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사람이 사람 죽이는 데 무슨 이유가 있나?
2014-07-17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이코패스 시대의 도래를 알린 <공공의 적>

요즘처럼 영화 속에 연쇄살인마가 넘쳐나는 시대에는 믿기 어려운 말이겠다. 한국 영화사에서 연쇄살인마는 그다지 환대받는 소재가 아니었다. 1999년에 개봉한 <텔미썸딩>에 이르러서야 이 소재가 대중의 큰 환심을 샀고 <텔미썸딩>은 그해 한국영화 흥행 순위 3위에 올랐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려는 영화는 <텔미썸딩>이 아니라 몇년 뒤 2002년에 나온 <공공의 적>이다. 심은하라는 당대의 스타 혹은 철저한 장르성으로 접근한 <텔미썸딩>과 다르게 사회와 영화가 영향을 주고받은 차원에서 보자면 <공공의 적>이 훨씬 기념비적이기 때문이다.

<공공의 적>에는 잔혹한 살인마 조규환(이성재)이 등장한다. 그는 주인공 강철중(설경구)의 강력한 적수다. 조규환은 화이트칼라 계층에 성공한 펀드매니저이자 거침없는 살인마다. 그의 악마성은 여과 없이 묘사된다. 사소한 시비가 붙은 택시기사를 기어이 집까지 찾아가 살해하는 장면은 그의 잔인성에 대한 예고에 불과하다. 자신의 돈벌이에 흠집이 생기자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난도질해 죽이는 존속살인도 서슴없이 저지른다. 강철중이 자신을 의심하자 수사에 훼방을 놓기 위해 관계없는 사람까지도 무참히 살해한다. 강철중에게 취조당하던 중 조규환은 되묻기까지 한다. “내가 죽였다고 치자. 그런데 사람이 사람 죽이는 데 무슨 이유가 있냐?”

병리학적 용어에서 정치, 사회, 문화적 현상의 개념으로

그런 조규환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 있는데 바로 사이코패스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반사회적 인격장애.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해 잔혹한 범죄를 일으키기 쉬운, 다수의 연쇄살인마들이 보이는 성향. 그런데 개봉 당시 언론의 표현을 보면 그를 두고 패륜아, 살인마, (그리고 <아메리칸 사이코> 때문일 텐데) 코리안 사이코라는 말까지 사용하지만 사이코패스라는 용어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영화를 연출한 감독도 이 용어와 뜻은 잘 몰랐던 것 같다.

사실 이유는 간단해 보인다. 2002년의 우리에게는 아직 그러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이코패스라는 용어가 출현한 건 200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부터다. 그즈음 실제로 드러난 연쇄살인범들의 존재가 그 말의 쓰임을 부추겼다. 놀랍게도 그 뜻이 아직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전에 완벽한 모델이 영화에서 제시되었던 것이다.

반사회적 인격장애라는 말이 뜻하는 바와 같이 이는 처음에 정신적 장애이자 질환으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공의 적>의 조규환도 일종의 정신 질환을 앓는 병자로 보아야 하는가. 이 점에서 영화는 가차 없이 그를 병자가 아니라 단죄해야 할 윤리적 죄인으로 판단한다. 그러고 나서 그에게 붙인 명명은 무엇이었던가. 공공의 적이다. 일개 살인마를 두고 공공의 적이라 부르는 게 당시로서는 다소 거칠고 투박한 확대해석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이 단순논리가 흥미로워 보인다. 왜, 그럴까.

사이코패스의 개념 혹은 용어는 광범위해진 나머지 우리의 일상에 완전히 뿌리박혔다. 인터넷상에서 사이코패스 진단법이 게임처럼 유행한 것을 우린 알고 있다. “저거 사이코패스 아니야?” 남의 험담이 오가는 과정에 그 말을 했거나 들은 걸 솔직한 당신이라면 기억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2013년 한 경제지 기사는 세계적으로 성공한 기업가 중에도 사이코패스 성향이 짙은 자들이 많다고 지적하며 2008년에 세계경제를 위기에 빠뜨린 리먼브러더스의 최고경영자 리처드 펄드를 꼽았다(<이코노미 인사이트>, 38호). 그리고 정신과 전문의인 한 칼럼니스트는 최근 한국 사회의 전방위적 폭력성에 우려를 표하면서 이렇게 어느 글을 끝맺고 있다. “사람을 대상으로 이용하는 것이 사이코패스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이코패스 정신으로 충만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한겨레> 토요판, ‘최병건의 자학의 거울’ 6회).

우리는 이 게임과 험담과 두개의 기사를 마땅히 나쁜 행위나 옳은 전언으로 치부하기보다는 하나의 묶인 현상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사이코패스는 더이상 희귀한 병리학적 질환성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 아니라 어떤 사소함과 왜곡이 끼어든 윤리적 판별의 문제부터 중대하고 심중한 윤리적 판별의 문제에까지 현저하게 등장하는 정치, 사회, 문화적 현상으로서의 광범위한 개념이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공공의 적>에는 감독이 힘주어 찍은 장면이 하나 있다. 강철중이 후배 형사를 앞에 놓고 조규환이 범인임을 이해시키기 위해, 네가 18억이 있다고 치자, 부모를 죽여서 그걸 얻을 수 있으면 당연히 죽이지 않겠냐, 하고 묻는 장면이다. 후배는 강철중의 말뜻을 모른 채 내가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정색하며 화를 낸다. 그의 우스꽝스러운 항변에는 투박한 윤리적 판단이 서려 있다.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판별의 문제. 영화 속 그 장면은 우스꽝스럽기는 해도 핵심을 찌른다. 훗날 도래할 게임과 험담과 두개의 기사에도 바로 이같은 기초적인 윤리적 판단의 문제가 폭넓은 차원으로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범죄가 아닌 쟁점

사이코패스는 우리에게 이제 단순 범죄 성향이 아니라 매사의 쟁점이 되었다. <공공의 적>의 사이코패스 조규환은 부풀려져 공공의 적이 되었지만, 지금 우리는 이 사회의 민족국가 단위의 불특정 공공의 적들을 판별하려 할 때마다 그가 사이코패스인지 아닌지 암암리에 의심하고 고려하게 되지 않던가. 익숙해졌고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만큼 폭넓게 끔찍해진 이 무섭고 무서운 현재적 쟁점. 그것을 <공공의-적>이 무심결에 알아보았다고 말하는 건 확실히 지나친 찬사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무식한 경찰 강철중만이 진범 조규환을 직감적으로 알아보았던 것처럼, 윤리에 대한 단순논리로 가득한 <공공의 적>만이 희한하게도 사이코패스가 지금 우리의 쟁점이 될 것이라는 전조를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게 바로 <공공의 적>이 사회와의 상호 영향의 차원에서 기념비적인 이유다.

돈과 인간

감독 강우석은 <공공의 적> 개봉 당시 <씨네21>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과거 내 영화에서의 사회풍자는 웃음을 경박하게 보이지 않겠다는 강박으로 끌어들인 게 사실이다. 하지만 <공공의 적>은 사회에 대한 나의 시각이 달라져서 나온 거다. 비즈니스를 하면서 주변에 돈 때문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 돈이 충무로에 들어와서 어떻게 사람을 망가뜨려가는지를 봤다. 나라도 확실하게 어떤 게 나쁜 거고 어떤 게 덜 나쁜 건지 그려야겠다 싶었다. 나 역시 내 영화를 통해서 나빠지지 않겠다는 의지랄까. 그게 만약 보수라면, 난 앞으로도 보수다. 이런 시각의 변화가 생겼을 때 <공공의 적> 같은 시나리오를 만났으니 바로 이 영화찍겠다고 생각한 거다.” 강우석은 당대 한국 영화산업 파워맨 부동의 1위였다. 그가 한동안의 비즈니스맨 생활을 정리하고 감독으로 돌아온 영화가 <공공의 적>이었다. 인터뷰의 내용으로 보아 감독으로서 당시에 그가 집중했던 사회의 폐단이란 돈과 인간성의 관계였던 것 같다. 그 뒤로 <공공의 적>은 공히 시리즈가 됐는데 1편을 뛰어넘는 영화는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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