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중간계의 조물주
2014-12-09
글 : 송경원
<호빗> 시리즈 댄 헤나 Dan Hennah
<호빗 : 다섯 군대 전투>

Filmography


미술감독

<킹콩>(2005)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2003)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2002)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2001) <프라이트너>(1996)

프로덕션 디자인

<호빗: 다섯 군대 전투>(2014)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2013) <호빗: 뜻밖의 여정>(2012) <워리어스 웨이>(2010) <언더월드: 라이칸의 반란>(2009)

중간계

J. R. R. 톨킨이 상상했고 피터 잭슨이 구현했다. 하지만 총괄미술감독으로 참여한 <반지의 제왕> 3부작부터 프로덕션 디자인을 맡은 <호빗> 3부작까지 톨킨이 창조한 중간계를 현실로 만든 건 댄 헤나의 손이다. ‘땅속 어느 굴속에 호빗이 살고 있다’는 한 문장으로 출발한 신세계는 톨킨의 경험과 상상이 조화롭게 반영된 곳이었다. 가령 빌보 배긴스의 집 ‘백엔드’는 톨킨의 고모가 소유한 우스터시어의 농장 이름을 그대로 따왔을 만큼 중간계는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을 겹겹이 쌓아올린 세계다. “현실 같지 않은 현실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 댄 헤나의 목표였고, 그는 <반지의 제왕> 3부작의 개념과 골격을 세우는 데만 꼬박 5년을 매달렸다. “금방 철거할 마을이 아니라 정말 와서 살아도 좋을 내 고향 ‘샤이어’를 짓고 싶었다. 톨킨은 우리의 시작이자 끝이며 성경이었다. 하지만 거기엔 여전히 확장의 여지가 있다. 이 미묘한 지점을 포착할 줄 알아야 한다.” 중간계의 창조는 프로덕션 디자인 역사에서도 쉽지 않은 진기록을 남긴다. 참여한 미술팀만 400명이 넘었고 3편을 한꺼번에 찍는 작업 방식 때문에 <반지의 제왕> <호빗> 둘 다 세트 제작과 촬영에만 15개월 이상이 걸렸다. 아카데미는 그 장대한 도전을 기리며 시리즈의 마지막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때 그에게 미술상을 수여했다.

<호빗 : 스마우그의 폐허>

뉴질랜드

중간계 6부작은 판타지가 꿈꾸는 대부분의 풍경이 지구상에 실제 존재함을 일깨워주었다. <반지의 제왕>을 통해 관광대국으로 거듭난 뉴질랜드의 풍광은 이제 다른 영화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다. 뉴질랜드 헤이스팅스의 한 농장에서 태어난 그는 피터 잭슨의 제안을 받자마자 뉴질랜드로 달려갔다. 그리고 “뉴질랜드가 중간계의 아이디어를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며 하루에 12시간씩 헬리콥터를 타고 뉴질랜드 이곳저곳을 누볐다. “세트를 짓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영감은 늘 자연으로부터 와야 한다”는 그는 디자인의 영감 대부분을 책이 아니라 자연에서 얻는다. <호빗> 때도 안개 산맥에 어울리는 산을 찾기 위해 몇 개월의 탐사를 마다지 않았다. 로케이션과 세트의 조화를 중시하는 댄 헤나의 철학은 그의 영화계 입문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81년, 친구인 배우 테이텀 오닐의 추천으로 참여한 영화 <죄수>에서 몇달간 드로잉과 페인팅 작업을 했다. 비록 영화는 무산됐지만 이때의 경험을 통해 아이디어는 디자이너의 머릿속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고. “세트는 유기적이다. 프로덕션 디자이너에겐 감독의 구상, 포스트 프로덕션상의 아이디어, 특수효과의 한계, 예산까지 염두에 둔 유기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피터 잭슨

<프라이트너>(1996)를 만난 건 일생일대의 전환점이었다. 피터 잭슨은 “되돌아보면 너무 많은 포커스와 정리되지 않은 비전을 제시했는데 그걸 어렵지 않게 정리해준 사람”으로 당시에는 경험이 많지 않았던 댄 헤나를 주목한다. 현실에 기반을 둔 큰 규모의 세트 디자인에 일가견이 있는 댄 헤나의 재능을 알아본 피터 잭슨은 이후 <반지의 제왕> 프로젝트에 그를 참여시킨다. “판타지는 리얼리티에서 출발한다”는 생각을 공유한 두 사람은 이후 15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하며 서로의 멘토가 된다. “피터 잭슨은 명확한 비전을 제시한다. 예산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고. 그 점에서 나와 정반대라 서로에게 자극이 된다. 너트와 볼트 같은 작은 것까지 전부 마련해야 하는 프로덕션 디자인에서 큰 밑그림을 호쾌하게 제시하는 그의 상상력은 소중하다.” 댄 헤나의 말처럼 그는 자신의 재능을 꽃피울 토양을 찾아냈다. 물론 피터 잭슨도 마찬가지. 깐깐한 시어머니처럼 자신을 통제하고 막연한 상상을 구체적으로 지어올리는 댄 헤나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낸다. 이후 중간계 6부작은 물론 어쩌면 더욱 심혈을 기울인 <킹콩>까지 맡아 피터 잭슨의 손발이 되어 활약 중이다.

<호빗 : 스마우그의 폐허>

빅어처

댄 헤나의 미술을 이루는 두축은 로케이션과 미니어처다. 둘의 공통점은 모두 거대하다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 ‘빅어처’라 부르는 세트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크고 웅장하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와 <킹콩>의 프로덕션 디자인을 맡은 그런트 메이저는 이 점에서 댄 헤나와 의견을 같이했다. 2500개가 넘는 <킹콩>의 미니어처들은 평균적으로 거대한 해골섬의 컨셉에 맞춰 세트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큰 사이즈로 제작되었다. 해골섬 분량은 전부 모형 세트 안에서 촬영되었는데 때로는 아예 암벽을 통째로 만들기도 했고 기괴한 숲을 구현하고자 이파리 하나도 직접 공수했다. 심지어 거대한 고사리를 만들기 위해 1년 2개월 동안 거대 고사리를 직접 키우기도 했다. 이처럼 미니어처라기보다는 세트 디자인에 가까운 소품들은 <반지의 제왕> 때부터 이어온 일종의 전통이다. 빅토리아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댄 헤나는 건축사무소에서 근무한 경험을 십분 살려 세트를 사실적으로 짓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렇다고 무모하게 큰 세트를 마구 짓는 건 아니다. “프로덕션 디자인은 도면을 따라가는 작업이다. 순수예술적인 측면도 있지만 다양한 비전을 예산 범위 안에서 집행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처럼 그에게 있어 세트는 예술이라기보다는 어쩌면 건축의 연장처럼 보인다.

<물랑루즈>

판타지의 대가 댄 헤나가 디자인의 관점에서 개인적으로 존경해 마지않는 영화는 바즈 루어먼 감독의 <물랑루즈>다. 2001년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와 함께 아카데미 미술상에서 각축을 벌였던 이 영화에 댄 헤나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5년 넘게 공들인 프로젝트가 수상을 하지 못해 아쉬울 법도 하건만 ‘오스카의 정당한 주인’이라고 치켜세운 이후에도 여러 인터뷰를 통해 <물랑루즈>에 경탄을 드러냈다. “완벽하게 주제에 적합한 디자인”이라는 평가에서 다른 요소와의 조화를 중시하는 그의 디자인 성향을 읽을 수 있다. 색 사용에 민감한 그는 <물랑루즈>의 과감하고 화려한 색이 오히려 이 환상적인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만들어준다고 언급했다. <반지의 제왕> 역시 이같은 선명함을 지향하고 있는데 “세트 디자인은 사실적이되 색채는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호빗>의 48프레임은 또 하나의 도전이었을 것이다. “실제 유럽을 여행하며 지붕의 디자인과 색감을 참고했다. 색과 디자인을 사실적이고 선명하게 하는 이유는 영화를 통해 쉽게 꿈꿀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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