 여자 산이다. 산 아래에선 스태미나 증진을 위한 온갖 정력제들이 팔려나가고 있다. 여기에 모든 상황에서 종말론적인 기운을 풍기는 지금의 분위기를 접목하고 싶었다.
-남자 ‘용’은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용문산에 존재한다. 그의 여동생은 아예 대놓고 그를 ‘등신, 머저리’ 취급한다. 그런데 탈북 여성은 그가 세상을 구원할 희망이라고 믿고, 그의 아이를 임신하려 한다.
=이 시대에 대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했다. 젊은 친구들만 봐도 당장 입사하기조차 힘들다. 자기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 이런 문제를 사실적인 다큐멘터리로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상징적인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다. 동양적인 의미에서 용은 서양의 슈퍼파워,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다. ‘용’은 곧 세상을 구원할 희망이고, 그래서 그의 2세는 이 세상에 대한 희망이 될 수 있다. 더불어 서구영화에서 뱀파이어나 엔젤 같은 캐릭터를 활용하는 것처럼, 동양에 있는 용이라는 캐릭터를 활용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내러티브에 구애받지 않고, 영화가 자유롭게 꿈틀댄다. 토속과 판타지, 현실이 어우러진다.
=조선시대의 민화, 풍물놀이 같은 것에서 착안하여 형식을 만들었다. 해학을 바탕으로 한 민화들은 잘 정제된 그림이라기보다 옷 솔기 같은 게 풀어져 있는 것 같은, 마무리가 덜된 그림 같기도 하다. 주제는 있지만, 그 주제를 형성하는 것에 일관성을 가지지 않고 각각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여성적이고 한국적인 것을 통해 그걸 표현하고 싶었다.
-<용문>에서도 드러나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장르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마트폰을 쓰며 디지털을 이렇게 가까이 쓰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영화도 뤼미에르 시대에 만들어진 형식을 굳이 고수할 필요는 없다. 엔터테인먼트로서의 가치만 요구받는 영화가 아닌, 내가 아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만든 최상의 것들을 관객에게 제공하고 싶다. 물론 너무 마이너한 영화라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첫 영화 <원시림>이 에든버러, 토리노 등 국제영화제에서 지속적으로 호응을 얻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구상 중인 다음 작품이 있다. 영화를 만드는 건 정말 노동집약적인 일이다. 첫 영화는 다큐멘터리라 내 맘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는데, 이번엔 모든 게 험난했다. 스탭 모두가 1인다역을 해냈다. 그래도 디지털 시대라서 나 같은 사람도 적은 예산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