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리의 학생들이 18세기 장편소설 <마리안의 일생>을 읽는다. 프랑스 극작가 피에르 드 마리보가 쓴 사랑 이야기다. 소설의 여주인공은 지금 막 운명적인 첫사랑과 조우한 참이다. 그녀의 혼란스러움과 열띤 감정이 교차하는 문장들을, 어떤 학생은 키득거리며 읽고 또 어떤 학생은 무심하게 읽는다.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 마리보의 소설 <마리안의 일생>은 순진한 처녀가 아름다운 귀족 청년에게 홀딱 빠진, 그저 그런 연애 이야기일 것이다.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뚫린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하는 얼굴들. 그 얼굴들 사이에 아델이 있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로 마무리되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도입부 불문학 수업 시퀀스는 감독 압델라티프 케시시의 어떤 선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부터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교실 책상에 앉아 사랑에 관한 소설을 읽던 소녀가 진짜 사랑을 하게 됩니다. 그녀는 사랑 때문에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어보기도 하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 아프기도 할 겁니다. 분명한 건, 그녀이든 영화를 보는 당신이든,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난 뒤에는 ‘사랑’이란 단어에 그렇게 무심하게 반응할 수 없을 겁니다, 라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사랑에 대한 강렬한 드라마를 장전한 작품이다. 세 시간에 달하는 이 영화의 러닝타임 동안 등장인물들이 경험하는 감정의 격랑에 함께 시달리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만남과 설렘, 격정과 불안, 이별과 상실. 다시 말해 어떤 러브 스토리에나 포함되어 있는 보편적이고 통속적인 감정들을 보는 이들이 사적이고 특별하게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는 재주가 이 영화엔 있다. 2013년 칸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순간부터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후의 과정까지,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 쏟아진 호평도 대개 이 영화가 선사하는 강렬한 정서적 체험에 대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은, 믿을 수 없겠지만, 바로 따뜻한 심장”이라는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평과 “이토록 강렬한 감정의 영화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면, 나는 당신이 부러우면서도 불쌍하다고 생각할 것이다”라는 필름닷컴의 코멘트를 상기해볼 만하다.
열다섯 소녀 아델(아델 엑사르코풀로스)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녀는 어느 날 길거리에서 파란 머리의 여자와 마주치고,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다. 얼마 뒤 우연히 가게 된 레즈비언 클럽에서 다시 그녀와 재회한 아델은 여자의 이름이 엠마(레아 세이두)이며, 순수미술을 전공하는 대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본능적으로 이끌린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지고 연인이 된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프랑스 작가 쥘리 마로의 그래픽 노블 <파란색은 따뜻하다>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한국 개봉명은 원작의 제목을 이어받았으나, 압델라티프 케시시가 지은 영화의 원제는 <아델의 삶 1장과 2장>(La Vie d’Adele - Chapitres 1&2)이다. 주인공 아델이 극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설인 마리보의 <마리안의 일생>(La Vie de Marianne)의 제목을 차용한 것이다. 이러한 케시시의 선택은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와도 맞닿아 있다. 극중에서 불문학 교사는 <마리안의 일생>을 읽는 한 여학생이 “난 여자이고 이건 내 이야기다”라는 문장을 읽어내려갈 때, 이렇게 말한다. “좋아. ‘난 여자이고’부터 다시 읽는데, 이번엔 머리 속으로 먼저 이렇게 되뇌어봐. ‘난 여자이고’는 사실이다. 거기서부터 이야기는 네 것이고, 사실인 거야.” 아직 텍스트에 불과한, 사실이 아니며 내 것이 아닌 이야기를 지극히 현실적이며 공감 가능한 인생의 단면으로 치환하는 것. 거기에 이 영화의 목적이 있다. 원작 그래픽 노블에 대한 케시시의 각색도 철저히 이런 목적에 따른 것이었다. <파란색은 따뜻하다>는 갑작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떠난 클레망틴(영화 속 아델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이 연인 엠마에게 유언처럼 남긴 편지와 일기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작품이다. 열렬하게 사랑했으나, 뜻밖의 죽음으로 관계가 종결되어버렸음을 처음부터 암시하는 이 작품은 사랑의 아름다움과 신파적인 슬픔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케시시의 관심은 이미 끝나버린 관계보다 지금 막 시작될 사랑의 감정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동성애에 대한 세상의 편견과 오래된 연인에 대한 의리 때문에 선뜻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했던 원작의 내용을 과감하게 잘라내고, 영화는 아델과 엠마를 재빨리 맺어준 다음 사랑을 시작한 두 여자의 관계 속으로 깊이 파고든다.
인물과 인물의 사적 관계로부터 그들의 사회적 정체성과 계급의 차이를 탐구하는 건 감독 압델라티프 케시시의 오랜 관심사였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도 그러한 케시시의 관심사는 여전하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연인이 된 아델과 엠마는 그들이 몸담아왔던 사회적 환경의 차이 때문에 점점 멀어지게 된다. 그녀들의 차이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서로의 집에 초대받아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다. 지적이고 우아한 상류층 가정의 표상인 엠마의 가족들은 “실질적인 게 좋아서” 교사가 되고자 한다는 아델을 존중하면서도 “늘 교사를 꿈꿨던 거니?”라고 묻는다. 반면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인 아델의 가족은 순수미술을 전공했다는 엠마에게 “먹고 살려면 진짜 직업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생계에 대한 걱정이 없어 더 높은 차원의 자아실현을 꿈꾸던 여자와, 거리에서 친구들과 함께 민영화 반대, 해고 반대를 외치며 일자리에 대한 고민을 늘 안고 사는 여자의 만남은 그들의 관계가 진전될수록 메울 수 없는 공백이 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주로 이민자 집단을 극의 중심부에 두고 프랑스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의 영화를 만들어왔던 케시시의 전작에 비하면 사회적 비판의 수위가 덜한 편이다. 그건 사랑의 다양한 과정을 순차적으로 경험해나가는 아델과 엠마의 내밀한 순간들에 영화의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배우 아델 엑사르코풀로스와 레아 세이두가 연기하는 두 연인은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 마치 관능주의 회화처럼 묘사된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질료는 두 배우의 몸이다. 레아 세이두의 부드럽게 미소짓는 눈매, 아델 엑사르코풀로스의 육감적인 입은 두 사람의 대화가 끊기는 순간의 어색함마저 상쇄할 만큼, 이 작품의 놀라운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케시시의 카메라는 마치 관음증 환자처럼 두 배우의 아름다운 육신을 바쁘게 훑는다. 종종 그녀들의 몸은 프레임 밖으로 사정없이 잘려나가기도 하지만, 인물에게 바짝 다가선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카메라는 마치 이 모든 이야기가 관객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인 양 뛰어난 생동감과 활력을 선사한다. 그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가장 큰 성취이자 한계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어떤 인물의 삶 중 가장 강렬했던 정서적 경험을 보는 이가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완벽하고 유려하게 조율된 이 영화의 세계에서, 창작자 특유의 도드라진 개성이 다소 희미해진 면이 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보고 난 뒤 영화의 어떤 특정 장면이나 구조가 아니라, 이 영화가 체감하게 해준 감정만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올해 한국 극장가에서 만나게 될 그 어떤 영화보다 강렬한 마무리를 장전하고 있을 영화다. 엠마의 전시회장을 나선 아델은 코너를 돌아 쭉 뻗은 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사랑했던 연인의 머리카락을 닮은 파란색 원피스를 입고. 격렬했던 한 시절을 마무리한 그녀의 삶은 어디로 뻗어나갈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영화가 끝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이 영화는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충만하다. 그것이 당신과 나와 우리의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