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자질구레한 생활상을 주 소재로 삼아 웃음을 양산하는 생활툰 작가에게 ‘잉여’란 꽤 친숙한 어휘로 느껴지겠지만, 막상 잉여됨을 주 소재로 삼는 작가들의 실생활은 의외로 빠듯하다. 간단해 보이는 그림체를 사용하지만 아이디어를 구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할 때가 많으며, 형편없는 아이디어로 분량을 채우다 보면 댓글란에 올라올 각양각색의 비난성 댓글에 시달리는 망상에 빠진다. 이렇게 빠듯하고 규칙적이고 건전한 마감생활을 지키다 보면, 어김없이 게으르고 나태하며 한없이 남아돌던 시간들을 동경하게 된다. 아마도 잉여의 의미는 직업과 직군, 개인의 성향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나의 경우 잉여질이란 그간 즐겨왔던 무수한 콘텐츠들, 그리고 ‘덕질’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를테면 옛날 영화 보기. 최근엔 크리스토퍼 놀란의 데뷔작, <두들버그>와 <미행>을 봤다. 어쩌면 놀란은 초기에 자신이 만들고자 했던 비전과 스타일을 확립해놨는지도 모른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의혹의 그림자>를 봤다. 그 시절의 상업영화에 근친에의 은밀한 성적 긴장을 담았다는 것은 지금 봐도 파격적이다. 미루고 미루던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를 봤다. 존 르 카레 옹의 냉정하고 결벽적인 필력은 40여년 전의 흑백영화를 현대영화처럼 보이게 만든다. <프릭스>를 봤다. 토드 브라우닝이 찍고 싶었던 건 교훈극이 아니라 그로테스크한 기형의 이미지임에 틀림없다. 데이비드 린치나 조도로프스키가 컬트의 제왕으로 불렸건만 진정으로 컬트의 원형으로 불려….
…잉여짓치곤 고상한가? 그렇다. 이상하게도 여러 덕질 가운데서도 유독 영화덕질은 고급스럽고 세련된 지적 행위로 용인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 때문에 다른 잉여짓에 비해 영화는 어디 가서 자랑스레 내세울 법한 건강한 레퍼런스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본지의 테마인 ‘잉여’라는 뉘앙스에서도 느껴지듯, 그간 내가 즐겨왔던 쓸데없는 짓거리의 역사에는 그닥 내세우고 싶지 않은 영양가 없는 추억들이 더 많다.
잉여를 추억하다
중학교 2학년 때가 생각난다. 반에서 유독 인기 없고 덜떨어진 친구들 다섯이서 이상한 모임을 만들었다. 아직 인터넷이 귀했고 성적 호기심을 해갈할 공간이 충분치 않았던 시절, 우리는 음란 콘텐츠라면 종류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수집하는 그 시절의 아날로그 P2P 시스템을 만들었다. 차창 틀에 끼워진 성인업소 전단지, 누드사진이 찍혀 있는 카드, 아빠가 빌려놓고 아직 반납 안 한 <터보레이터>, 형이 스포츠신문에서 스크랩해놓은 비키니 차림의 여인들 모음집(3천원짜리 플라스틱 파일철에 정성스레 수집되어 있었다), 대학생 누나가 읽던 성인소설, 쓰레기장에서 발견한 <도시정벌>, 교무실 근처에서 주워온 성인잡지 등 매주 N요일마다 그간 수집한 자료들을 한데 모아 공유하며 음담패설을 하는, 말 그대로 남아도는 자들의 모임이었다.
그중 가장 인기였던 건, 그 다섯 친구들 중 유일하게 컴퓨터를 잘했던 친구가 디스켓에 담아온 일본산 성인게임들이었다. 이건 신세계였다. 특정 레퍼토리를 클리어할 때마다 등장인물 한명 한명과의 정사 신을 감상할 수 있는 RPG 스타일의 게임으로, 훗날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미연시)게임의 효시 격으로 추앙받는 저 유명한 ELF사의 명작 <동급생> <드래곤나이트> <유작> 시리즈였다. 특히 <드래곤나이트4>라는 게임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전투 중에 여성 캐릭터 중 한명이 죽으면 아예 게임에서 퇴장해버려 그 캐릭터와의 야한 이벤트는 영영 볼 수 없게 되는 극악의 난이도 탓에, 혹여 여자 한명이 죽으면 마치 실제 연인이라도 되는 양 친구를 추궁하다 진지하게 주먹다짐했던 기억도 있다.
남들이 교회 소꿉친구와의 인연을 추억하는 유년 시절은 B급 아동영화에 대한 기억으로 점철되어 있다. 또래가 적었던 동네 분위기 탓에 놀아줄 친구가 없었던 소년은 남아도는 시간을 달래줄 무언가가 필요했고, 그때 소년이 꽂혔던 건 매대에 진열된 싸구려 아동영화였다.
어린이영화계를 휩쓸던 거장 남기남 감독의 <영구와 땡칠이>는 당연한 성지였으며, 그에 대한 대항마로 이창훈이 열연했던 <맹구와 북두신검>(하도 많이 봐서 대부분의 시퀀스와 대사를 줄줄 외우고 있었다), 이경규의 영화에 대한 포부가 돋보였던 <불의 사나이>, 코털 달린 히어로의 비주얼이 가히 충격적이었던 김흥국의 <반달가면>, 소화기로 장풍을 뿜는 켄과 사랑방에서 담소를 나누는 가일이 등장하는 컬트무비 <스트리트 파이터: 가두쟁패전>, 심형래 감독의 SF 야심작 <스파크맨>, 무려 어린이영화에서 <지옥의 묵시록>스러운 우울한 반전 메시지를 설파했던 저주받은 예술영화 <영구람보>, 개중엔 제목도 기억 안 나지만 어떤 스토리나 주제, 목적의식 없이 오로지 인기 개그맨 김한국이 슈퍼맨 복장을 하고 러닝타임 1시간 반 동안 서울의 모 유원지에서 바이킹만 타다 끝나는 포스트모던한 다큐멘터리도 있었다. 떡잎부터 잉여근성은 타고났는지 남들이 놀이터에서 소꿉장난을 하며 그 시절의 첫사랑과 달콤한 감상을 나눌 때, 나는 땀내나는 골방에서 싸구려영화들에 일일이 점수를 매겨가며 그해의 베스트를 뽑아 진지한 평론을 하는 등 하찮은 유년 시절을 보냈다.
성인이 된 지금도 이 저렴한 취향들은 크게 변하진 않았는지 웹서핑 중 삼천포로 새다보면 나도 모르게 슈퍼패미콤과 도스 시절의 명작 게임 포스팅, 일본 특촬물의 역사,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패망작 <슈퍼마리오>의 감독 로키 모튼의 근황, 오시이 마모루의 <케르베로스 사가> 일대기, <어니스트> 시리즈 짐 바니의 사망 원인, 가샤폰(캡슐토이)의 기원, <크림레몬> 시리즈는 어떻게 탄생했나, 도미노 요시유키의 퍼스트 건담에 담긴 정치학, 할리우드 괴작 열전, 루리웹의 피겨 게시판, 즐겨찾기 해놓은 90년대 아동영화 전문 블로그, 존 카펜터의 <LA탈출>과 <메탈기어솔리드>의 관계학, ATARI 5200 시절의 쓰레기 게임만을 리뷰하는 AVGN(앵그리비디오게임너드) 등을 클릭하며 곰팡내나는 음지문화의 지식들을 탐독한다. 돌이켜보니 참 잉여스러운 시간들이다. 말 그대로 쓸데없는 짓거리들이다.
잉여를 긍정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나는 이 잉여생활과 잉여시간 안에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나는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가 아니라 남기남의 <영구와 땡칠이 4탄: 홍콩할매귀신>에서 점프컷을 처음 배웠다. 베케트나 해럴드 핀터나 알베르 카뮈가 아니라 간밤에 야애니(음란성 애니메이션)인 줄 알고 클릭했던 <멋지다! 마사루>에서 부조리 코미디의 진수를 맛봤다. 로버트 알트먼이나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들이 아니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싸구려 국산 만화영화 <거리의 무법자>에서 멀티 플롯의 쾌감을 배웠다. 나는 감히 ELF사의 저급한 미연시게임 <드래곤나이트4>보다 더 뛰어난 타임루프물을 보지 못했다고 자부한다(최근에 나름 호평받은 <루퍼>나 <열한시>조차 그러하다).
물론 나는 이 정크푸드들이 예술적으로 정제되고 훌륭한 콘텐츠라고 변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지금 내가 서 있는 스토리텔링의 토양은 그 수많은 불량식품들에 일부 빚졌으며, 그 쓸데없어 보였던 잉여세월의 지식과 사념들이, 꽉 막힌 만화의 이야기다발을 풀어가는 주효한 키(key)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저 뜬구름 잡는 것 같았던 잉여지식의 보고가 창작을 위한 실질적 연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춘이여, 혹시 지금 당신이 잉여라고 생각되거든 낙담하지 말자. 지금의 그 하찮아 보이는 행위와 남아도는 시간들도 언제 당신을 위한 고마운 밑밥과 자양분으로 치환될지 모르는 일이다. 잉여는 고착된 결과물이 아니라 결과를 위한 필연적 과정일 뿐이다. 잉여는 남아돎이 아니라 과정 중에 놓여 있음을 뜻할 뿐이다. 고로 나는 잉여를 긍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