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정부 통제 여지 남아
2013-07-01
글 : 박주민 (변호사)
사전심의제도의 변천사로 보는 제한상영가가 내포한 위헌성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 영화를 상영하거나 유통시키기 위해서는 정부기관의 사전심의를 받아야 한다.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자극하고, 유통속도가 빠른 영화의 특성상 사후조치만으로는 국민의 정신건강 등에 미칠 수 있는 악영향을 적절히 제어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정부에 의한 사전심의제도는 집권자에게 불리한 내용의 영화를 사전에 억제함으로써 지배자에게 무해한 여론만이 허용되는 결과를 초래할 염려가 있는 등 예술활동의 독창성과 창의성 등을 침해하고, 국민의 정신생활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 그래서 현재 헌법은 사전심의 중 가장 폐해가 큰 사전검열만을 금지하고 있다. 여기서 ‘사전검열’이라 함은 일반적으로 상영이 금지된 상태에서 1)상영허가를 받기 위한 영상물의 제출의무, 2)행정권이 주체가 된 사전심사절차, 3)허가를 받지 아니한 영화의 상영금지 및 4) 심사절차를 관철할 수 있는 강제수단 등의 요건을 갖춘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정부에 의한 사전심의라고 하더라도 허가를 받지 않은 영화의 상영을 금지하지 않는다면 검열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영화 사전심의제는 영화를 둘러싼 사회 환경이나 사람들의 의식 변화에 따라 많은 변화를 거쳐왔다. 1996년까지는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서 당국의 사전허가를 받아야만 하는 사전검열제도가 시행되었었다. 정부는 이 제도를 이용하여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영화는 상영허가를 해주지 않음으로써 국민들이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전허가제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오면서 등급 분류만 받으면 모두 상영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영화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등급 분류를 받아야만 상영할 수 있는데 등급 분류 자체를 보류하는 제도를 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마음에 들지 않는 영화에 대해 등급을 주지 않는 방법으로 여전히 통제할 수 있었다. 2001년 이 등급분류보류제도 역시 헌법이 금지하는 검열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위헌 판결을 받았다. 이 위헌 판결을 계기로 등급 분류 요청을 하면 예외없이 등급을 부여하고, 등급을 부여받은 영화는 모두 상영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도입되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이 제도에 따라 정부가 부여하는 등급에는 모든 연령의 사람이 관람할 수 있는 등급(전체 관람가), 각 연령대 이상의 사람이 관람할 수 있는 등급들(12세 이상 관람가, 15세 이상 관람가, 18세 이상이 관람할 수 있는 청소년 관람불가) 및 성인이라 하더라도 제한상영관에서만 볼 수 있는 제한상영가 등 총 5개가 있다.

이것으로 영화에 대한 정부의 부당한 간섭 여지는 모두 없어진 것일까?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은 영화는 제한상영관이라는 영화관에서만 상영 및 광고를 할 수 있다. 제한상영관이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있다면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는 것이 특별히 문제는 안될 것이나 상황은 그렇지 않다. 제한상영관은 2004년에 2곳이 문을 열었으나 2008년에는 1곳으로 줄었고, 지금은 한곳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이 등급을 받은 영화는 형법상 처벌되는 음란물이 아님에도- 등급분류보류제도에서 등급을 받지 않은 것처럼- 성인이 돈을 내고서도 볼 수가 없다. 성인이 스스로의 판단에 의하여도 볼 수 없는 영화가 존재한다는 갑갑함을 차치하고서라도 정부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영화를 국민이 볼 수 없게 할 여지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하는 장면이 문제가 되어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은 <자가당착>이라는 영화를 보면 이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영화가 담고 있는 정치적 비판이나 성적인 표현에 대해 성인이 스스로 판단해볼 수 있는 여지를 주지도 않고, 정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영화에 대해 실질적으로는 상영할 수 없도록 하는 제한상영가등급제도 역시 위헌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지금까지 영화에 대한 사전심의제도가 시대에 맞춰 두터운 껍질을 벗어왔듯이 제한상영가 제도 역시 영화의 자유가 확장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여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