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델라티프 케시시는 디아스포라의 개념이 다시 유행하는 ‘9.11’ 이후에 주목을 받은 감독이다. 말하자면 ‘테러사건’ 이후 아랍권에 대한 비상한 관심이 제기됐고, 특히 유럽이나 북미 등에서 조국을 떠나 사는 이슬람 출신 이주민들에 대한 관심이 증폭할 때 등장했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튀니지 출신 케시시는 독일의 터키 출신 파티 아킨과 더불어 유럽 내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가장 설득력 있게 묘사하는 대표적인 감독으로 수용됐다. 그 신호탄이 2003년 발표한 두 번째 장편 <레스키브>이다.
이주민들의 정체성 혼란을 다루다
<레스키브>는 케시시가 좋아하는 18세기 프랑스 코미디 작가 마리보의 <사랑과 우연의 유희>를 모티브로 삼았다. 이야기의 시공간은 파리 근교의 북아프리카인들이 몰려 사는 현대로 옮겨놓았다. 주로 알제리, 튀니지 출신의 이주민 2세들인 10대 고교생들이 학내 행사를 준비하며 마리보의 연극 <사랑과 우연의 유희>를 연습하고 있다. 오영진의 <맹진사댁 경사>처럼, 서로에게 관심이 있는 남녀가 일부러 신분을 바꾸어 다른 사람 역할을 하는 사이에 진정한 반려자를 찾아낸다는 코미디인데, 학생들이 연극을 연습하는 도중에 실제로 남녀 사이의 관계가 마리보의 허구처럼 진행되는 내용이다.
지극히 유럽적인 로코코 시대의 연극을 유색인 학생들이 백인 귀족보다 더 귀족으로 보일 정도로 과장된 연기를 하는 것 자체가 자기 성찰적인 시선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를테면 이들은 프랑스인처럼 구는 동료를 비판하지만, 동시에 프랑스인보다 더 세련된 유럽인으로 보일 때 기뻐하는 모습을 통해 이주민들의 정체성의 혼란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10대 소년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소녀는 금발에 가까운 머리칼을 가진 이주민 2세이다. 그리고 허구(연극)와 현실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희의 솜씨가 보통 세련된 수준이 아니었다. 10대들이 사랑의 질투에 빠져드는 과정은 연극의 연습과정인지, 아니면 현실의 상황인지 헷갈릴 정도로 허구는 현실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 마리보의 작품 제목을 빌리면, 케시시는 ‘허구와 현실의 유희’에 관한 최상급의 연금술사로 비쳤다. 도대체 이런 지적인 코미디를 만들어낸 감독이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는데, 케시시는 그해 프랑스 내 가장 권위 있는 영화제인 세자르영화제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모두 수상하면서 단번에 프랑스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등장했다.
프랑스 바깥의 관객에게 기억되는 또 다른 이 영화의 특징은 아마 파리 근교에 형성된 북아프리카인들의 거주지일 터다. 사실 그곳은 프랑스라기에는 아프리카의 식민지처럼 보였다. 거리에 유럽인들은 거의 없고, 심지어 학교에서도 학생들은 물론 교사들도 대부분 북아프리카인들이다. 과거에 프랑스의 식민지는 아프리카 대륙에 있었는데, 현재는 프랑스 내에 식민지가 이동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레스키브>는 유럽 내 아프리카 출신 디아스포라의 일상을 세밀하게 표현한 선구적인 작품으로도 기록됐다(<레스키브>는 2004년 광주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되었다. 나는 그때 크리스 후지와라 등과 함께 심사위원단에 참여했는데, 심사위원들은 전원일치로 이 영화를 최고작으로 꼽았다).
압델라티프 케시시는 북아프리카의 튀니지 출신이다. 6살 때 가족을 따라 프랑스의 니스로 이주했다. 부친은 공사판 인부였다. 남프랑스의 아름답기로 유명한 해변도시인 니스에서 자랐지만, 케시시는 노동자들이 몰려 사는 상대적으로 낙후된 지역에서 성장했다. 문학소년 티를 내던 케시시는 니스의 예술학교에서 연기를 전공하며 예술계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10대 때부터 연극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대엔 튀니지 출신의 감독들이 만든 영화에 배우로 출연하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1992년 역시 튀니지 출신인 누리 부지드의 <베즈네스>(Bezness)에 출연하며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했고, 배우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그 영화에 함께 출연했던 배우가 지금의 아내이자 현재는 그의 영화의 공동 시나리오작가이며 편집자인 갈리아 라크루아이다. 라크루아도 당시 제법 알려진 배우였다. 이후에 그녀는 장 뤽 고다르의 <포에버 모차르트>(1996)에서 주연으로 나오기도 했다.
감독 데뷔작은 <모든 게 볼테르 때문이야>(2000)이다. 파리로 불법이주한 튀니지 출신 청년의 이야기다. 파리에서 어떡하든 살아남기 위해 청년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계몽주의자 볼테르의 이상을 말하며, 주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데, 제목은 거기에서 나왔다. 북아프리카 출신의 정체성의 불안, 프랑스 고전의 인용, 현실과 예술 사이의 경계의 모호함,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담는 엄격한 리얼리즘 형식 등 케시시 영화의 특성은 여기서 다 나왔다. 이 데뷔작은 그해 베니스영화제에 초대되어 최고 데뷔작에 수여되는 ‘데 라우렌티스’상을 받았다. 데뷔하자마자 케시시는 유럽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것이다.
케시시의 이름을 세계로 알린 작품은 세 번째 장편인 <생선 쿠스쿠스>(2007)이다. 그해 베니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다. 그 해의 베니스는 걸출한 작품들의 경연장이었는데, 황금사자상은 리안의 <색, 계>, 은사자상은 브라이언 드 팔마의 <리댁티드>, 심사위원특별상은 <생선 쿠스쿠스>와 토드 헤인즈의 <아임 낫 데어>가 공동수상했다. 주요 수상자 명단 가운데 세계 영화계에서 이름이 낯선 감독은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의 앤드루 도미닉, 그리고 케시시였다. 말하자면 케시시는 쟁쟁한 감독들 사이에서 자신의 이름을 선명하게 기억시켰다.
<생선 쿠스쿠스>도 북아프리카 출신 이주민의 삶을 다룬다. 은퇴한 조선소 노동자가 가족들의 미래를 위해 배를 개조한 식당을 개업하는 이야기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영화의 전면에는 북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생선 요리인 ‘쿠스쿠스’가 강조돼 있다. 그 요리로 식당을 하면 경쟁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늙은 가장은 은행에서 대출도 받고, 주변의 도움을 받는데, 그 과정에서 북아프리카 출신 이주민이 프랑스에서 경험하는 차별과 고난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프랑스인들의 거만함은 물론, 자기 성찰적인 케시시의 영화답게 같은 아프리카 출신인 이웃들의 방해도 만만치 않게 제시된다.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순간은 역시 허구와 현실 사이의 경계의 붕괴이다. 특히 종결부의 식당에서의 벨리 댄스 장면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공연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영화에서의 관객의 관음증적 시선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 젊은 여성이 열정적으로 춤추는 육체의 구석구석을 카메라가 비출 때, 대부분 관객(특히 남성)은 관음증적 시선의 죄악과 하나의 허구를 보고 있다는 관찰자의 이성적 시선 사이에서 많은 혼란을 느낀다. 케시시가 관음증을 자기 영화의 주요한 테마로 제시하기 시작한 작품이 바로 <생선 쿠스쿠스>이다.
카메라 시선의 의미, 관객 시선의 역할 등 <생선 쿠스쿠스>에서 제기된 케시시의 새로운 테마들은 <검은 비너스>(2010)에서 더욱 강조된다. 이야기는 19세기 초에 남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유입된 흑인여성의 잔혹사다. 엉덩이가 특별하게 발달한 이 여성은 처음엔 서커스단 같은 데서 야만의 관능으로 전시되고, 뒤이어 매음굴에서 매춘부로 전락하고, 병에 걸려 죽은 뒤에는 시체마저 과학자들에게 팔리는 기구한 운명을 산다.
케시시 영화의 일반적인 주제인 유럽에 사는 아프리카인의 뿌리 뽑힌 삶이 전면에 제시돼 있지만, <검은 비너스>는 시작하자마자 사실 ‘재현이란 무엇인가’라는 미학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검은 비너스로 불리는 흑인여성은 마치 야수처럼 전시되며 관객의 혼을 빼는데, 사실 이것은 연기의 결과이다. 조련사를 자처하는 남성은 채찍을 들고, 야수를 길들이는 척하고, 비너스는 그와의 합의에 따라 천막극장의 객석을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그리고 큰 엉덩이를 흔들며 아프리카의 춤을 출 때면, 야수는 어느새 비너스로 둔갑하여 특히 남성관객을 흥분시킨다. 그러자 일부 점잖은 남자들은 조련사가 여성을 노예로, 또 성적 노리개로 착취한다고 기소하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비너스가 얼마나 연기를 잘했으면, 일부 관객은 그 허구의 훌륭한 재현에 화를 낸 것이다.
역시 허구(연기)와 현실의 경계는 모호해져 있고, 마치 브레히트의 서사극처럼 케시시의 영화는 자주 관객의 안전한 위치를 위험 속으로 빠뜨린다. 허구가 현실로 옮겨질 때, 그것은 허구인가 혹은 현실인가? 그 답을 분명하게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함, 불안, 공포 같은 감정이 자주 개입되는 게 케시시 영화의 매력임을 <검은 비너스>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케시시는 관객의 관음증적 시선을 더욱 적극적으로 다룬다. 비너스가 펠리니의 여성들처럼 비대한 엉덩이를 흔들며 춤출 때, 영화 속 관객은 성적 호기심을 숨기지 않고 환호하는데, 그 모습은 영화관에 앉아 있는 관객의 태도에 대한 비유이고, 또 관객 시선의 윤리적 위치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케시시는 시선을 문제 삼는 것인데, 그것이 여성의 육체에 관한 것이든, 혹은 이방인에 관한 것이든, 시선은 종종 폭력의 기제란 점을 늘 환기시킨다.
칸영화제의 황금종려상, 영광 혹은 시련
<검은 비너스>에서의 시선에 대한 강조는 이번의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도 두드러진다. 이 영화에선 처음으로 북아프리카인이 주인공으로 나오지 않았다. 곧 케시시 영화의 일관된 테마인 디아스포라의 존재조건은 빠졌다(물론 레즈비언이라는 성정체성에서 디아스포라의 불안한 경계를 느낄 수는 있다). 대신 대단히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프랑스의 두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알다시피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이들 사이의 간절한 사랑을 그린 멜로 드라마다.
그런데 케시시 영화의 일관된 특성들이 대거 빠져서 그런지,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칸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논란의 대상에 머물고 있다(여배우들의 감독에 대한 공격은 차치하고 말이다. 배우가 작업이 끝난 뒤, 연출자를 공격하는 것은 진정한 프로의 태도는 아니다). 어떤 이는 레즈비언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성장 드라마의 리얼리티에 환호하고, 또 어떤 이는 과거 작품들과는 달리 관음증적 시선을 통제하지 못한 상투적인 드라마라고 비판한다. 나는 후자 편이다. 케시시의 영화를 늘 좋아했던 한 관객으로서 안타깝기도 한데, 하지만 관음증을 자극하는 그렇게 긴 섹스 장면이 꼭 필요했는지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케시시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로 감독으로서 최고의 화려한 순간과 최대의 위기를 동시에 경험하는 것 같다. 다음 작품이 더욱 기다려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