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왜 이브 생로랑은 몇번이고 부활하는가
2014-07-01
글 : 김경 (하퍼스 바자 피처 디렉터)
영화 <이브 생 로랑> 뒤의 진짜 삶을 돌아보다
<이브 생 로랑>

프랑스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의 전기영화 <이브 생 로랑>이 개봉한다. 그는 우리가 알아왔던 것보다 훨씬 더 연약하고 슬픔이 많은 ‘사람’이었으며 우리가 알아왔던 것보다 훨씬 더 방대하고 대담한 ‘예술가’였다. 이 영화가 그 점을 알려준다. 따라서 ‘이브 생로랑이라는 사람과 예술가’라는 관점에서 그를 살핀다. 한편, 이브 생로랑을 연기한 주연배우 피에르 니네이와의 서면 인터뷰도 덧붙였다.

<이브 생 로랑>

“이브 생로랑이 사람이었어? 난 무슨 상표 같은 건 줄 알았는데….” 2010년에 제작된 이브 생로랑에 대한 다큐멘터리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에 이어 곧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는 극영화 <이브 생 로랑>을 보고 있는 내게 남편이 하는 말이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거다. 영화와 음악에 대한 편애가 남다른 내 화가 남편의 인식마저 그렇다면 패션은 물론 예술과 무관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이브 생로랑’은 거의 금시초문의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둘 다 패션 역사에 한획을 그은 유명 패션 디자이너이긴 했지만 피에르 가르뎅과 이브 생로랑은 다른 사람이었어. 명성의 질이 다르다고 할까? 오트쿠튀르 사업이 어려워졌을 때 피에르 가르뎅이 좀 저열하다 싶을 정도로 라이선스 상표를 오만 군데 다 팔아먹은 판매왕이었다면 이브 생로랑은 끝까지 컬렉션(디자이너한테는 일종의 개인전인 셈이지)으로 승부하며 패션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진정한 패션왕이었다고 할까? 패션 디자이너는 물론 패션 저널리스트 모두가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는 패션왕.”

“그럼 톰 포드보다 더 대단한 거야?”

디자이너 톰 포드가 만든 영화 <싱글맨>을 제법 인상적으로 본 남편의 질문이다.

“그에 대한 재밌는 일화가 있어. 1990년 들어오면서 패션 환경이 완전히 바뀌었어. 이른바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통 명품이라고 부르는 오트쿠튀르(사전적으로는 ‘파리 쿠튀르 조합 가맹점에서 봉제하는 맞춤 고급 의류’를 말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아무나 만들 수 없고 아무나 살 수 없는 옷, 고급 맞춤복의 대명사’로 쓰인다)가 사업적으로 힘들어졌을 때 LVMH나 PPR 같은 거대 기업들이 구치같이 망해가는 브랜드를 인수해서 매우 영악하게 대중화시켰는데 톰 포드는 그 와중에 스타가 된 디자이너였어. 가장 존경하는 디자이너로 톰 포드는 이브 생로랑을 꼽았지만 이브 생로랑에게는 아마도 ‘톰 포드 따위’였을 거야. 그런 자가 이브 생로랑의 다른 기성복 라인인 리브고슈의 총괄 디자이너라니(오트쿠튀르 라인만 빼고 대부분 PPR 그룹에 넘어갔을 때), 이브 생로랑으로서는 자존심이 몹시 상했을 거야. ‘듣보잡’이나 다름없는 미국의 상업 디자이너에게 프랑스 패션의 자존심이나 다름없는 이브 생로랑을 맡기다니, 세상이 돈에 미쳐 돌아가는 것 같은 환멸을 느꼈을 거야. 그래서 톰 포드가 초대하는 이브 생로랑 데뷔 컬렉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어.”

<이브 생 로랑>
<이브 생 로랑>

예술가와 그의 파트너

개인적으로 난 이브 생로랑도 좋아하고 톰 포드도 좋아한다. 디자이너로서는 물론 인간적으로도. 둘은 무척이나 다른 사람이었다. 톰 포드가 매 시즌 컬렉션에서 자신의 컬렉션에 참석하는 전세계 에디터들의 호텔방으로 꽃을 보낼 만큼 능수능란한 마케터였다면 이브 생로랑은 정반대였다. 병적일 정도로 수줍음이 많고 스스로 ‘바보’라고 표현할 만큼 디자인 외의 사업적인 부분엔 젬병이었던 사람.

“수표도 겨우 쓰는 걸요.”

영화 <이브 생 로랑>에 등장하는 이브의 대사다. 별거 아닌 그 대사가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이브 생로랑의 연인 피에르 베르제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게도 ‘큐피드의 화살’처럼 꽂혔다. “아, 저게 바로 ‘천재의 방식’이구나. 학벌도 배경도 없이 오직 재능만으로 21살에 프랑스의 국보나 다름없는 브랜드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디오르’ 자리를 대신하게 된 천재 디자이너. 디자인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하고 싶지도 않은 천재 바보.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면 발작하듯 신경쇠약 증세를 보였던 남자. 내가 피에르 베르제였다 해도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당신은 천재니까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당신이 디자인만 할 수 있도록…. 물론 당신이 원한다면….”

1957년 10월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죽고 그의 젊은 후계자인 이브 생로랑 혼자 치른 첫 번째 컬렉션의 트라페즈 라인(당시 패션 흐름과 달리 상체와 허리를 강조하지 않은 채 사다리꼴로 우아하게 펼쳐지는 무릎 길이의 드레스)이 패션 관계자들의 열광적인 지지와 함께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당시 파리의 언론계에 따르면 디오르 하우스의 재정후원자인 마르셀 부삭은 이브 생로랑을 ‘기이한 멍청이’로 여기고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이었을까? 이브 생로랑이 전쟁 중인 고국 알제리의 부름을 받고 군 입대한 지 3주도 채 안 돼 극도의 신경쇠약과 조울증으로 정신병원 신세를 지게 되자 마르셀 부삭은 계약 기한을 무시하고 생로랑을 디오르에서 해고해버린다.

“마르셀 부삭 같은 최고의 부자들은 아무도 자신을 못 건드릴 거라고 생각할 거야. 그런데 그 오만함이 그자의 약점이지.” 천재성은 물론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금방 부서져내릴 것 같은 이브 생로랑의 정신적 병약함마저 사랑했던 피에르 베르제의 영화 속 대사다. 그 영화 <이브 생 로랑> 때문에 알게 됐다. 젊은 이브 생로랑이 디오르를 상대로 한 부당 해고 소송에서 승소하며 불과 스물여섯살에 자기 이름의 오트쿠튀르 브랜드를 가진 디자이너로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배경에 시인이며 예술적 심미안은 물론 투사 같은 강인한 정신력마저 갖춘 피에르 베르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걸…. 그가 아니었다면 이브 생로랑은 알렉산더 매퀸처럼 일찍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림자처럼 수족처럼 붙어다니며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이브 생로랑의 결핍을 메워준 피에르 베르제가 있었기에 그 모든 게 가능했다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정작 그 자신은 “당신은 천재적인 예술가다. 그러므로 내가 아니었어도 성공했을 거다”라고 말했지만.

<이브 생 로랑>

젊은 나이에 자살한 알렉산더 매퀸처럼 이브 생로랑도 우울증을 달고 살았다. 이브 생로랑의 필생의 연인이며 사업적 파트너였던 피에르 베르제에 의하면 이브 생로랑은 심지어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울증을 달고 이 세상에 왔다. 왜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베냐민이 쓴 ‘가장 느리게 공존하는 별’ ‘토성 아래 태어’난 사람들. 아니 베냐민이 프루스트에 대해 썼듯 “세상을 그 혼란상 속으로 끌어당기는 고독”과 함께 살며 은둔하고 방황하는 걸 반복적으로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예술가들. 여하튼 비운의 작가 베냐민처럼 이브 생로랑도 ‘현실감각이 부족’하고 ‘커피 한잔 끓일 줄 모르는 무능함’에 실수를 잘하고 서투르고 멍청해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실제로 그 자신은 베냐민이라는 작가는 잘 몰랐던 것 같고 그보다는 프루스트에게 더 동질감을 느꼈지만…. 랭보나 보들레르도 좋아했지만 프루스트를 너무 좋아해서 여행 갈 때마다 프루스트가 창조한 소설 속 인물 ‘스완’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피에르 베르제의 독백(다큐멘터리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에서)을 듣고 알았다. 이브 생로랑이 얼마나 천진할 정도로 예술을,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사랑한 사람이었는지.

디자이너로서 이브 생로랑은 여성들에게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바지 정장’을 선사한 인물이다. 1966년 컬렉션에서 선보인 이래 이브 생로랑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아이콘이자 시그니처가 된 ‘르 스모킹’ 스타일 말이다. 또한 68혁명이 일어난 해엔 아프리카 수렵복을 일상복으로 바꾼 최초의 ‘사파리룩’을 선보였다. 옷보다 인간의 나체를 사랑했던 디자이너답게 일찌감치 ‘시스루룩’을 선보인 디자이너였으며 최초로 흑인 모델을 고용한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1965년 그 유명한 몬드리안 드레스를 발표한 이래 달리, 피카소, 브라크, 반 고흐 등의 예술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패션을 유독 많이 선보인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컬렉션마다 패션사에 길이 남을 혁명적이고 독창적인 의상을 수없이 탄생시켰으며, 1983년 생존하는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메트로폴리탄 아트 뮤지엄 의상협회에서 25년 회고전을 가졌다.

하지만 그 자신은 패션은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패션이 예술은 아니지만, 삶의 풍요를 위해 미적 환영이 필요하다’고 믿었던 사람. 물론 나도 영화 속의 피에르 베르제처럼 외치고 싶다. “당신이 만든 걸 봐. 당신은 이미 예술가야.” 하지만 겸손한 천재 이브 생로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되레 예술에 빚졌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해독이 안 된다. 한 개인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위대한 미술 작품들을 구입해서 소장할 수 있었는지.

<이브 생 로랑>
<이브 생 로랑>

아름다움을 사랑한 남자

2008년 이브 생로랑이 세상을 떠난 뒤 피에르 베르제가 두 사람이 함께 수집한 미술품을 경매에 내놓았다. ‘세기의 경매’라 불렸던 그들의 컬렉션은 3억7350만유로(약 6천억원)에 달하는 단일 경매 사상 최고의 낙찰액으로 화제가 되었고, 수익금 전액은 에이즈 재단에 기부되었다. 그 과정을 매우 생생하게 담아낸 다큐멘터리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 그리고 패션과 예술의 경계를 넘어 아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한 남자 이브 생로랑의 ‘사랑과 번뇌’에 대한 새 영화 <이브 생 로랑>을 보며 생각했다. 결국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거라는 괴테의 말을….

‘이브 생로랑, 당신이 사랑한 건 아름다움이었어’라는 피에르 베르제의 고백. 그리고 “옷 입는 방식보다 삶의 방식이 중요하다”라고 했던 이브 생로랑의 오래된 경구. 패션은 예술이 아니라고 믿으면서 패션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예술품을 사들인 그들. 예술가의 창작의 고통과 고독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들. 그러나 부자들의 전리물이 된 위대한 미술품들. 돈의 흐름, 그 흐름에 대한 저항…. 한때 혁명을 꿈꾸었던 시인 피에르 베르제. 이브 생로랑에 대한 ‘미친 사랑’ 때문에 자기 일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한 그 남자 피에르 베르제가 이브 생로랑을 계속 부활시키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자신의 향수 광고를 위해서 ‘알몸의 예수’가 됐던 이브 생로랑을 사후에 진짜 예수로 만들고 싶은 남자 피에르 베르제 그 자신의 영화이기도 하고.

화석처럼 굳어진 이 세상의 모든 규범을 전복시키고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도전하게 만드는 아름다움의 힘. 그리고 그걸 넘어서는 사랑의 힘을 본다. 이브 생로랑과 피에르 베르제의 죽어도 죽지 않고 끝나지 않은 그 ‘미친 사랑’의 부활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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