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ography
<스타워즈: 에피소드7>(2015) <오블리비언>(2013) <트론: 새로운 시작>(2010) <이디오크러시>(2006)
미국의 전설적인 프로덕션 디자이너, 시드 미드가 한때 포드사에서 일했던 산업 디자이너 출신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래의 SF영화를 만드는 수많은 감독들에게 영향을 미친 그의 프로덕션 디자인- <블레이드 러너>의 스피너, <에이리언2>의 파워 로더 등- 은 영화적 상상력을 겸비한 감각 좋은 디자이너가 세계 영화사에 가져올 수 있는 혁명의 좋은 선례였다. 시드 미드의 대표작이기도 한 1982년의 오리지널 <트론>을 리부트하려던 조셉 코신스키 감독은 영화제작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그래서 누가 우리 시대의 시드 미드인가?” 이 질문의 대답으로 선택된 이가 바로 대런 길포드다. <트론: 새로운 시작> 이전에 프로덕션 디자이너로 참여한 작품이라고는 마이크 저지의 코미디영화 <이디오크러시> 한편에 불과했으며, <트랜스포머> <오션스 13> <왓치맨> 등의 영화에 컨셉 일러스트레이터로 참여했던 그이지만, 자동차 디자이너로 활동했던 대런 길포드의 경력을 <트론: 새로운 시작>의 제작진은 높이 샀던 듯하다. 그들의 모험은 틀리지 않았다. 시드 미드가 창조해낸 오리지널 <트론>의 세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21세기의 기술과 자본력을 동원해 새롭게 구축된 ‘트론’의 세계에 매혹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 결과 대런 길포드는 할리우드에서의 길지 않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조셉 코신스키의 차기작이자 톰 크루즈가 주연을 맡은 <오블리비언>(2013) 등 굵직한 블록버스터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의 다음 작품은, 2015년 최고의 화제작인 <스타워즈: 에피소드7>이다.
공간과 소품에 캐릭터 부여
대런 길포드가 프로덕션 디자이너로 참여한 <트론: 새로운 시작>과 <오블리비언>에서 특히 돋보이는 건 ‘기계미’다. 기계의 차갑고도 세련된 질감과 그런 기계의 개성을 상쇄하는 완만한 곡선의 디자인은 미래 지향적인 디자이너로서 길포드의 개성을 보여준다. 특히 주목해야 할 건 <트론: 새로운 시작>이 선보인 업그레이드 버전의 라이트 사이클이다. 시드 미드와 오리지널 <트론>에 오마주를 바치고 싶었던 대런 길포드는 80년대 당시 기술의 한계로 시드 미드가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라이트 사이클의 모습을 구현해냈다. “시드 미드는 라이트 사이클을 처음으로 구상하며 라이더를 볼 수 있는, 열린 조종석을 생각했었다. 하지만 당시에 구현할 수 있는 사이클의 마력이 한정되어 있었기에 그는 조종석이 밀폐된 사이클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오리지널과 <트론: 새로운 시작>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 바로 시드 미드가 처음으로 생각했던 그 디자인에 있다고 봤다. 우리는 라이더의 형태가 보이는 사이클을 만들고 싶었다.” 프로덕션 디자인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기 전, <트론>의 감독 스티븐 리스버거와 시드 미드가 구축한 오리지널 영화의 아카이브에 접근할 수 있는 행운도 얻었지만 결국 그로부터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낸 건 전적으로 대런 길포드의 공이다. 그가 <트론: 새로운 시작>에서 성취한 새로운 유산은 라이더와 바이크가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마치 하나의 새로운 유기체처럼 느껴지는 질주 장면을 완성했다는 점일 것이다.
기계와 캐릭터가 한몸처럼 느껴지는 프로덕션 디자인은 <오블리비언>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드론 조종사인 잭 하퍼가 스카이타워와 지상을 오갈 때 이용하는 버블십이나 지상에서의 정찰을 위해 사용하는 모터바이크는 잭 하퍼를 연기하는 톰 크루즈의 신체 구조에 딱 맞게 설계되었다. 실제로도 숙련된 바이크 라이더인 톰 크루즈에 따르면, <오블리비언>에서 대런 길포드가 구현해낸 모터바이크의 디자인은 외관뿐만 아니라 바이크의 밸런스가 이동한다는 점에서 혁신적인 결과물이라고 한다. 이처럼 기계의 비인간적인 특성을 캐릭터에 대한 치밀한 연구와 조화를 통해 상쇄하는 대런 길포드의 프로덕션 디자인은 공간과 소품에 캐릭터를 부여하길 원하는 뭇 SF영화의 제작진을 사로잡을 것이다.
빛과 조명을 잘 이해하다
한편 대런 길포드가 참여한 두 작품을 보면, 자연스럽게 그가 빛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암전된 디지털 세계를 가로지르는 <트론: 새로운 시작>의 네온사인과 결벽에 가까운 백색의 공간미를 보여주는 <오블리비언>의 스카이타워는, 빛과 조명의 쓰임새를 잘 이해하는 이들만이 창조해낼 수 있는 공간과 디자인으로 보인다. 흥미롭게도 커리어의 출발 지점부터 빛(<오블리비언>)과 어둠(<트론: 새로운 시작>)으로부터 시작되는, 상반되는 개성의 SF 블록버스터를 두루 경험한 셈인데, 어떤 경우에든 “CG와 현실세계 사이의 경계를 지속적으로 흐리게 만들려 한다”는 대런 길포드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가 <트론: 새로운 시작>의 스탭들에게 도시의 한 블록에 해당하는 세트를 짓게 한 다음,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바닥과 천장, 심지어 음료수 잔에까지 형광불빛을 설치하게 만들었고, <오블리비언>에선 2만t이 넘는 알루미늄과 섬유유리의 혼합체인 버블십을 직접 제작한 이유 또한 CG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질감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기계와 인간, 현실세계와 CG의 조화를 추구하는 산업 디자이너 출신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새로운 시대의 시드 미드가 될 수 있을까. 그의 차기작 <스타워즈: 에피소드7>이 그 대답이 될 것 같다.
<오블리비언>의 버블십
디자인 기간 8개월, 제작 기간 4개월, 무게 2만t, 옮기는 데에만 7개의 컨테이너가 필요했다. 대런 길포드가 제트기와 벨 47 헬리콥터의 디자인과 기능을 혼합해 만든 <오블리비언>의 버블십은 프로덕션 디자이너로서 그가 새롭게 구현해낸 멋진 오리지널이라 할 만하다. 외관은 물론이고 눈금판과 페달, 조종석과 허리 받침용 좌석까지 모든 요소를 사람이 직접 탈 수 있는 형태로 구상한 버블십의 완성본을 보고 톰 크루즈와 조셉 코신스키 감독은 만족스러워했다고. “누가 이걸 실제로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직접 타고 다니게.”(톰 크루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