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저울의자 위의 시간
2013-12-24
글 : 윤고은 (소설가)
잉여의 공포가 나의 힘이라는 소설가 윤고은

빠이(Pai)의 한 음식점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한국인이냐며 말을 걸어왔다. 그는 치앙마이에 있다가 빠이가 좋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왔다고 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세 시간이나 달려왔는데 막상 빠이에 오니 대체 뭘 봐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는 거였다. 빠이에서 보통 뭘 보냐고 묻는 그에게 나는 별로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이곳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오는 곳인 것 같다고 대답하자 그의 표정은 더 복잡해졌지만 사실이 그랬다. 빠이는 특별히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곳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시골이랄까. 사람들이 이곳에 오는 목적은 그냥 ‘잉여’ 그 자체였다. 거리에서는 ‘빠이는 시큰둥한 곳’이란 문장이 적힌 티셔츠를 팔고 있었다. ‘빠이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라는 문구도 자주 보였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개처럼 늘어져 있다가 기타를 치거나 엽서를 써서 우체통에 부치곤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오는 곳이라니, 마침내 허탈해진 그는 오후에 떠나는 버스 편을 알아보겠다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잉여’란 단어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그 시큰둥한 빠이에 있던 저울의자다. 둥근 테이블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던 그 의자들은 저울 위에 상판 하나를 얹어둔 형태였다. 사람들은 앉으면 체중이 행인들에게 노출되는 그 저울의자에 앉아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곤 했다.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그 위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보면, 앉아 있는 사람도 이것이 사실은 저울이란 걸 잊고, 저울도 무언가를 측정해야 한다는 본분을 잊고 만다.

빠이는 원래 치앙마이에서 매홍손으로 가는 중간에 자리잡은 간이휴게소 같은 마을이었지만, 이제는 그 자체를 목적지로 삼아 찾아오는 이들이 생겨났고 타이의 예술인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빠이의 잉여로움을 목적으로 찾아오기도 하고, 정말 잉여롭기만 한 것에 실망해서 떠나기도 한다. 내게도 빠이에서 보냈던 시간은 독특했다. 그리 오래 머문 것도 아닌데 오래 머문 것처럼 기억되기도 한다. 시간이 정말 느리게 가기라도 한 것처럼.

빵봉지의 성분표에서 발원된 소설

빠이에서 잉여로운 시간을 즐기긴 했지만,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잉여와 거리가 멀다. 빠이에 갔던 것도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뒤로, 내 행보는 궁극적으로 다 어떤 목적을 갖고 있다. 소설에 쓰지 않을 경험은 없다는 얘기다. 잉여라는 건 말 그대로 뭔가 ‘남아돌아야’ 가능한 것 아닌가? 지인들의 경험까지 소설로 써먹는 내게 쓸모없이 남아도는 게 있을 리 없다. 난 늘 굶주려 있는데 무슨 소리인가.

물론 내 소설 중 몇편은 잉여로운 한순간에서 출발했다. 이를테면 나는 빵봉지에 적힌 성분표를 읽다가 보름달 모양의 빵 대신 진짜 보름달을 이 봉지 속에 넣으려면 어떤 성분들을 기재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았다. 급기야 혼자 달의 성분표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과학적 가능성 따위는 일단 제쳐두고 활자가 가는 대로 달을 분석해본 거였다. 자외선차단제와 몇몇 색소와 15일마다 몸을 조정할 수 있는 보정용 코르셋 같은 것들이 등장했다. 상상은 달처럼 부풀어서 마침내는 그 달을 봉지에 넣어 하늘을 컨베이어벨트 삼아 대량생산하기 시작했고, 달의 분화 까지 떠올리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소설이 내 첫 소설 <무중력증후군>이었다.

쓰나미의 잔해들과 같은 해양쓰레기들이 흘러가는 경로도 음식의 성분표처럼 내 오랜 관심대상이었다. 그 경로에 대한 정보를 찾아 몇 시간씩 인터넷 속을 항해하다가 기어코 표류된 적도 있는 것 같다. 최근의 소설 <밤의 여행자들>은 그 쓰레기의 경로에서부터 시작된 소설이다. <인베이더그래픽>은 백화점 화장실이 콘센트도 있고 인터넷도 되고 소파도 있는 따뜻한 공간이라는 것을 체험으로 터득한 이후, 노트북을 들고 백화점 화장실들을 탐방한 뒤에 만들어진 소설이다. 종종 백화점 화장실에서 글을 쓰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는데, 그건 소설 속 화자의 이야기지 내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생각해보면 나는 잉여력을 창작에 반영하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살 만한 소설을 꽤 발표한 것 같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나는 잉여와 거리가 먼 사람이다. 왜냐하면 잉여롭게 읽힐 수 있는 내 동선들은 사실 창작에 활용하려는 의도를 가진 채 일어나는 불순한 행위이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창작에 동원될 운명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잉여라기보다는 투자에 가깝지 않은가. 설령 내가 오레오 쿠키로부터 크림과 과자를 차곡차곡 분리해서 두줄로 쌓아놓는 행위를 몇 시간 동안 지속한다고 해도 그건 잉여가 아니라 투자다. 언젠가 그 쿠키 분해 작업이 이야기에 활용될 날이 올 거란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소설이 결국 잉여에 빚진 부분이 있다는 것, 잉여가 창작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걸 인정한다. 다만 잉여의 영향력은 앞에 나열했던 느낌들과 조금 다르게 작동한다. 언젠가 나는 ‘어쩌면 우리 삶은 엄마 뱃속 몇달이 전부는 아니었을까. 그 이후의 기나긴 삶은 그저 덤일 뿐’이란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소설 <덤>의 첫 문장이다. 이 소설에는 탯줄을 끊고 나온 순간부터 인간은 모두 갈변되는 사과처럼 낡아간다고 믿는 대학생이 등장한다. 어차피 덤이니까, 설령 인생의 몇개를 포기하게 되더라도 크게 동요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지만, 정작 그 가치관을 지키며 살아가지는 못한다. 이 사회에서 잉여물로 통하는 게 두려운 나머지 어차피 모두가 태어난 순간부터 잉여라는 논리를 펼치는 셈이다. 삶은 어차피 남아도는 부산물 아닌가, 라고 말하면 뭐하나. 혼자만 그런걸.

그 소설에는 내가 가진 공포가 드러나 있다. 요즘에는 잉여가 가진 에너지에 주목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내게 잉여는 공포다. 내가 소설을 쓰게 된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결국 그 잉여와 맞닿아 있다. 지금 이 세상은 얼마나 잉여로운가. 책도 영화도 노래도 카페도 옷도 뉴스도 많은 세상이다. 모든 것이 차고 넘치는 세상, 이 세상의 잉여로움이 결국 나 하나쯤은 가볍게 생략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얼마나 공포스러운가. 결국 이 세상의 잉여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내가 함부로 생략될 수 없는 세상을 만들기로 한 거다. 사람마다 도피처가 다르겠지만 내게는 그것이 창작의 세계고, 소설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잉여로 인한 공포가 창작의 에너지로 변한 셈이다.

빠이에서 나는 ‘시큰둥’이란 단어를 보고 묘한 해방감을 느끼곤 했지만, 사실 진짜 ‘시큰둥’한 존재가 될까봐 온갖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잉여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하나는 내가 일부러 찾아간 잉여들의 세계, 빠이. 다른 하나는 내가 도망쳐 나온 지금 이 현실.

나를 증명하는 잉여로움

그 두 얼굴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보면 가끔 눈앞에 불쑥, 작은 섬처럼 무언가가 솟아오르기도 한다. 빠이에서 봤던 그 저울의자다. 늘 체중계 위에서 전전긍긍하던 사람이 빠이의 저울의자에 올라가 앉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처음에는 거리를 향해 자신의 체중이 중계된다는 사실이 어색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으면 결국 모든 건 무뎌진다. 사람은 지금 자신의 몸 아래에 있는 것이 저울인지 의자인지 망각하는 상태에 이르고, 저울은 제 위에 있는 것이 사람인지 짐인지 혹은 아무것도 아닌지 망각하는 상태에 이르는 지점이 온다. 그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그 경지가 내가 아직 규정할 수 없는 잉여의 세 번째 얼굴-어쩌면 진짜 표정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