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 노모는 아직도 날 ‘백수’라고 부른다. 마땅한 직업 없이 한량처럼 사는 게 걱정스러운지 이따금 “요즘은 뭐하고 사냐?”라고 넌지시 떠보시곤 한다. 칠십 노모의 눈에 영화감독이란 뭐하고 사는지 늘 궁금한 인생 낭비의 딴따라인가 보다.
하긴 나도 내가 뭐하고 사는지 궁금할 정도로 달력과 시계를 멀리하고 산다. 어쩌다 출근길 지하철을 탈 때마다 그 물씬한 낯섦에 현기증이 날 정도로 낮에 일하고 밤에 쉬는 그 흔한 노동사회의 ‘평균인간’의 전형에서 한참이나 탈피된 삶을 살아가니까 말이다. 남들 잘 때 일어나 앉아 하릴없이 우주와 지구를 걱정하고, 남들 일할 때 허리가 아플 때까지 방바닥에서 뒹굴뒹굴 세월을 쏠고 있는 처지니까.
적지 않은 영화판 인간들이 나처럼 방바닥에 찰싹 눌어붙은 채 만유인력의 법칙을 스스로 증명하며 살아간다는 게 한줌 위안이랄까. 이번에 함께 작업한 촬영감독의 중학생 조카는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 꿈은 삼촌처럼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하고 놀면서 살잖아요.”
어느 모로 봐도, 요즘 장안의 화제인 ‘잉여’의 판박이다. 노동하지 않는 자, 시간 강탈자, 덕후들이라는 수식들로 빼곡히 비난되거나 자학되는 그 잉여인간 말이다.
러시아 문학 주인공과 다른 ‘신자유주의 쓰레기’
하지만 ‘잉여인간’은 본디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주인공들을 지칭하던 개념이었다. 투르게네프의 <잉여인간의 일기>가 나온 이래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온통 잉여인간들로 북적거렸다. 가깝게는 레르몬토프의 <우리 시대의 영웅>이, 멀게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도 이 범주에 포함되겠다.
러시아 문인들이 즐겨 형상화한 잉여인간이란 일반 서민보다 명민한 지성을 지녔으면서도 무료하게 소일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들은 게으른 방관자요, 나태한 몽상가, 혹은 일반적인 인간관계의 도식에서 떨어져나간 우울한 존재들이었다. 다소 낭만적인 필치로 이 게으른 방관자들의 페이소스를 그린 투르게네프와 대도시 지하와 선술집에서 자기 고독조차 직접적으로 대면하기 귀찮아하는 존재를 즐겨 형상화한 도스토예프스키나 사회 부조리와 직면한 채 행동보다는 방관을 택하는 우울한 비관주의자들을 그려낸 안톤 체호프 역시 ‘잉여인간’을 형상화한 작가들이다. 한국에선 손창섭의 <잉여인간>이 이 바통을 이어받아 사회에 부적응하는 비루한 지식인상을 그려내고 있다.
물론 나를 포함해 요즘의 잉여들이 그렇듯 귀족적으로 우아할 리가 있겠나. 러시아 문인들의 잉여는 부패한 제정 사회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거나 근대화 과정에 당혹감을 느낀 지식인들의 자의식이 투영된 존재들이다. 손창섭의 잉여인간 역시, 전쟁 직후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에 반해 요즘의 잉여인간은 그저 루저의 초상들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대로 신자유주의의 ‘쓰레기’, 바로 그게 요즘 잉여의 현주소다. 노동 시장에서 배제된 채 부모에게 근근이 용돈이나 받아 인터넷과 게임으로 시간을 죽일 수밖에 없는 노동 사회의 처연한 산업예비군 말이다.
물론 나 같은 딴따라들은 노동 시장을 스스로 벗어나 문화적 생산물을 창작하겠다고 결심했으니 ‘자발적 잉여’라 부를 수 있겠다. 남들은 돈이 안 되는 문화 따위나 만드는 낭비의 시간이라고 비아냥거릴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아무리 쪼개도 부족하기만 한 소중한 시간이다.
한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엉덩이에 땀띠가 나고 등에 욕창이 생길 정도의 잉여짓이 필요하다. 당신들은 놀고 있다고 말하겠지만, 난 그 순간 ‘노동’을 하고 있다. 영화를 보러 다니고, 방바닥을 뒹굴면서 하나의 아이템을 생산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고, 인터넷 바닷속을 유영하며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고, 다양한 음악을 들으며 무딘 감수성을 조금이나마 벼리기 위해 귓속을 청소하고, 엎드려 책을 읽다 그루밍하는 고양이처럼 나른히 졸고, 술집에 앉아 지인들에게 내가 얼마나 무능력한지를 고백해야만 비로소 그 광활하디광활한 시나리오 첫장의 여백과 마주할 용기를 얻게 된다.
시나리오 작업은 무릇 ‘여백’과의 싸움, 시간과의 투쟁이다. 사전 잉여짓을 통해 힘들게 길어올린 용기조차 그 여백과의 전쟁에서 나를 구원해주지 않는다. 하나의 이야기를 치약처럼 쥐어짜내기 위해 또 다른 잉여짓이 필요하다. 괜스레 집안 청소를 하거나, 갑자기 지구에 처음 온 사람처럼 온갖 요리를 만들거나, 넋 놓고 창밖을 바라보며 태양이 흘러가는 궤적을 맥없이 바라보거나,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바라보면서 왜 나는 이리도 외로운 것인가 주책맞게 궁상을 떨어야 간신히 시나리오 몇줄을 끼적일 수 있다.
이런 잉여짓이야말로 내게는 노동의 연장선상인 셈이다. 영화판에서 흔한 말로, 영화감독이 교수직을 겸하거나 다른 직업을 병행하면 영화작업이 힘들어진다고 한다. 영화라는 건 바로 이 잉여의 시간들이 구워져 빚어진 옹기와 같기 때문이다. 얼마나 이 시간을 잘 굽느냐에 따라 옹기의 빛깔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스즈키 세이준 감독이 말한 것처럼 “영화는 체력과 인내로 만들어진다”. 잉여짓을 감당할 수 있는 체력과 인내 말이다.
잉여시간에 대한 문화적 가치
물론 서울에 본가가 있거나 집안 사정이 나은 사람이라면 잉여짓이 그나마 여유가 있겠지만, 나처럼 살림살이를 온전히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시골 출신의 자취생이라면 이 잉여의 시간은 가뭄의 계절이기도 하다.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통장 잔고 앞에서 뭉크의 <절규> 같은 표정 짓는 게 매일이다. 지금도 난 월세가 다섯달치 밀려 있다. 그나마 촬영을 할 땐 밥이라도 공짜로 얻어먹을 수 있지만, 그외에는 만성 적자의 생활고에 시달려야 한다. 그 탓에 시쳇말로 ‘잘나가는’ 한줌의 감독들을 제외하고 지속 가능한 잉여짓을 위해 감독들은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거나 나처럼 ‘방 안에 처박혀 식물처럼 덜 쓰고 덜 움직인다’와 같은 엔트로피 전략을 취하곤 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문화판 딴따라들의 잉여 시간에 문화적 가치를 적용해 ‘사회적 비용’을 주자는 유럽 학자들의 주장이나 제도에 솔깃해질 수밖에 없다. 문화란 삶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활동이고, 이것을 순전히 시장법칙으로 강제한다면 우리네 삶이란 그렇게 단순하고 멍청해지기 때문이다. 지속 가능한 잉여짓이야말로 창작의 원천인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