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즈 루어만이라 참 다행이다. 그간 <위대한 개츠비>를 스크린에 제대로 재현하는 것은, 개츠비가 데이지의 사랑을 얻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물랑루즈>에서 보여준 화려한 시각의 세계, 그 노하우가 <위대한 개츠비>에 업그레이드되어 적용된다. 1920년대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객을 그 시대로 데리고 가겠다는 야무진 각오로 매달린 <위대한 개츠비>의 면면을 영화를 보기 전 미리 살펴본다. 3D 촬영, 세트, 의상, 음악까지 총망라된 입체적인 해부도다.
바즈 루어만 감독이 <위대한 개츠비>를 영화화할 결심을 한 건 2001년 겨울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였다. 막 <물랑루즈>의 촬영을 끝내고 나서 여행을 하면서였는데, 어릴 적 청소년 권장도서로 읽었던 때와 달리 이때는 오디오북을 통해 ‘듣는’ 경험이었다. “와인을 따르고 스쳐지나가는 시베리아를 바라보면서 듣기 시작했다. 새벽 4시까지 들었는데, 세 가지를 깨달았다. 첫 번째는 내가 그동안 <위대한 개츠비>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것, 두 번째는 구조가 정말 간결하다는 것, 마지막은 이 안에 정말 훌륭한 영화가 있다는 거였다.”
1925년 F. 스콧 피츠제럴드가 발표한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이다. 피츠제럴드가 소설 속 ‘멋진 신기루’라고 언급한 당시의 뉴욕은 2차대전 이후 주가가 폭등하여 돈이 흘러넘치고 자유분방하며 재즈와 파티가 연일 이어지는 과잉의 도시이자, 아메리칸드림을 좇아 중서부 지방에서 온 작가 지망생인 닉 캐러웨이가 도착한 곳이기도 하다. 닉은 이곳에서 연일 파티를 여는 백만장자 개츠비의 이웃이 되고, 강 건너 사는 사촌 데이지, 데이지의 남편인 귀족 출신 바람둥이 톰 뷰캐넌과 어울린다. 그리고 오직 첫사랑인 데이지를 되찾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의 모든 걸 바쳐 부를 축적한 개츠비의 사연에 대해 듣게 된다.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열망이 환멸과 허무, 그리고 죽음의 결말로 내닫기까지의 드라마틱한 과정은 이미 수차례 영화화되기도 했는데,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스크린 버전은 잭 클레이턴이 연출하고, 로버트 레드퍼드가 개츠비를 연기한 1974년작이다. 아쉽지만 로버트 레드퍼드는 원작 속 미스터리한 개츠비의 면면을 밝혀주는 캐릭터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1949년 엘리엇 누젠트 감독이 연출한 버전에서 (영화의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개츠비를 연기한 알란 래드의 연기가 호평을 얻었다. 1926년에는 흑백의 무성영화가 발표되기도 했는데, 지금은 프린트가 소실된 상태다. 2000년에 제작된 TV 드라마도 있다. 물론 이후에도 영화화하려는 이들은 적지 않았는데, 정작 발목을 잡은 건 복잡한 판권에 있었다. 판권의 소유가 이상하게도 피츠제럴드 가족이 아닌 케이블 채널 방송사인 AE엔터테인먼트에 묶여 있었다. 판권을 수소문하기 시작한 게 4년 전이었고, 그걸 가져오느라 설득하는 데 만 2년의 세월이 걸렸다.
제작비만 무려 1억2700만달러가 투입된 3D 블록버스터 시대극 <위대한 개츠비>는 뮤지컬영화 <물랑루즈>보다 한층 더 화려한 모양새다. 덕분에 개츠비의 대저택에 모여든 파티피플들처럼, 할리우드의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이 프로젝트를 향해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바즈 루어만의 1순위 배우였고,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의 친분이 더해지면서 어렵지 않게 캐스팅이 진행됐다. “개츠비는 ‘아메리칸드림’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를 표현할 단어는 ‘아메리칸 햄릿’이다. 이 복잡한 역할을 소화하려면 카리스마가 있는 동시에 내면적 섬세함이 필요하다.” 영화의 화자인 닉 캐러웨이를 맡은 토비 맥과이어는 디카프리오의 절친한 친구였고, 전화 한통으로 섭외가 된 경우다. 정작 경쟁이 치열했던 건 데이지 역할이었다. 워낙 지원자가 많다보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고전적인 캐스팅 방법을 적용해, 오디션이 아닌 리허설 방식을 택했을 정도다. 내털리 포트먼, 스칼렛 요한슨, 키라 나이틀리 같은 여배우들을 제치고 데이지 역을 차지한 건 캐리 멀리건이었다.
영화를 준비하면서 바즈 루어만 감독은 피츠제럴드가 있던 시절 지어진 건물들에 둘러싸인 뉴욕의 에이스 호텔에 머물렀다. “창 밖으로 뉴욕이 한눈에 보였다. 디카프리오가 창가에 앉아 있었고 어디선가 트럼펫 소리가 들렸다. 뭐랄까, 피츠제럴드의 세계였다. 우리 모두 그날 피츠제럴드가 지어낸 이야기와 그 시절, 장소로 돌아갔다.” 데이지의 마음을 얻는 데 전력을 다했던 개츠비처럼, 바즈 루어만 역시 <위대한 개츠비>를 완성하는 데 지난한 노력과 시간을 투자했다. “작품을 만드는 데만 4년이 소요됐다. 이제야 겨우 이 작품 말고도 내게 다른 삶이 있다는 걸 기억해내고 있는 중이다.” 바즈 루어만의 오랜 친구인 디카프리오의 말에 따르면 그는, ‘매 작품 마치 폭탄의 화력처럼 전력을 다한 뒤에 다시 인생을 재조명할 시간을 갖는 타입’이다. 이번엔 정말 메가톤급 폭탄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본 제이 개츠비
“개츠비는 데이지라는, 오래된 유적과 같은 신기루를 놓지 못하고 집착하는 길을 잃은 듯한 캐릭터다. 이 작품은 기존의 러브 스토리와는 많이 다르다. 개츠비에게 데이지란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단 아메리칸드림을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되는 ‘소유해야만 하는 물건’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녀를 소유하고, 지워버려야만 자신의 가난하고 보잘것없었던 과거도 깨끗이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캐리 멀리건이 본 데이지 뷰캐넌
“데이지 역에 캐스팅되었다고 말했을 때 모두들 ‘데이지? 그 캐릭터 정말 좋지 않아’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바꿔야 했다. 캐릭터를 심판하려 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왜 데이지가 이런 선택을 했는지 고민했다. 당시 상류사회 여성들은 좋은 집안에 시집가서 멋지게 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데이지 역시 자신이 그 정도 가치를 가졌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토비 맥과이어가 본 닉 캐러웨이
“재미있는 점은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며 닉이 응시하는 등장인물과 상황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찾는 것이었다. 화자인 닉의 관점을 통해 묘사되는 아름다운 캐릭터들이 많지만, 이중 일부는 전혀 변화하지 않는다. 반면 닉은 영화의 중심축이 되는 변화를 겪는다. 작가 지망생인 닉이 집필을 시작하면서부터 피츠제럴드의 원작 소설이 담고 있는 시적인 감성도 영화에 반영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