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꽃보다 멋진 들풀
2014-09-09
글 : 이주현
사진 : 오계옥
이하늬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고 등장할 것 같았던 이하늬가 흰색 단화를 신고 사뿐사뿐 걸어왔다. “하이힐은 불편해서 못 신어요.” 그렇게 말하는 이하늬의 왼쪽 뺨에 보조개가 팼다. 굳이 힐에 의존할 필요 없는 173cm의 키. “어릴 적부터 한번도 작아본 적이 없어서” 되레 아담한 것들에 끌린다는 이하늬는 섹시하다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지 오래되지 않았다고 했다. <타짜>가 개봉한 2006년에 미스코리아 왕관을 쓴 이하늬는 호피무늬 수영복을 입고 화려한 미소를 지으며 강렬하게 등장했다. 20대 초•중반의 나이엔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성적인 시선”이 힘들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그것조차도 긍정적으로 바꾸어 받아들일 수 있는 내공이 쌓였다. “가만히 있어도 야하니까 붙는 옷 입지 말라던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섹시하다는 말은 건강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인 것 같다고. 이젠, 꽃이 가장 붉게 물들었을 때, 석류가 가장 잘 익었을 때를 표현하는 말이 섹시하다는 말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런데 실제론 저 백치미인데. 지적이고 섹시한 이미지, 그거 다 왜곡된 거예요.”

<타짜-신의 손>의 우 사장과 이하늬는 어렵지 않게 포개진다. 새빨간 가죽 원피스를 입고 영화에 처음으로 제 존재를 드러내는 우 사장은 화투판의 남자들을 단번에 사로잡는 섹시한 외모를 지녔지만 내면엔 아이 같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 사실 우 사장은 <타짜-신의 손>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통틀어 가장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표정으로 백치미의 끝을 보여주는 초반, 자신의 운명을 체념하듯 받아들이는 여자의 쓸쓸함이 묻어나는 중반, 악을 쓰며 복수를 감행하는 후반. 어떤 것이 우 사장의 “진짜 얼굴”인지 관객은 쉽게 판단할 수 없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여자죠. 사람들은 예쁜 꽃을 보면 꺾고 싶어 하잖아요. 우지현은 항상 꺾임을 당했고, 그것이 반복되자 이젠 꺾이고 밟혀도 들풀같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여자가 된 거죠. 그래서 마음이 짠해요. 우지현을 보면.” 국악을 오래했던 이하늬는 어릴 때부터 친숙하게 제 것처럼 받아들였던 “한의 정서” 때문에 우지현의 상처에 더 집중하게 된 것 같다고도 했다.

우 사장에게 사랑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하늬에겐 “우지현의 진짜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전 우지현이 진심으로 대길(최승현)을 사랑했다고 생각해요. 대길에게 우지현이 묻죠. ‘나 정말 사랑했어?’ 그 신에서 감독님은 우지현의 눈을 살짝 가렸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의외의 디렉션이었어요. 감독님은 직접적인 표현을 끝까지 피하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대신 관객은 <타짜-신의 손>을 통해 배우 이하늬의 다채로운 얼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8개의 치아를 가지런히 드러내는 미스코리아 미소 대신 얼굴 근육을 제멋대로 구겨가며 웃고 울고 발악할 때, 이하늬는 잠시 사라지고 우 사장만 오롯이 떠오른다. 뿐만 아니라 중성적인 저음부터 고음의 영역대에서 뒤집어지는 목소리까지, 이하늬는 목소리 연기에도 꽤나 신경 썼다. “이번에 목소리와 얼굴 표현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어요. 예전엔 어그러진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상상도 못했어요. 그런데 이젠 ‘알아서 찍어주세요’ 해버려요. (웃음) 음악을 오랫동안 해서인지 소리에도 민감한 것 같아요. 제게 로 베이스(low bass)의 목소리가 있는데, 그걸 한번 써보고 싶었어요.” 이하늬에게서 다양한 연장을 갖추고 있는 자의 자신감이 물씬 풍겼다.

“팔자 드세지게 왜 연기를 하려느냐. 늦지 않았으니 좋은 데 시집가라.” 초창기엔 이런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었지만 정작 본인은 연기를 하는 것 말고는 배수진을 쳐둔 게 없었기에 꾸준히 촉수를 연기에 집중시켰다. 한동안은 매일매일 뮤지컬 무대에서 그 에너지를 쏟았다. 그리고 이제는 에너지를 쏟아붓는 것을 넘어 “연기의 진정성”을 고민하게 됐다. “촬영장에서 뭘 배우면 안 되는데(웃음), 배운 것들을 장착해서 써먹어야 하는데, <타짜-신의 손> 찍으면서 많이 배웠어요. 진짜로 연기 잘하는 분들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깨달은 바가 크죠.” 현재는 “형형색색의 몸뻬를 입은 최연소 여성 이장”이 되어 드라마 <모던파머>를 촬영 중이다. 새빨간 가죽 원피스에서 몸뻬로 갈아입은 이하늬의 연기에, 몸뻬 고무줄이 가져다주는 편안함 그 이상의 여유가 묻어나리라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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