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이 또한 시대적 산물이다
2013-07-01
글 : 이주현
사진 : 최성열
영상물등급위원회 박선이 위원장에게 묻다

“(욕을 많이 먹어서) 오래 살 것 같다.” 감독조합이 영등위 위원장에게 책임론을 물은 다음날, 박선이 위원장을 만났다. 박 위원장은 제한상영가 등급에 대한 개인적 의견은 밝히지 않았다. 대신 제한상영가 등급의 폐지나 제한상영관 설치 문제는 영등위의 소관이 아니라고 했다. 등급 제도와 심의는 어디까지나 시대적 산물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그러면서 박 위원장은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결국 우스꽝스러워지고 마는 <어린왕자>의 가로등지기 얘기를 꺼냈다. 심의 제도가 가로등지기의 운명과 비슷하다는 거다. 그렇다면 현재 영등위는 세상의 속도에 발맞추고 있는 걸까.

-김곡, 김선 감독이 영등위를 상대로 낸 제한상영가등급분류 결정취소 소송에서 승소했다.
=제한상영가 제도에 관한 얘기는 환영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영화 한편 한편에 대해 얘기하는 건 조심스럽다. 김기덕 감독의 <뫼비우스>도 아직 심의 절차가 진행 중이니 이 부분 양해해달라.

-감독조합이 ‘<뫼비우스> 제한상영가 결정에 대한 한국 영화 감독들의 입장’을 발표하면서 영등위 위원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요구했다.
=영등위는 규정대로 <뫼비우스>의 등급을 심의했을 뿐이다. 김기덕 감독이 언론에도 공개했듯 영등위에 서한을 보냈고 영등위는 그 서한에 회신도 했다. ‘영등위는 감독의 창작 작업을 존중한다. 영등위의 등급 분류 행위가 작품에 대한 비평적 행위는 아니다. 영등위의 결정에 이의가 있으면 재분류 신청을 할 수 있다’는 요지의 답장이었다. 또한 내가 책임질 일이 있으면 져야겠지.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위원장이 책임질 일이 무엇인가 싶다.

-지난해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영화가 10편, 올해 상반기까지 7편이다. 5기 들어서 영등위가 보수화됐다는 지적이 있다.
=재밌게도 4월에 영화인들을 만났을 때는 5기 들어서 보수화된 게 아니고 새 정부가 출범한 올해 보수화됐다는 말을 들었다. 수치로 살펴보면, 지난 8년간 제한상영가 영화는 전체 영화에서 0.8∼1%를 차지했다. 2012년은 1%였고, 올해 상반기는 1.6%다. 제한상영가 영화가 늘어난 데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에서 허용하는 표현의 범위가 최근 들어 넓어진 것도 관련이 있다. 이 정도면 청소년 관람불가가 되더라, 하니까 그보다 더 센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진다. 그러다보니 청소년 관람불가로도 소화할 수 없는 영화들이 생겨난다. 전문위원이 6명, 영화등급분류소위원회 위원이 7명이다. 그중엔 영화감독도 있고 영화 매체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YMCA 아줌마들로만 구성된 기구가 아니란 얘기다.

-해외 영화제에서 호평받은 작품들이 국내에선 제한상영가로 온전히 상영될 기회를 박탈당했다.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는 것과 시장에 공개되는 문화상품으로서 규칙을 적용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2008년 헌법재판소는 제한상영가 등급 규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법상 명확성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왔다. 제한상영가 등급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는 결정은 아니었다. 그래서 명확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영비법이 개정됐다.

-제한상영관이 없는 상태에서 제한상영가 결정을 내리는 것은 해당 영화에 대한 사형선고일 수 있다.
=지난해 11월, 영국의 등급분류기구 BBFC 설립 100주년을 맞아 열린 ‘국제등급분류컨퍼런스’에 참석했다. 행사 중 하나로 ‘컷영화제’가 열렸는데 지금의 잣대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매우 바보 같은’ 결정에 의해 잘린 그림과 영상들이 전시됐다. 등급 제도는 100% 시대의 산물이고 결과다. 만약 당장 내년에 제한상영가 등급이 없어진다면, 그 동안 제한상영가 문제로 왈가왈부했던 일들이 ‘매우 바보 같은’ 한 시대의 논쟁으로 기록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등급 기준은 영등위가 정하는 게 아니다. 영비법 개정은 국회의 입법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제한상영가 등급이 존재하는 한 영등위는 기준에 맞게 등급을 결정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고 책임이다. 제한상영관 문제 역시 영등위가 나설 문제가 아니다. 지금의 영비법상으로는 제한상영관을 만들기가 힘들다. 제한상영관 설치에 관한 시행령 중에 ‘기존의 영화관 내에는 제한상영관을 설치하지 못한다, 제한상영관 내에서 다른 등급의 영화는 상영하지 못한다’는 조항 때문이다.

-제한상영가 문제를 영등위가 나서서 해결하지는 않겠다는 얘긴가.
=기관의 성격상 그럴 수 없다. 영등위가 제안은 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정부와 얘기해야 할 문제라고 본다.

제한상영가 등급 다른 나라에도 있다?!

영화의 등급분류보류제도는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각 나라의 문화와 국민정서를 반영한 결과다. 사실 제한상영가 등급이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제한상영가에 해당하는 등급이 존재하는 나라로 영국과 호주와 프랑스가 있다. 호주는 등급분류기구가 등급거부(RC)를 할 수 있고, 프랑스는 상영불가(T.B) 등급을 두고 있다. 영국은 18세 미만 관람불가(R-18) 영화는 전용극장에서만 상영할 수 있다. 그러나 영국에는 전용극장이 있고, 우리나라에선 애초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호스텔> <숏버스> 같은 영화들이 프랑스에선 16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았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스웨덴, 네덜란드, 핀란드,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들을 비롯해 독일, 오스트리아, 아일랜드, 미국, 일본에는 제한상영가 등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중 미국과 일본은 산업자율기구에 의해 자발적 영화 등급 분류가 시행되고 있다.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고 영화 제작사가 등급 분류 수수료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기구가 운영된다.

많은 나라들이 연령 등급을 세분화해 아동/청소년 보호에 힘쓰고 있지만, 성인에겐 표현의 자유와 그 결과물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관대하게 허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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