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영화를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어를 꼽자면 주저없이 ‘잉여’를 고르겠다. 주변부에서 쑥덕거리던 잡담에 불과했던 잉여들의 이야기는 먼지처럼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더니 어느새 온 방 안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채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단순히 캐릭터의 소재로 차용하던 것을 지나 이제는 제목 전면에 ‘잉여’를 내세우며 호기롭게 잉여로움을 외치는 영화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할 줄 아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청춘들은 나이가 들어도 변변한 벌이도 없이 엄마 집에 빌붙어 살면서(<고령화 가족>), 때로는 현피(현실에서 직접 싸움을 벌이는 것)에 몰두했다가(<잉투기>), 어느 순간 인터넷 성인만화 사이트를 그리겠다고 호들갑을 떨더니(<네버다이 버터플라이>), 갑자기 돈 한푼 없이 유럽 여행을 간다고 나서기도 한다(<잉여들의 히치하이킹>). 주위의 걱정어린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정작 본인들은 천하태평, 유유자적이다. 그런데 희한하게 답답할지언정 밉지는 않다. 별일 없이 살고 있는 이 잉여로운 삶들은 언제, 어떻게 한국영화의 전면에 떠올랐나.
잉여로 대동단결
변두리를 배회하던 것들이 어느 순간 중심으로 치고 들어올 때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대개는 새로운 활력이 필요한 주류 문화에서 주변부 문화에 깃든 반항적인 에너지를 끌어당겨 소비시키곤 하는데 이 과정에서 아예 중심 자체가 주변부로 옮겨가는 일도 있다. 어느 쪽이든 특정한 현상이 흐름이라 부를 만한 변화로 수면 위에 떠오르기 위해서는 다수의 동의와 공감이 필수다. 영화는 특히 그렇다. 영화만큼 문화의 맑은 윗물을 길어 정돈하는 매체도 드물다. 파격적인 실험영화가 불쑥 등장할 때도 있지만 대중매체로서의 영화는 대부분 관객이 충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된 다음에야 비로소 의미를 얻을 수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어떤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는가’ 하는 지점에 최근 대중의 보편적 인식이 반영된다는 뜻이다.
잉여는 현재 분명 새로운 문화코드로 떠오르고 있다. 인터넷, 웹툰, 소설, 드라마는 물론이고 문화 콘텐츠 각색의 제일 끝자락에 있다는 영화에서조차도 잉여 캐릭터들은 더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다. 사전적으로는 ‘다 쓰고 난 나머지’ 부분을 일컫는 이 말이 사람을 지칭하는 순간 부정적인 어감을 띠어야 마땅하다. ‘나머지 인간’이란 곧 필요 없는 존재라는 말 아닌가. 하지만 최근 영화에 투영된 잉여들의 모습은 부정적인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지질하고, 겁 많고, 게으르고, 무능력해 보일지언정 그들의 삶은 실패한 것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전반적으로는 부정적인 상태에 가득 차 보이는데도 그들을 바라보고 그려내는 시선은 연민, 동정, 공감 어느 하나로 결정지을 수 없다. 가령 <잉투기>에서 인터넷 격투기 동호회 활동 중인 태식(엄태구)을 살펴보자. 젖존슨에게 두드려 맞고 복수한답시고 찾아다니는 그의 꼴은 외모부터 내면까지 지질하기 짝이 없다. 다 큰 사내가 제대로 밥벌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보기엔 하잘것없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태식을(태식을 둘러싼 주변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조롱, 동정, 공감 어느 하나로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관람이랄까. 무수히 넘어가는 TV채널 중 하나처럼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슬쩍 관심을 주는 정도. 비난도 옹호도 없는 시선. 어쩌면 방관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한지도 모른다.
‘잉여’라는 단어로 묶어 단번에 설명하려 하지만 실상 잉여는 쉽게 선 긋고 단순하게 묶어낼 수 있는 집단은 아니다. 불안, 자학, 열패감, 게으름, 지질함, 웃김, 열정, 병맛 등등 잉여를 둘러싼 수많은 표현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이들의 정체를 명쾌하게 설명해내지 못한다. 잉여세대를 묶고 정의 내리고 싶어 하는 이들은 일찍이 알 수 없다는 의미로 X세대를 먼저 ‘창조’하며 기성세대와 신세대를 구분지었다. 무릇 인간은 불가해한 대상에 이름을 붙이고 아는 척하는 것을 통해 불안을 없애려는 욕망이 있다. X세대와 마찬가지로 잉여세대 역시 그러한 열망의 산물에 불과하다. 요컨대 잉여란 경쟁 사회에서 뒤처진 이들이 다수로 불어나자 편의상 묶어서 갖다붙인 이름표라는 말이다. 이름표가 곧 존재 증명이 될 수 없음은 당연한 일, 잉여세대라 불리는 이들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개성과 나름의 결을 지니고 있다.
‘너는 루저’와 ‘나는 잉여’의 차이
때문에 잉여라는 카테고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흡수한다. 패배감에 절어 자학을 반복하는 잉여가 있는 반면(<잉투기>) 잉여로서의 자신을 긍정하고 적극적으로 잉여력을 활용하는 잉여들도 있다(<잉여들의 히치하이킹>). 자신의 일을 즐기긴 하지만 세상 눈치도 적당히 볼 줄 하는 청춘들도 있고(<네버다이 버터플라이>),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뻔뻔하게 성장하지 않는 자식들도 있다(<고령화 가족>). 적극적으로 비주류를 선택한 이들과 비주류로 밀려난 이들, 방관자인 척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주류가 될 수 없음에 점차 무기력해지는 이들이 잉여라는 깃발 아래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잉여를 소재로 다룬 영화들은 비록 잉여라는 우산 아래 있지만 각기 다른 맥락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들이 품고 있는 불안, 성장통, 열정, 무모함, 비주류적인 저항정신 등은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1980년대 청춘영화에도 있었고, 2000년대 비주류 젊은이들의 감성을 담아낸 영화에도 있었다. 어떤 영화는 청춘을 소재로 한 기존의 이야기 관습에서 반복해오던 요소들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고(<잉투기>), 어떤 영화는 익히 보아온 젊은 날의 패기를 담는다(<잉여들의 히치하이킹>). 이들의 다양한 반응은 잉여세대를 향한 긍정과 부정 속에서 조금씩 뒤틀리고 어긋나 과거의 전형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비트>(1997)나 <고양이를 부탁해>(2001) 속 청춘들의 우울과 불안은 오늘날에도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의 결정적인 차이는 주류로의 진입 장벽이 더욱 높아졌고 이에 따라 소수였던 비주류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는 점이다. 자의든 타의든 (비극적이게도) 이제 잉여들은 다수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늘어난 집단의 수는 자신의 상태를 웃음과 해학으로 돌릴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나만 그런 건 아니라는’ 안심이다. 덧붙여 쓸모없음을 향한 맹렬한 돌진, 잉여력을 높이는 행위는 지금의 결과가 ‘내 탓만은 아님’에 대한 나름의 항변인 셈이다. 그 결과 영화도 만들고, 자존감을 회복하기도 하지만 이같은 변화가 굳이 성장(혹은 추락)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정확히는 변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현피를 가한 젖존슨이나 복수하겠다고 그를 찾아다니는 칡콩팥, 그런 잉투기의 판을 키우는 여고생 영자는 그저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을 뿐, 실상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큰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도피가 아닌 몰두다. 잉여를 굳이 세대 집단으로 묶어내는 게 가능하다면 그들이 첫 번째로 공유하는 지점은 바로 특정 행위에 대한 몰입이다. 그들이 잉여라고 불리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몰두하는 대상이 주류의 관점에서 볼 때 쓸모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일에 정력을 낭비하고 있으니까, ‘잉여’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쓸모없는 일이지만, 그들에겐 중요하다. 잉여들이 몰두하는 일을 ‘쓸모없는 것’으로 규정짓는 쪽은 대개 주류의 사고 아래 목표지향적 사람들이다. 경쟁과 줄 세우기에 익숙해진 그들이 볼 때 잉여들의 작업은 (사회적 목표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비생산적이다. 반면 잉여들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이들은 그들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상태에 주목한다. 게으르고 무기력해 보여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게 중요하단 말이다.
잉여들(혹은 잉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의 목표지점은 성장, 변화, 발전 따위가 아닌 인정이다. 그저 내가 지금 생겨먹은 꼴이 이 상태라는 인정. <아Q정전>의 작가 루쉰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승리’라고 해도 좋겠다. 다만 아큐(阿Q)의 정신승리가 도피에 가깝다면 잉여들의 정신승리는 세상 눈치 보지 않기다. 이는 서사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형태를 띤다. 궁극적으로 갈등 해결의 엔딩이 나올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있는 것은 오직 정직함, 잉여로운 짓을 함으로써 내가 여기 있음에 대한 존재 증명이다. 이는 영화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재현된다. 정치적인 항변 이전에 자기에게 솔직해지는 것. 이들은 ‘너는 루저’라고 질타받기 전에 ‘나는 잉여’라고 자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승리한다. 결기마저 느껴지는 잉여 선언. 여기에 낙담은 있어도 부끄러움은 없다. “내가 요즘 <나루토>를 보면서 느낀 게 존나 열심히 안 하면 안 될 거 같아. 근데 우린 열심히 안 하잖아.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일명 나루토 아저씨로 유명한 그룹 타바코쥬스의 보컬 권기욱의 멘트는 이러한 잉여의 자세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제부터 열심히 하자’가 아니라 ‘우린 안 될 거야’로 귀결되는 논리의 흐름은 무언가를 반드시 이뤄야 한다는 당위에 대한 거부와 자신에 대한 성찰(반성이 아니다)이 함께 담겨 있다.
성장을 거부한 웃픈 세대의 성장담
잉여가 집단이 될 수 있는 핵심은 웃음에 있다. 잉여짓은 내가 진지할수록 남들이 보기엔 우습다. 하지만 이는 조롱보다는 해학에 가깝다. 다수가 되어버린 잉여들은 잉여력이 높을수록(쓸모없을수록) 박수를 보내고 함께 웃으며 잉여스러운 행위를 지지한다. 너와 나는 그리 다르지 않다는,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공감대가 잉여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동시에 그럼에도 어디까지나 주류가 아님에 대한 열패감도 마음 한구석에 함께 자리한다. 적극적으로 잉여가 된 사람도 있지만 떠밀려와 잉여가 된 자들도 있다. 긍정과 부정의 이율배반적인 감정 속에서 전국의 수많은 잉여들은(혹은 잉여 대기자들은) 자신도 잉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한 채, 그저 ‘바라본다’. 요컨대 잉여는 기본적으로 관음증을 동반하는 행위다. 내가 더 잉여롭다는 걸 자랑하는 또 다른 경쟁 사회인 것이다. 대신 그 증명방식은 대개 병신력, 그러니까 누가 더 황당하고 웃긴가 하는 사실로 측정된다. 개인의 힘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한 뒤 무기력에 절어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살 수 없기에 간신히 찾아낸 머물 곳. 주류에 편입되지 못했다는 패배감과 내가 꽂힌 것에 몰두하며 만들어낸 창조적 에너지의 기묘한 동거. 잉여들은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 엉뚱한 고집을 비웃으면서도 가슴 한구석에서는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는 ‘찰진’ 병맛이야말로 잉여를 잉여답게 만드는 힘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0년 불쑥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응일 감독의 <불청객>은 이후 줄줄이 등장할 잉여영화들의 신호탄과도 같았다. 어느 날 갑자기 자취방과 함께 은하계에 뚝 떨어진 백수 잉여들은 자신들의 머물 곳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에 돌입한다. 딱히 삶에 의욕이 있던 건 아닌 그들이지만 그렇다고 남들이 마음대로 앗아가도 괜찮은 건 아니다. 이들의 저항이 결연할수록 병맛은 진해지고 병맛이 진해질수록 공감의 폭도 커진다. 88만원 세대에 바치는 정치적인 우화라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웃음을 통해 성장하지 않아도 좋은 잉여들의 왕국을 건설한다. 그들은 뭘 해달라는 게 아니다. 그저 여기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릴 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이 있는 곳에 영화도 있다. 잉여를 공감하는, 잉여에 발을 걸치고 있는, 잉여의 웃음코드를 이해하면서도 아직도 잉여가 아닌 척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당분간 잉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은 계속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