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관객이 왕이다!
2014-10-02
글 : 송경원
권위보다 재미를 추구하는 제39회 토론토국제영화제를 가다

제39회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를 위한 특별한 자리를 마련했다. ‘시티 투 시티-서울’을 비롯한 각종 섹션에서 총 14편의 한국영화가 소개된, 그야말로 한국영화의 해였다. 해외에서 본 한국영화의 현주소와 더불어 ‘북미의 칸’으로 불리며 각광받고 있는 토론토국제영화제의 이모저모를 전한다. <미스 줄리>로 돌아온 리브 울만 감독과 베니스국제영화제 남녀주연상을 석권한 <헝그리 하츠>의 사베리오 코스탄조 감독의 인터뷰도 더했다.

로저 에버트는 토론토국제영화제(이하 TIFF)를 사랑했다. 2006년 암치료 때문에 한해 불참한 것이 화제가 될 정도로 영화제의 단골손님이었던 그는 토론토가 칸영화제보다 더 유익하고 중요한 영화제라고 여러 차례 강조해왔다. 최근 몇년 사이 급격히 성장한 TIFF를 보며 이른바 세계 3대 영화제에 TIFF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로저 에버트의 주장이 그저 팬심에서 나온 외침만은 아니란 걸 실감한다. TIFF는 북미 시장의 실질적인 반응으로 이어지는 활발한 마켓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TIFF에서 관객상을 받은 <노예 12년>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것처럼 다음해 아카데미의 결과를 미리 점칠 수 있는 가장 앞선 평가의 장이라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북미의 칸’이라는 별명을 설명하기엔 모자란 감이 있다. 사실 TIFF가 몇년 사이 각광을 받고 있는 이유, 로저 에버트가 그토록 꾸준히 이 영화제를 상찬했던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그것은 TIFF가 진정한 의미에서 관객을 향해 있는, 관객을 위한 영화제라는 점 때문이다. 직접 영화제를 가보기만 해도 단박에 알 수 있는 이 당연한 사실이 오늘날 TIFF를 움직이고 있는 실질적인 동력이다.

관객, 스타, 미디어의 선순환구조

칸, 베니스, 베를린이 3대 영화제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이들 영화제를 통해 그해 새로운 발견들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 심사위원들(한계가 뚜렷한 선택이지만)에 의해 뽑힌 영화들은 해마다 각 영화제들이 지향하는 방향을 뚜렷하게 지시한다. 그 힘이 멀리 떨어진 우리에게도 느껴지는 건 이들 영화제가 좋은 영화를 전문적으로 선별하는 신뢰할 만한 경쟁영화제이기 때문이다. 반면 TIFF는 공식적으로는 비경쟁영화제다. 떠들썩한 지역 축제로서의 활력은 존재할지언정 3대 영화제 같은 권위를 얻기는 쉽지 않다(게다가 아직 39회라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는). TIFF가 이를 타개하기 위해 내놓은 방식이 다름 아닌 관객상이었다. 영화제 초기 관객상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해가 갈수록 대중적인 권위를 더해갔다. 여기엔 한 가지 결정적인 이점이 있었는데 북미에서 개최되는 영화제인 만큼 할리우드 매체들을 불러모으기 쉽다는 거였다. 실제로 올해 TIFF에 참가한 매체 수만 해도 300여개에 달하고 그중 절반에 해당하는 150여개가 모두 북미쪽 매체였다. <스크린> <할리우드 리포트> <버라이어티> 등 배포되는 데일리를 만드는 공식 매체만 5개가 넘고 실질적으로 북미쪽 메이저 매체와 방송은 모두 참여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토록 많은 매체들이 기꺼이 TIFF를 찾는 이유 또한 단순하다. TIFF에는 아카데미를 방불케 하는 스타들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관객이 있으니 스타가 오고 스타가 모이니 언론이 주목한다. 언론이 주목하니 다시 관객이 모이고 관객이 모이니 적극적인 홍보의 장이 된다. 영화제 기간 내내 스타가 방문할 때마다 출연한 영화에 대한 다양한 기사가 쏟아지고 관객이 영화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영화제에 모인 바이어들, 각국의 수입•배급사들 역시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말하자면 TIFF는 매일매일이 거대한 영화 품평회다. 영화제도 이 점을 충분히 알고 있기에 떠들썩한 이벤트나 행사보다는 관객과 언론이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관객, 언론, 스타의 선순환구조로 거대해진 톱니바퀴를 굴리는 건 결국 ‘영화관람’이 충실하게 이뤄질 수 있는 환경이다. 직접 방문한 TIFF의 열기 속에서 바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영화제와 영화제에 모인 관객, 심지어 초청된 배우와 감독들까지 매우 부지런히 움직인다는 사실이었다. 영화를 보고 말하고 토론하는 자리가 실질적으로 영화제에서 가장 중요한 메인 이벤트다. 다만 경쟁영화제가 아닌 까닭에 온전한 축제로서의 열기가 우리에게 좀처럼 체감되지 않았을 뿐이다. 아직까진 마케터, 바이어들이 더욱 주목하는 영화제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와일 위어 영>
<이미테이션 게임>

관객상에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 <이미테이션 게임>

수많은 언론이 관심을 기울이는 만큼 300편 넘는 영화 중 갈라나 스페셜, 미드나이트 매드니스 섹션에 초청된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 논평에 오르고, 비경쟁인 만큼 언론의 논조도 결과에 대한 예측과 평가보다는 작품 소개에 무게가 실린다. 평가는 관객 투표에 맡긴다는 느낌이다. 영화제 중반에 이르면 어느 정도 평가가 갈리기 마련이지만 영화제 관계자에 따르면 올해는 대체로 고르게 관심이 흩어졌다는 후문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관심이 이어진 작품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모텐 틸덤 감독의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이었다. 2차대전 당시 암호해독 분야에서 활약한 수학자 앨런 튜링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결국 최종적으로 관객상을 수상하며 올해의 승자가 됐다. 하지만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는 주로 주연을 맡은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연기력에 대한 언급이 대다수였던 만큼 아카데미 작품상보다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을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다.

컴버배치에 이은 올해의 배우라 부를 만한 애덤 드라이버는 노아 바움백의 신작 <와일 위어 영>(While We’re Young), 초호화 출연진을 자랑하는 <디스 이즈 웨어 아이 리브 유>(This Is Where I Leave You), 베니스 남우주연상을 안긴 사베리오 코스탄조 감독의 <헝그리 하츠>(Hungry Hearts)까지 무려 3편의 출연작을 선보였다. 인디 성향의 코미디부터 기획 상업영화, 외국 감독의 저예산영화까지 영화제 전체를 아우를 만한 구성이었다. TIFF 프로그램 중 메인은 아무래도 개봉을 앞둔 하반기 신작, 북미시장을 염두에 둔 3대 영화제를 비롯한 여타 영화제의 출품작들이다. 말 그대로 관객이 보고싶어 할 영화들을 한자리에 모은 화제의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올해는 제67회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폭스캐처>(Foxcatcher), 선댄스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위플래시>(Whiplash) 등이 주로 거론되었고 후반 베니스영화제의 결과가 전해지며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더 룩 오브 사일런스>(The Look of Silence)에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북미 개봉을 앞둔 작품 중에서는 스티븐 호킹의 이야기를 다룬 <시어리 오브 에브리싱>(Theory of Everything)이 많은 호평을 받았는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연의 <더 저지>(The Judge)처럼 마케팅에 신경을 쓴 것에 비해 반응이 썩 좋지 않아 실망스러운 사례도 종종 있었다. 영화제 관계자에 따르면 시라 피븐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웰컴 투 미>(Welcome to Me)>, 에드워드 즈웍 감독의 <폰 새크리파이스>(Pawn Sacrifice) 등 크지 않은 영화들도 전반적인 호평 속에 끝까지 후보로 오르내렸다고 한다. 관객의 호응도가 가장 높은 미드나이트 매드니스 부문은 따로 관객상을 뽑는데 올해는 <뱀파이어에 관한 아주 특별한 다큐멘터리>(What We Do in the Shadows)에 그 영광이 돌아갔다. 뉴질랜드에서 만들어진 이 신선하고 웃긴 공포영화는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인기리에 상영되기도 했다.

영화제가 끝나도 영화는 계속된다. TIFF 센터에서 2014년 10월31일부터 2015년 1월25일까지 열리는 스탠리 큐브릭 특별전을 홍보하기 위해 <시계태엽 오렌지> 속 인물로 분장한 사람들.
관객과 만난 알 파치노.

캐나다영화 발굴을 위한 통로

영화제의 메인이 여러 영화제에서 이미 소개된 화제작과 개봉예정작들이라면 이에 보조를 맞추는 건 캐나다영화의 발굴이다. TIFF는 이를 위해 캐나다 장편, 단편 섹션을 따로 둘 정도로 관심을 쏟고 있다. 올해 신인감독상의 영광은 제프리 St. 줄스 감독의 <뱅 뱅 베이비>에 돌아갔다. 시골 마을을 탈출하고 싶은 소녀와 우연히 마을을 찾은 록스타가 만나서 벌어지는 1960년 배경의 뮤지컬영화다. 흔히 캐나다영화 하면 다른 영화제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잔잔한 영화들이 주를 이루는 것 같지만 그 속에 얼마나 많은 개성과 가능성이 잠자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이제는 스타감독이 되어 국외에서 주로 작업 중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맵 투 더 스타>(Map to the Star)나 <인디에어>로 이름을 알린 제임스 라이트먼의 신작 <맨, 우먼 앤드 칠드런>(Man, Woman & Children)에는 여전히 캐나다영화의 인장이 곳곳에 묻어 있어 내셔널 시네마와 월드 시네마가 교차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월드 프리미어 또는 북미 프리미어를 중심으로 한 신인감독들의 장을 마련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화제나 주목도 면에선 다른 섹션에 비해 다소 관심이 옅어 보인다.

이루 다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영화가 각자의 개성을 뽐내며 충분히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TIFF는 진정 영화를 위한 영화제라 할 수 있다. 관객에게 권력을 넘기는 순간 자연스레 따라오는 언론의 관심과 이를 영리하게 활용한 마켓으로서의 파괴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어쩌면 영화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성실한 소통의 현장, 그것이 로저 에버트가 그토록 강조했던 TIFF의 잠재력인지도 모른다. 비평가로서 스스로 “관객과 해외 독립영화, 다큐멘터리 필름을 잇는 다리”가 되고자 했던 로저 에버트에겐 실로 이상적인 영화제인 셈이다. 아직까진 북미 지역을 공략하기 위한 교두보로서의 성격이 짙지만 관객을 먼저 염두에 둔 ‘재밌는’ 영화제라는 점에서 한번 방문한 이의 발길을 계속 잡아끄는 매력이 있다. 무엇보다 영화 한편을 보기 위해 긴 줄을 대기하면서도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서로 영화에 대한 토론을 나누기에 정신이 없던 관객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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